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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혹하는 이유 (사회심리학이 조목조목 가르쳐주는 개소리 탐지의 정석)의 표지 이미지

우리가 혹하는 이유

존 페트로첼리 (지은이), 안기순 (옮긴이) 지음
오월구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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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세상에 대해 이런저런 신념을 지니며, 그 신념은 곧 그들이 어떤 느낌을 받을 때 그렇게 느끼는 이유가 된다고 잘 알려져 있다. 이처럼 사람들은 직관적인 사고방식을 자주 선호하는데, 좀 더 공식적인 추론 체계와 비교할 때 더 신속하고 수월하게 맥락에 맞춰 이끌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정의상, 직관과 느낌은 정확하지 않고 따라서 이성적이지 않다. 실제로 자신이 왜 그렇게 느끼는지 이유를 제시할 때, 사람들은 말로 표현하기 가장 쉬운 이유에 의존할 때가 많다. 문제는 말로 표현하기 가장 쉬운 이유가 자신의 판단과 느낌을 설명하는 진짜 이유와 항상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이때 입 밖으로 나오는 것이 개소리라는 점이다.

아마도 개소리 때문에 실질적으로 치러라 하는 가장 큰 대가는 주로 달갑지 않은 영향을 제거할 때 드는 시간과 노력이 애당초 그 영향을 생성할 때보다 기하급수적으로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개소리는 몇 초면 생성할 수 있지만, 잘못이라고 입증되기까지는 몇 년이 걸릴 수도 있다.
대중 방송을 개소리로 채우면 신념과 태도를 효과적으로 형성하고 유지할 수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라디오 진행자의 주장이 사실인지 알아내려면, 자신이 신뢰하는 소식통의 정보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믿을 때보다 훨씬 시간과 노력을 많이 기울여야 한다.
따라서 나는 개소리를 무해하다면서 물리치기 전에, 개소리 때문에 우리가 어떤 심리적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다. 개소리는 우리의 기억, 태도와 신념, 결정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다.

‘오류적 진실 효과’는 거짓 정보에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진실이라고 믿는 경향이다. 예를 들어, 정치인이 진실일 리 없는 허황된 말을 반복하고, 이를 주류 언론과 소셜미디어가 퍼뜨리면 유권자들은 거짓을 사실로 믿기 시작한다.

불행한 현실이지만 우리의 기억, 믿음, 태도 결정에서 많은 부분은 증거에 근거한 추론보다는 개소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래서 개소리를 더욱 깊이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지적 사회적 과제의 하나일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우리는 개소리에 쉽게 흔들린다. 이 점을 인정하는 태도가 대단히 중요하다. 개소리가 그토록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이유는 개소리를 쉽게 탐지할 수 없다고 명백히 입증하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는데도 자신은 개소리를 탐지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개소리는 죽은 사람과 대화하는 심령술사나 점괘 신봉자들에 국한되지 않으며, 우리가 생각지도 못할 출처를 포함해 어디든 존재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잘 모르는 사항을 알고 있다고 믿고 싶어 한다. 또 어떤 자동차를 살지, 어떤 경력을 추구할지, 어떤 상대와 결혼할지, 아이들을 어떤 학교에 보낼지, 어떤 후보에게 투표할지 선택할 때 옳은 결정을 내렸다고 믿고 싶어 한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할 때는 안전감을 느낄 때이다. 하지만 아무리 진실이기를 간절히 바라더라도, 실제로 모르는데 아는 척을 하는 경우에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따른다. 합리적으로 정보에 입각한 접근 방식을 따랐는데 달갑지 않는 진실이 도출된다면 비이성적이고 검증되지 않은 말에 말려들기 쉽다. 자신이 진실이라고 믿고 싶어 하는 것을 진실 그 자체보다 선호할 때, 우리는 개소리가 번성하는 풍토를 만든다.

