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은영 작가님의 단편소설집을 읽으면 신비로운 감정에 휘말린다. 어딘가엔 있을 법한, 주변에 있을 법한, 혹은 나일 수도 있을 법한 한 사람의 마음 들여다보는 느낌이 들어서.
데비 챙, 숲의 끝, 저녁 산책, 호시절이 특히나 좋았다. 의도치 않은 오해, 사랑과 우정의 그 비슷하고도 애매한 감정, 자연스러움 속 의문을 품게 만드는 불편함 등이 너무 잘 표현되어 있다.
애쓰지 않아도
최은영 (지은이), 김세희 (그림) 지음
마음산책 펴냄
6
표지 속 파란 백합꽃 그림에 이끌렸다. 매일 한 권씩 공개한 시리즈물이라 짧게 짧게 27권까지나 있다고 하니, 가볍게 하루에 한두 권씩 읽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시작했다. 그렇게 네 시간 동안 손에서 놓지 못했고 심지어 우느라 막힌 코훌쩍이는 소리에 아기가 깨진 않을지 걱정하고 있다.
로맨스인 줄 알았다. 인터넷 로맨스 소설인 줄로만 알았다. 이미 처음부터 상당히 재밌었고, 5권쯤 읽어갈 땐 너무 로맨틱 자극적이라 이 소설에 심취해 읽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읽는 내내 제목이 신경 쓰였다. It Ends With Us의 Us는 화자 릴리와 누구를 지칭하는 걸까? 아무래도 아틀라스일까? 이 사랑 이야기의 끝은 누구와 함께하는 걸로 끝날까? 그런데 왜 한국어 제목은 ‘우리가 끝이야’일까? 우리가? 우리로? 한 권 한 권 넘어갈 때마다 궁금했는데, 26권 마지막이나 되어서야 알았다. 로맨스의 끝을 뜻하는 게 아니었구나.
가정폭력을 당하고도 상대방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몰랐다. 나도 주인공 릴리처럼, 피해자들이 더 현명한 판단을 할 줄 몰라서 안 떠나는 거라고 생각해왔나보다. 그런데 이 책이 나를 완전히 납득시켰다. 폭력가정에서 자란 릴리가 또 자신의 가정 속에서 가정폭력의 피해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보면서도 나는 이 소설이 끝나기 직전까지 로맨스 소설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27권 중 26권 마지막에서야 비로소 주인공이 딸에게 하는 말 ‘이 가정폭력의 대물림은 우리에서 끝내는 거야’에서 나온 It Ends With Us라는 걸 알았다.
제법이다. 나도 라일에게 꿈뻑 속아 넘어갔다. 아버지 장례식날 속이 답답해 올라간 고층 건물 옥상이라는 인소에나 나올법한 첫 만남, 갑자기 뚝딱 일을 그만두고 가게를 열었더니 대뜸 성격 좋고 예쁘고 착한 밀리어네어가 심심해서 일하겠다고 들어왔는데 알고 보니 남주의 여동생이고, 남주는 큰 병원 의사에, 진지한 만남 싫어파인데 여주를 만나고서 사랑을 알게 되고, 어쩌다 여주에게 해를 가하지만 알고 보니 또 엄청난 일을 겪어서 트라우마로 인해 발현되는 행동이었다니 나 같아도 두 번 세 번 용서하게 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 무엇도 약자 폭행에 있어 이유가 되어줄 순 없다. 라일이 아무리 화나도 마동석 앞에서 퓨즈가 나가진 않을 것 아닌가? 감히 릴리를 힘으로 밀치고 이마를 꼬매야 할 만큼 세게 박치기를 하다니 빌어먹을 자식.
작가는 본인이 자라온 가정에서 많은 부분을 가져와서 이야기를 적었다고 한다. 자신의 어머니처럼 가정폭력을 당해온 피해자들을 위한 글을 적고 싶었다고. 다른 건 몰라도 피해자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확실히 되었다.
