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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돈 (지은이) 지음
민음사 펴냄

이 책은··· 이 책을··· "그러나 지금 현재가 너무 이상하고 비현실적이어서 어느 쪽이 진짜 현실인지 알 수 없었다." (1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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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란하다. 이상한 책이다. (···) 사실 정지돈의 전작을 읽어보았다면 이상할 건 하나도 없다. 난 이 '이상함' 때문에 정지돈을 좋아하니까. 읽다가 자꾸 『모든 것은 영원했다』(문학과지성사, 2020)가 떠올랐다. 그 작품 후반부 「미래를 전망함」에서는 소설가 '나'가 등장하는데, 이번 책의 후반부 「아타리 다이어리」에서도 웹소설가 '나'가 등장한다.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불의"를 "대의나 목표, 의미와 연결할 수 없었다"(166쪽)는 점에서 두 작품의 주인공인 '정웰링턴'과 '프랜'이 겹치기도 하고.

물론 이번 책이 훨씬 더 골때린다. 당연함. 저번 책은 과거의 인물을 조망하며 "미래를 전망"했다면, 이번 책의 배경은 온통 근미래니까. 실로 어질어질 아찔하고, 웃음은 사방팔방서 새어 나오고, 어쩜 이 작가는 이런 사소한 것조차 빼먹지 않을까, 진정 K-문학계의 침착맨일세··· (물론 이 지점에서 '침착맨'에 대한 여러분과 저의 견해가 다를 수 있음 주의)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

"그때 생각하자. 좋은 말이지만 프랜은 지금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때가 되면 욕망은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둘러싼 환경도 변하고 약속이나 다짐, 상상이나 꿈은 헌책처럼 창고에 처박힐 것이다. 그러니 지금 구체적으로 상상해야 한다. 구체적인 건 무엇이나 현실이니까. 미래는 시간이 아니라 꿈속에 있다." (70쪽)

전작에서 정지돈은 현재에서 과거를 통해 미래를 바라보았다. 이번에 그는 현재에서 근미래를 통해 미래를 바라본다. 위의 문단을 읽으면서 나는 정지돈이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우리게 종용하고 있다 느꼈는데, 이 책을 읽다 보면 수십 번 넘게 다음에 읽자는 생각이 드니까. 음··· 2022년의 인류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이른 작품이네··· 이런 생각이 드니까. 그러나 "미래는 시간이 아니라 꿈속에 있다".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우리에게 있다! 이렇게 외치고 있는 것만 같다.

*

물론 그도 안다.

"그 속사정을 알 수 없다고, 안다 해도 되돌리거나 움직일 수 없고 움직인다 해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을 거라고. 그것이 때로 우리를 절망하게 할지 모르지만 대부분의 경우 아주 작고 표면적인 일을 통제하고 실천하는 것에 만족하며 살 거라고." (148-149쪽)

현재에서 미래에 대해 어쩌고저쩌고 한다 해도 우리는 그저 작은 일에 만족하며 사는 사람이 될 거라는 사실을. 그렇기에 나는 작가에게 참 고맙다. 적어도 조금 큰 일을 통제하고 실천하고 있다고 착각하게 해주네. "말이 단지 말을 하는 것뿐"일지라도 "언어가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다"(194쪽). 이거야말로 떠먹여 주는 『미래 산책 연습』 아님? '세계의 인용의 인용'을 추구하는 정지돈, 이번에도 열일했다. 이 한 권으로 뚝-딱, 미래를 예습해버린 것 같아 기쁘다. (물론 한 오백 번 정도 읽어야 다 이해할 수 있을 듯함.)