때로는 판단과 고를 수 있는 선택지의 영역이 비교 기준이 되기 때문에 상황의 맥락이 개소리 취약성에 영향을 미친다. 달리 말하자면, 상황이 만든 기준에 따라 인식이 형성되기 때문에 어떤 것을 정확하게 인식하기 어려워진다.
개소리 취약성에서 중요하고 기본적인 요소는 확실성의 정도이다. 설득과 영향은 불확실성이라는 조건에서 가장 잘 가동한다. 확신이 없는 사람들은 대답과 명료성을 찾으며, 솔직히 대개는 개소리를 탐지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지식을 갖추고 있지 않다.

사람들은 원인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거나 진실이라는 증거가 없는데도 특정 주장을 믿는다. 이러한 태도가 논거를 증거인 양 생각하는 경향을 부채질해서 문제를 악화시킨다. 논거와 증거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개소리에 취약해지는 것이다.
다행인 것은 논거를 증거로 간주하는 경향은 간단한 노력으로 바꿀 수 있다. “왜?”라는 질문을 “어떻게?”라는 질문으로 대체하면 된다. 사람들은 어째서 무언가를 진실이라 생각하는지, 어째서 무언가가가 통한다고 생각하는지 설명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의견과 단순한 논거를 제공하는 상대적으로 더 쉬운 목표를 끌어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무언가가 통한다거나 진실인지 어떻게 아는지 설명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는, 증거를 제공하는 상대적으로 어려운 목표를 이끌어내는 경향이 있다. 논거를 생성하기가 더 쉽기 때문에 증거를 제시하기보다는 논거를 생성하는 방향으로 기울 때가 많은데, 그때마다 우리는 “이것이 사실인지 어떻게 아나요?”라고 묻는 것은 개소리 취약성을 줄이기 위해 밟아야 할 매우 중요한 단계이다.

페니 쿡이 주장하는 관점에 따르면, 사람들이 가짜 뉴스와 개소리를 믿는 것은 거짓이 진실이기를 바라는 동기부여 추론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소셜미디어에서 보고 들은 내용에 대해 거의 생각하지 않는 “게으른” 사고방식 때문이다.

사고 과정에 따르는 수많은 함정은 인지적 착각처럼 작용한다. 또 동기부여가 부족해서든, 비판적 사고에 필요한 정신적 자원이 부족해서든, 이런 함정들은 개소리 취약성을 증가시킨다.

사람들이 개소리에 속아 넘어가는 또다른 이유는 때로 진실을 무시하도록 동기를 부여받기 때문이다. 가장 강력한 사회적 동기부여는 소속의 욕구,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일관성 있게 생각하고 행동하려는 욕구, 자기 행동이 정당하다고 느끼려는 욕구 등이다. 이러한 무언의 욕구들 때문에 우리는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누가 먼저 버튼을 누를지 어색하게 기다리는 짧은 시간에도 개소리에 속아 넘어갈 수 있다.

최선의 증거를 근거로 신념을 구축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동기부여적 개소리 취약성은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일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올바른 증거 뿐이고, 그러한 증거를 확인하면 더 이상 개소리를 믿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실수를 자주 한다. 인지적 이유나 맥락적 이유로 개소리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은 증거를 확인하면 이성적으로 대응할 수도 있지만, 동기부여적 이유로 개소리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개소리를 믿고 싶어 하므로, 아무리 확실한 증거를 들이밀어도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개인의 동기부여적 개소리 취약성을 탐지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는 상대방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다. “한 점의 의심도 없이 A는 정확하지 않고 B가 정확하다는 증거가 나온다면 B가 진실이라고 믿겠습니까?” 이때 아니라고 대답한다면 상대방은 동기부여에 근거해 개소리를 지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당신이 아무리 설득해도 헛수고일 뿐이다. 사실을 제시해도 강한 반발에 부딪히고, 오히려 더 황당한 개소리에 불필요하게 노출될 것이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모면하려고 할 때 개소리할 가능성이 더욱 크다는 사실이 입증되면서, 자신의 설명이 사전 지식을 보유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평가받으리라는 말을 들었을 때(즉 개소리를 납득시키기 쉬울 때) 참가자가 개소리할 확률은 41퍼센트로 훨씬 더 컸다. 하지만 사전 지식을 보유한 사람들에게 평가받으리라는 말을 들었을 때(즉 개소리를 납득시키기 어려울 때) 참가자가 개소리할 확률은 29퍼센트로 줄었다.
프랑크푸르트 이론에서 밝히듯,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말하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타인이 없을 때 더욱 기꺼이 개소리를 한다. 내 경우에는 내 차에 대해 자동차 정비사에게 개소리를 하려 하지 않는다. 내가 차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이라고는 고작 차에 휘발유를 넣어야 한다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볼보 스테이션 웨건의 브레이크가 어떻게 작동하느냐고 묻는 딸에게는 개소리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개소리를 통과시키기 쉬우리라 신호를 보내는 것은 어떤 신호이든 개소리꾼에게 진실을 마음껏 농락하라고 허용하는 셈이다.