찾아보니 올해 곧 아틀라스를 중점으로 한 소설 It Starts With Us도 곧 출간된다고 한다. 이건 확실히 로맨스 소설이겠다고 생각하는 건 또 나의 착각이려나. 아틀라스 너무 완벽한 캐릭터라 세상 제일로 오글거릴 것 같지만 한번 읽어보고 싶다. 이왕이면 원서로.
“이 세상에 나쁜 사람 같은 건 없어요. 우리 모두 가끔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일 뿐이에요.”
“그냥 헤엄치는 거야. 그냥 계속 헤엄쳐, 계속, 계속.”
나는 딸의 이마에 입 맞추고 약속했다. “여기에서 멈춰야 해. 나랑 네가 끝내는 거야. 우리가 끝내야 해.” - <우리가 끝이야> 중에서
It Ends with Us
콜린 후버 (지은이) 지음
Thorndike Press Large Print 펴냄
👍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
추천!
4
이 책 뭐야, 왜 이렇게 재밌어? 가끔 소설을 읽다 보면 '영화로 나오면 재밌겠다' 혹은 '드라마로 나오면 재밌겠다'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 책 중에 시각화된 케이스도 많다. 웹툰도 가끔 보면 글로 풀어냈으면 더 좋을 텐데 싶을 때도 더러 있다. 그런데 이 단편 소설집은 소설 그 자체로 너무 완벽하다. 분위기나 내용 흐름이 너무 실제로 있었던 얘기를 써놓은 듯이 자연스럽고, 이미 읽는 내내 내 머릿속에서 완벽하게 구현된다. 특히 내가 아는 장소들이 잔뜩 나와서 그런 걸 수도 있겠다.
어릴 때부터 어떤 작가의 책이 재미있었으면 그 작가의 책을 몰아서 읽는 습성이 있다. 최근에는 일본 작가의 책을 되도록 읽지 않으려고 하지만 요시모토 바나나를 시작으로, 히가시노 게이고, 기욤 뮈소, 프레드릭 베크만, 아멜리 노통브 등 믿고 읽는 작가 리스트가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는 딱히 감독을 보고 선택하지는 않지만, 믿고 보는 감독 리스트를 마음속에 새기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도 이해가 된다. 그런데 한 작가의 책을 몰아서 읽다 보면 생기는 부작용이 있다. 줄거리나 분위기나 등장인물들이 전부 비슷해서 나중에 내용이 구분이 안 된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중학생 때 읽었던 요시모토 바나나의 작품들과 20대 초반에 푹 빠졌던 기욤 뮈소의 수많은 작품은 단 한 권도 구분을 못 한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모든 주인공이 귀신을 보고, 기욤 뮈소는 모든 주인공이 작가거나 의사다. 아무래도 소설처럼 아주 새로운 허상의 인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그 인물의 생활 환경이나 직업에 대해 빠삭해야 구성이 탄탄해지기 때문에 한두 가지 직업이 모든 작품에 녹는 거겠지. 독립영화에서는 주인공의 직업이 영화감독인 경우도 많고, 소설책에서는 주인공의 직업이 작가인 경우가 많으니까 말이다. 아쉽게도 영화감독이나 작가의 길을 걸어본 적 없는 나로서는 주인공에 100% 몰입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소설집은 내게는 100% 리얼리즘으로 다가오는 단편소설이 한가득이었다. 읽는 내내 '이건 진짜다, 이건 겪어본 사람만 쓸 수 있는 거야'라고 생각했는데, 책을 다 읽고 팟캐스트 인터뷰를 서너 개 들어보니 역시 아니나 다를까, 판교로 회사를 다니며 재직 중에 집필하셨단다. 세상에 너무 재밌어, 너무 재밌어! 단편 소설집이니까 독서 모임 날까지 마음 편하게 한 작품씩 여유 있게 읽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집어 들었는데, 8개의 작품을 단숨에 다 읽어버렸다. 덕분에 수면 부족으로 다음날 종일 눈이 너무 아팠지 뭐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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