*

"누가 그런 말을 했다.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실천하는 거라고, 생명을 설명할 순 없지만 생명을 창조할 순 있다고, 미래를 아는 유일한 방법은 미래가 오길 기다리는 거라고,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186쪽)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말한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썼다고. 앞으로도 쓸 거라고. 그럼 나는 이렇게 말해야지. 그래서 나는 정지돈을 읽는다고. 앞으로도 읽을 거라고.
2022년 6월 2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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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 보러 다대포 가는 1호선 안에서 박솔뫼의 「여름의 끝으로」를 읽다가 이런 부분이,

“차미를 안고 등에 코를 묻으면 땅콩 냄새 같은 고소한 냄새가 났다. 일정한 소리로 코를 골며 자는 차미의 등에 코를 대고 고소한 냄새를 맡았다. 잠이 올 것 같은 냄새였다.” (33쪽)

어젠 요가원에 좀 빨리 갔고, 한참 동안 나와 선생님 그리고 고양이 샨티밖에 없었는데, 샨티는 내 요가 매트 위에 올라와, 내게 등을 돌린 채로 앉아 있고, 바즈라아사나로 요가를 준비하려던 나는, 금세 샨티의 집사가 되어, 샨티의 등을 주물주물, 코를 대고 고소한 냄새를 맡으며,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어느덧 서늘해진 바람과 따듯한 샨티의 등을 동시에 만졌다. 여름의 끝이구나.

믿음의 개는 시간을 저버리지 않으며

박솔뫼 지음
스위밍꿀 펴냄

11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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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부산 가는데 『미래 산책 연습』 진짜 안 챙기려 했거든? 방금 후루룩 훑었는데 도무지 안 들고 갈 수가 없네··· 이를테면 이런 장면,

"된장찌개를 시켰는데 비빔밥을 시킬걸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이제 하루가 지났고 남은 휴일은 무얼 하지 머릿속으로 일정을 정리하려 했지만 때마침 테이블에 커다란 보리차 주전자가 탕 소리를 내며 놓였고 커다랗고 따뜻한 주전자를 보자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졌고 보리차를 마시자 반찬이 나오고 상추가 나오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할 틈도 없이 테이블 위에 빠짐없이 차려진 밥을 먹기 시작했다." (47쪽)

나도 정말 제발 진실로 진정 이렇게 여행하고 싶다···
11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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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문학평론가가 주고받은 열두 편의 서신을 모아 놓은 책. ‘지금-여기’의 책들에 관해 나누는 이야기라 무척 재미있다. 두 분이 함께 읽은 책 중에는 내가 살펴보았거나 읽었던 책이 왕왕 있었고. 김대성, 김봉곤, 김지연, 김혜진, 서이제, 알렉세이 유르착, 유성원, 임솔아, 임현, 장류진, 조지 오웰, 한병철의 작품. 3분의 1 이상은 알고 있어서 어찌나 다행이었는지. 그러나 내가 모르는 작품에 관해 나누는 서간을 읽을 때도 역시 즐거웠다. 온종일 한국문학 이야기 정말로 자신 있는 나로서는,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책 가지고 양껏 수다 떠는 걸 지켜보는 게 못내 좋았다. 문학이 수다를 떨게 만드는 순간은 정말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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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에 대한 기만적인 인정으로 무언가를 봉합해버리려는 편의적인 행태에 대해, 저 역시 선생님과 똑같이 못마땅해하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서로의 생각 안으로 들어가 그 다름 속에서 한껏 부대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계기를 촉발하지 않는 타자는, 아무리 ' 차이'라는 명분으로 세련되게 포장하더라도 결국 동일성의 반복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 선생님과의 대화 혹은 열띤 논쟁이 즐거웠던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대화에서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합의와 존중의 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67쪽)

이 부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작년에 친구들과 (독서모임)을 시작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역시나 서로의 생각이 이렇게나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서로의 생각 안으로 들어가 그 다름 속에서 한껏 부대”꼈을 때. 올해도 앞으로도 마음껏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이 편지는 제주도로 가는데, 저는 못 가는군요

장정일 외 1명 지음
안온북스 펴냄

2023년 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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