시험 결과를 보면 참가자들이 사회학 교수의 의견을 모르거나, 교수와 의견이 다르다고 믿는 경우에는 무책임 조건 집단보다 개소리를 줄였다. 하지만 교수의 의견이 자신과 같다고 믿는 경우에는 무책임 조건 집단의 참가자들만큼이나 개소리를 했다. 달리 말해서 자신이 표현하는 생각과 의견의 타당성에 대해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예상하면 개소리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기 말에 책임을 져야 하리라 스스로 예상할 때조차도 다른 사람들이 동의해주리라 기대하는 경우에 책임감은 사람들이 얼마나 개소리를 하는지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다. 이때 자주 나오는 것이 개소리다.

개소리하는 성향이 강한 개소리꾼들은 진실과 증거에 무관심할 뿐 아니라 제시된 증거에 우호적으로 반응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상대방이 냉정하고 확실한 증거에 대해 계속 비이성적으로 반응한다면 당신은 아마도 개소리꾼을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개소리꾼들은 누구라도 자신의 주장은 반증하는 증거에 초점을 맞추고 싶어 하지 않는다. 비클렌은 촉진된 의사소통의 효과를 부정하는 모든 증거를 사람들이 무시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노련한 개소리꾼들은 부정적 증거를 제거하거나 무시할 수 있는 창의적인 방법을 찾는다. 동시에 자신의 주장을 믿으려는 사람들의 동기를 이용한다. 만약 사람들에게 개소리꾼의 주장을 믿겠다는 동기가 없으면 개소리꾼은 사람들의 주의를 분산시켜 부정적 증거를 보지 못하게 하고, 일화적인 증거를 제시해 판단을 흐리게 함으로써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의구심을 제거한다.

일화적인 증거에 의존하는 방법은 편리하다. 최소한의 노력으로 주장을 입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로지 일화적 증거만 가지고 추론하기 때문에, 개소리꾼들이 내리는 판단에는 몇 가지 단점이 있다. 개소리꾼은 자기 신념은 뒷받침하는 증거는 무엇이든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자신이 “명중”시킨 것에 가치를 두고) 반면에 자기 신념에 거스르는 증거는 무엇이든 무시하는(자신이 “놓친” 것에 가치를 두지 않고) 경향을 보인다. 모든 사람의 주의를 분산시켜서 특별한 주장에는 특별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하게 만들고, 몇 가지 관찰에 근거해 대담한 가정을 내리고 싶어 한다. 그리고 아마도 통계학 교수들이 가장 실망할 사실인데, 개소리꾼들은 수탉 울음소리와 일출처럼 대상 사이에 관찰된 관계(상호관계)를 하나가 다른 하나를 발생시키는 개념(인과관계)과 결합시킨다.

우리는 이러한 터무니없는 주장에 놀라지 말아야 한다. 결국 개소리, 엉터리 주장, 사이비 과학, 괴짜 과학, 철저한 사기는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고, 지금처럼 잘못된 정보와 가짜 뉴스가 판치는 세상에 받아들여질 수 있으며, 심지어 설득력이 있다고 여겨지기까지 한다. 우리는 비판적인 질문을 하지 않는 한 설로 같은 개소리꾼에게서 잘못된 정보를 계속 소비할 것이다.

근거를 명확히 밝혀달라고 요청했을 때 대답으로 훨씬 심한 개소리를 듣더라도 놀라지 마라. 사람들이 품는 신념의 토대는 대개 인식론적 근거나 경험적 근거보다는 도덕이나 동기부여 같은 이유이다. 개소리에 의문을 제기했다고 해서 더없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결과가 나오리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목표는 추론에서 이해 가능한 오류를 밝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비난하는 것보다 더욱 효과적으로 진실에 도달할 수 있다.
다음처럼 온화한 표현을 써서 질문해보자. “나는 매우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어요. 다만 당신의 생각을 명쾌하게 이해하고 싶습니다.”
2022년 4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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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내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야. 그러니 남 탓도 할 수 없고.”
“그래도 ‘성취하려던 뜻을 단 한 번의 실패 때문에 저버리면 안 된다’라는 말도 있잖아요.”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이 애는 가끔 요상한 말을 입에 올린다.
“격언이요. 어렸을 때부터 격언을 무지 좋아해서 뭔가 도움이 되겠다 싶으면 모조리 적어두는 습관이 있거든요. 물론 경우에 안 맞는 격언을 인용해서 여기 마스터한테 웃음거리가 되는 일도 많지만. 방금 그건 셰익스피어.....였나? 아무튼 한 번 실수했다고 그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뜻이잖아요. 그러니까 아저씨도 새로 시작하면 된다고요.”
“새로 시작하다니, 무리야.”
“단칼에 잘라버리네.”
아야코가 웃었다. 표정이 수시로 바뀐다.
“그래도 저는 그런 생각이 항상 들더라고요. 뭔가 삐걱거리고 잘 안되는 일이 있을 때도 있지만, 언젠가는 그런 실패도 소중한 경험이 될 거라고, 게다가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는 귀찮은 것도 많지만 막 기대되고 설레기도 하잖아요.”
“긍정적이네.”
“유일한 장점이죠. 3년 전에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는 정말 넋이 나간 애처럼 지냈는데 계속 그런 식으로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렇군.”
커피잔은 내려다보면서 내가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사나에는 대단한 딸은 둔 모양이다.
“네. 그러니까 아저씨나 저나 너무 열심히는 말고, 적당히 열심히 살아요. ‘세상은 아름답다. 싸울만한 가치가 있다’라는 말도 있으니까요. 이건 미국의 대작가인 헤밍웨이의 말이에요.”
그녀는 그런 격언을 내뱉으며 손가락으로 V자를 만들어 보였다.

기적을 내리는 트릉카 다방

야기사와 사토시 지음
문예춘추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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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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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정된 회사의 수를 자랑하고 싶다거나 안심하고 싶다거나,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누군가 한 사람이라도 좋으니까, 한마디라도 좋으니까, 나한테 말해줬으면 싶었다. 너는 너 나름대로 열심히 해 왔구나, 하고.
“월급도 변변치 않은 회사에 들어가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건 나도 똑같아. 그러니 나랑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을 쉽게 볼 수는 없어.” 나 자신도 놀랄 만큼 차례차례 말이 흘러나왔다. “나 같은 인간이, 혹시나 취직이 된다고 해도 잘해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어. 그래도, 내가 회사에서 잘나가지 못한다고 해도, 남한테 취업 같은 거 때려치우라는 소리는 못할 것 같아. 그래서....”
“나는!” 기요타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난 일 같은 거 어려워서 회사 관둔 거 아니야. 주변 인간들 수준이 한심해서, 그런 놈들 이겨봤자 뭔 의미가 있나 싶어서, 그래서 관둔거라고.”
뒤쪽 건널목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어느새 우리는 선로 옆길을 걷고 있었다.
“...그래, 그런데....” 말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아 에둘러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기요타, 넌 지금 이겼어?”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앞쪽에서 열차가 달려와 우리를 지나쳐갔다.

8월의 은빛 눈

이요하라 신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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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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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상황도 우리는 좋고 나쁨을 곧바로 판단할 수 없을지 모른다. 사건은 언제나 그냥 일어나기 마련이므로.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스스로와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되기를 바라고, 믿고, 행동할 뿐이다.

“달은 말입니다. 탄생 직후에는 지금보다 지구와 가까워서 훨씬 크게 보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구 주변을 고작 5시간 만에 돌았다고 하죠. 물론 거리가 가까운 만큼 지구에 준 영향도 엄청나서 조수 간만의 차 때문에 바닷물이 요동을 칠 정도였죠. 그게 지구 생명의 탄생과 진화에 큰 도움이 되었답니다. 달은 이렇게나 오지랖이 넓어요.”
루나는 몸을 웅크리고 앉아 눈을 감았다. 나는 손을 뻗어 루나의 등을 쓰다듬었다.
다케토리 오키나는 슬며시 슬며시 목소리를 낮추며 천천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지금 달과 지구는 그때처럼 가깝지 않아요. 실은 지구 자전속도에 맞춰 달은 조금씩 조금씩 멀어져 가고 있지요. 그 거리가 얼마인가 하면 1년에 대략 3.8센티미터 정도예요.”
우와, 그렇구나. 나는 손끝으로 루나의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했다.
3.8센티미터는 어느 정도의 길이일까? 고양이 귀 정도?
“달과의 거리가 처음과 똑같았다면 지구는 지금쯤 어떤 별이 됐을까요? 지금은 달과 지구가 38만 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어서 달이 지구 자전축의 안정된 기울기를 유지하게 해주죠. 또 달 중력 덕분에 지구에 있는 생명체가 평화롭게 지낼 수 있게 해주죠. 그래서 지금은 지금대로 딱 좋은 상채인 겁니다. 그래서 달과 지구는 조금씩 멀어지면서도 그때그때 가장 좋은 상태로 관계를 이어왔구나, 하는 생각을 저는 하곤 합니다.”

신발 때문에 난 상처 하나로 사람은 부지불식간에 절망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누구도 알아차리지는 못한다.
왜냐면 보이지 않으니까. 신발 속에서 생긴 붉은 상처쯤이야.
싸게 산 새 운동화는 딱딱하고 오래 신은 양말은 얇아서, 쓰라린 고통을 참아내는 발꿈치 자체가 나란 존재가 된 지금.
더는 못 참아, 더는 못 걷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발은 왜 계속 움직이는 건지.

“그런데 오늘은 말이죠, 삭입니다.”
다케토리 오키나는 말했다.
“태고의 옛날부터 삭에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뤄진다는 믿음이 있었죠. 그 믿음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고요. 참 신가죠? 삭은 눈에 보이지 않는데 아무것도 없는 하늘을 향해 소원을 빌다니요.”
그렇구나, 삭은 보이지 않는구나.
이미 알고 있던 이야기도 다시 듣고 보면 깜짝 놀라게 되는 일이 종종 있다.
“그런 주술 같은 행위를 미신이라고 생각하면 그뿐이겠지만, 저는 그렇게 소원을 비는 건 좋은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삭은 달의 새로운 시작이잖아요. 새로운 날의 시작이죠. 정월이나 정초에 소원을 비는 것과 같은 거라고 생각하니 매우 납득이 가더군요. 신의 모습도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잖아요.”
그러고 보니 그러네.
실제로 본 적은 없지만 필요할 때마다 신에게 소원을 빌기도 하고 나쁜 일이 있으면 원망도 하곤 하지. 그건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하고.... 느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몰라.
“그치만.... 저는 달에 비는 건 소원이라기보다 기도라고 하는 게 맞다고 봐요. 소원은 본인이 하고자 마음을 굳게 먹고 행동에 나설 수 있는 것인데 기도는 어찌할 도리가 없어 그저 조용히 마음을 담는 일이잖아요.”
그렇게 말하고 다케토리 오키나는 목소리 톤을 낮춰 말을 이어갔다.
“저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세상에는 참 많이 일어납니다..... 달은 그런 우리들에게 커다란 부적이 되어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저도 최근에 알아낸 사실입니다만, 달이 야구공과 같은 크기라고 티면 지구는 핸드볼 정도의 크기라고 합니다.”
아아, 그런 이야기구나.
“그럼 또 태양은 어떤가 하면, 태양의 지금이 지구의 900배 정도라고 하니까..... 아마도 가스탱크 정도일까요? 가스탱크도 크기가 천차만별이지만 지금이 200미터쯤 되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다케토리 오키나의 진지하게 생각에 잠긴 목소리는 어딘지 모르게 활기가 느껴졌다.
야구공이라...
난 아들과 캐치볼을 해보고 싶었지. 지요코가 임신 중이었을 때는 자주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다케토리 오키나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그런데 달과 태양의 크기는 이렇게나 차이가 나는데도 지구에서 보면 같은 크기로 보이잖아요. 그건 태양이 달의 400배쯤 큰 만큼 지구에서의 거리가 400배쯤 멀다는 우연의 일치 덕분입니다.”
그렇구나. 참 유익한 내용이군. 다음에 써먹을 수 있도록 외워둬야지. 나는 책상 위에 놓인 메모지에 볼펜으로 금방 들은 내용을 써 내려갔다.
“그런 이유에서일까요, 오랜 옛날부터 사람들은 해와 달을 한 쌍으로 여기고 각각의 역할과 존재 의의를 만들어내려고 했죠. 태양이 아버지와 같은 뭔가, 달이 어머니와 같은 뭔가를 상징한다는 생각은 오래전부터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어느 나라에서도 대체로 태양의 신은 남자, 달의 여신은 여자라는 것도 흥미로운 부분이죠.”

“오늘은 보름달입니다.”
다케토리 오키나가 평소보다 살짝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조수간만의 차가 생물의 탄생과 관계가 있다는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전해져 오는 이야기이죠. 이를테면 보름달이 뜨는 날이 가까워지면 산호들이 일제히 알을 낳는 것은 조금이라고도 멀리 알을 퍼뜨리기 위한 노력이라는 설이 있지요.”
이해하기 쉬운 과학 선생님 같은 말투로 다케토리 오키나는 말했다.
“바다거북도 보름달에 알을 부화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모래사장에서 태어난 아기 바다거북은 달빛에 의지해서 바다를 향해 걸어 나가는 것이죠.”
그러고 보니 밤이 되면 해변은 새까맣게 변해서 조명이랄 것은 달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한밤중의 해변을 떠올려보았다. 마치 보름달같이 새하얗고 동그란 알로부터 태어나는 생명. 달빛이 빛나는 해변가를 뒤뚱뒤뚱 걸어가는 수많은 작디작은 바다거북.
“그런데 저는 말이죠, 그런 생각을 합니다. 보름달이 뜨는 날의 날씨가 항상 맑다는 보장은 없잖아요. 날이 흐려서 달이 보이지 않는 날에 아기 바다거북들은 어떻게 할까요?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모래가 무거워서 고생할 텐데요. 비가 갤 때까지 태어나지 않고 기다리는 경우도 있을까요?”
소금주먹밥을 입안으로 털어 넣으며 나도 함께 생각해 봤다. 밝을 거라고 생각했던 곳에서 막상 태어나보니 주변이 암흑인데다 비까지.... 하늘에서 빛을 비춰줄 거라 생각했던 달은 온데간데없이 보이지 않고.
“그래서 보름달이 뜨는 날에 밤하늘이 밝게 빛나면 저는 조금 마음이 놓여요. 반짝반짝 빛나는 파도와 건조한 모래가 아기 바다거북을 도와줄 거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참 따듯한 사람이야.

스마트폰을 켜서 팟캐스트를 열었다.
대나무 숲에서 보내드립니다. 저는 다케토리 오키나입니다.
“오늘은 삭입니다. 이번에는 일식이 있는 날은 무조건 삭날이지요. 물론 삭날이라고 해서 무조건 일식이 일어나는 건 아니에요. 궤도가 교차하는 곳에서 삭이 됐을 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지구에서 일식 현상을 볼 수 있는 타이밍도 장소도 극히 제한적이라서 천문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일대 이벤트가 되기도 하지요. 궤도의 기울기 정도에 따라서 태양이 가려지는 면적이 달라지기 때문에 부분일식, 개기일식, 금환일식 등 여러 가지 종류의 일식이 있습니다.”
태양이 가려진다니.
엄청난 이야기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은 태양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지구에서는 보이지 않는 것을 ‘가려진다’라고 표현하는 것일 뿐.
그런 생각을 하다 머그컵을 입에 갖다 댔다.
“지금은 일식을 볼 수 있는 시기도 장소도 예측 가능하지만, 전혀 알 방법이 없었던 옛 사람들에게는 공포로 다가왔을 겁니다. 어떤 전조도 없이 온 세상이 깜깜해지다니요. 그것도 그런 날 밤에는 달도 뜨지 않고 말이죠.”
달도 뜨지 않는다고? 그러고 보니 그렇네. 삭은 보이지도 않는 달이니까.
진짜 그랬다. 옛날 사람들은 많이 놀랐겠구나. 우주의 탄생에 대해서 아직 알지 못하던 시절.... 태양과 달은 언제나 하늘에서 우리를 지켜주고 있을 것이라고 믿었을 사람들.
알고 나면 별 것 아닌 일일지도 모르는데.
태양도 달도 딱히 지구에 영향을 주려고 하는 게 아니라 지구에 있는 우리가 제멋대로 우왕좌왕하는 건데 말이지.
다케토이 오키나는 다음 일식이 언제 일어나는 지를 소개한 후에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 저는 뭘 하고 있을까요. 그런 상상을 하면서 일식을 기다려보려 합니다.”
나는 뭘 하고 있을까. 우선 오늘은 이제부터 대나무 숲을 찾아나서 보려 한다.

외롭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들과 관계를 갖지 않는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고부터 마음이 무척 편해졌다.
콤비라고 해서 상대가 사람이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올 여름에 그런 생각을 하게 해준 운명의 스쿠터를 만난 나는 운이 좋은 편인 듯하다

“최근에 종종 그런 생각을 해요. 우리가 항상 달을 보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달에 있다면 항상 지구를 보고 있겠구나.”
생각에 잠김 듯이 그는 말했다.
“아폴로 8호가 촬영한 ‘지구돋이’ 사진을 본 분도 많을 거라 생각합니다. 달 지평선 저편으로 지구가 떠오르는 그 사진입니다. 달에서 본 지구는 지구가 본 크기의 4배여서 상당히 크게 볼 수 있죠. 아시겠지만 지구는 푸르르죠. 그 아름다움은 다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어요. 예를 들어 달에 문명을 갖지 않은 생명이 살고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지구가 어떤 곳인지 알지 못하는 그 생명이 그저 이 푸른 별을 봤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지구란 곳은 얼마나 아름다운 세상일까 하고 그저 좋은 이미지를 가질 거라 생각합니다. 평화롭고, 아리따운 여신이 살고 있고, 모든 것이 충족된 낙원 같은 곳이라고.”
다케토리 오키나는 말을 멈추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알 수 없기 때문에 좋은 상상을 하며 꿈꿀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알고 있어도 그럼에도 ‘지구돋이’를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만요. 자기가 살고 있는 별을 밖에서 내려다보면 또 다른 느낌을 느낄 수 있을지도 몰라요.”

달이 뜨는 숲

아오야마 미치코 지음
알에이치코리아(RHK) 펴냄

읽었어요
1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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