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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최은영 외 6명 지음
문학동네 펴냄
여름 휴가 때는 언제나 그해의 이상문학상을 들고 갔었다.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이상문학상을 읽으면 그게 진짜 휴가였다.
올해는 휴가도 없지만, 이상문학상을 읽을 도리도 없었다. 작가들의 저작권을 갈취하는 이상문학상을 읽는 건 왠지 장물을 사들이는 느낌이 들었다. 다행히 이상문학상 말고도 좋은 문학상은 많고 휴가 때 읽을 문학 작품도 많다는 생각에 한국문학계에 감사하다.
젊은작가상은 여러 한국 문학상 중에서도 지금 시점에 가장 세련된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해 주는 것 같아 좋다. 몇 년 전만 해도 한국문학은 암흑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제외하고는 꽤 오랫동안 정유정의 『7년의 밤』이 한국문학 베스트셀러 자리에 올라 있었고(물론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 자체는 훌륭한 소설이지만 이 책이 매주 몇천 권 이상씩 팔린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문학 전체에서는 일본 소설과 프랑스 소설이 상위권을 독식하고 있었다. 그때에도 김연수, 김영하, 임성순, 장강명 작가는 있었으나 웬일인지 그들의 문학이 잘 ‘팔리지는’ 않았다(그건 아마 한국문학의 가장 큰 손인 20~40대 여성들의 서사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암울한 시기를 지나 이제는 박상영, 최은영, 정세랑 등이 책을 내기만 하면 베스트셀러가 되고 강화길, 김초엽 같은 눈에 띄는 신인들이 나오고 이현석 같은 원석이 보이는 때가 됐으니 격세지감이다.
한국문학이 이처럼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 것은 부분적으로나마 젊은작가상의 영향이 있다고 생각한다. 문학동네에서 젊은작가상을 수여하면서 젊은 작가들이 주목받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신인상을 새로 만든 느낌이랄까. 등단 10년 이내 작가들만 선별해서 그들이 써 내려간 중단편 소설 중 옥석을 가려내는 것이기 때문에 능력 있는 새로운 작가들이 더 많이 발굴됐고 그들에게는 좋은 소설을 쓰고 싶은 또 하나의 유인도 됐을 것이다.
2020년 젊은작가상 수상작 중에는 정말이지 좋은 작품도 보이고 내가 생각할 때에는 그렇지 않은 작품도 보인다. 먼저 대상을 탄 강화길의 「음복」부터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이 글을 읽고 큰 충격에 빠졌는데 내가 이 소설을 다 읽고도 이 소설에서 무엇이 문제 되는지 그 주제 혹은 문제의식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령 어떤 소설에서 어떤 주제 또는 문제의식이 제기됐을 때 그에 대한 저자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을 수는 있더라도, 지금까지 주제나 문제의식 자체를 인지하지 못한 적은 거의 없었다. 나는 처음에는 강화길의 소설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가 이내 문학 해설을 읽은 뒤에야 강화길이 아니라 내가 형편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니 부족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야말로 무지(無知)였다. 나 역시도 무지했기 때문에 무엇이 문제인지 몰랐던 것이다. 가부장제 내에서 남성은, 남성을 위해 소외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모른다. 모른다는 것이 권력이 된다는 것은 사뭇 어색한 느낌이 든다. 우리는 보통 아는 것이 권력이라고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에서도 보여줬다시피 사실 권력이 있는 자는 권력이 없는 자에 대해 알지 못하고 알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그에 반해 권력이 없는 자는 권력이 있는 자의 일거수일투족을 다 알아야만 한다. 그들의 비위를 거스르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나는 권력 구조가 명징한 계급 간에서의 앎과 모름에 대해서는 쉽게 파악하면서 그보다도 훨씬 유구한 세월 동안 끈질기게 살아온 가부장제 내에서의 성별 간에서의 앎과 모름에 대해서는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다시금 나의 젠더 감수성이 한참 부족하다는 것을 자각했고 당사자성이 없는 데서 비롯되는 난제들이 많다는 점, 그리고 그걸 다 알 수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최은영의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는 왜 사람들이 ‘최은영, 최은영’하는지를 알게 해 준 작품이다. 부끄럽게도 나는 최은영의 소설 중 제대로 읽은 것이 없다. 우습지만 『쇼코의 미소』에서 ‘쇼코’가 일본인 이름이라 싫었다고 하면 용서가 되려나(물론 그걸로는 턱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섣불리 최은영의 이번 소설이 최은영 소설 중 가장 좋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다른 작가들을 모두 포함하더라도 최은영의 이번 소설은 근 수년 내 읽은 소설 중 가장 좋은 소설이다. 거친 구별이기는 하지만 남성 서사 혹은 남성 중심적인 언론 영역에서는 용산 참사 같은 사건에 대해 언제나 거대담론을 들먹이는 것을 좋아한다(특히나 진보 진영은 더욱 그렇다. 보수 진영은 안정된 구조를 탈주했다고 여겨지는 개인에 대한 비난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개인은 소거되고 오직 담론만 남는다. 사람은 사라지고 진영만 남는다. 용산 참사로 인해 용산에 살던 그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지 묻는 대신 신자유주의와 개발 논리에 대한 비판만 늘어놓는다. 물론 그러한 비판, 비평들도 중요하다. 그러나 최은영은 그 못지않게 개인의 서사도 중요하다는 점, 개인의 서사도 포용해야 한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그뿐 아니라 최은영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라는 질문으로 여성들 간의 연대, 그럼에도 우리가 모두 주지하다시피 남성 중심적인 사회로 인해 단절되고 마는 연대에 대한 문제의식을 끌어낸다. 그때 나보다 앞서 걸었던 그 언니는 어디로 갔을까. 한 영역에서 여성의 실종은 남성의 실종보다 훨씬 더 쉽게 잊힌다. 어느 분야든 여성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에 우리는 왜 이리 둔감할까.
반면 김봉곤의 「그런 생활」은 근 수년 동안 읽은 소설 중 가장 별로인 소설이었다. 김봉곤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여러 SNS의 대화 내용이 실제와 완전히 같다고 하여 대화 상대방으로부터 제소당한 문제가 있다는 건 차치하고서라도, 아무리 자전적 소설이라지만 이런 문제의식으로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는 게 기이했다. 퀴어와 젠더, 페미니즘이 우리 시대 가장 중요한 소재이자 주제라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성 소수자 이야기라고 해서 다 옳은 것은 아니지 않은가. 내가 너무 보수적인지는 몰라도 파트너가 있음에도 파트너의 동의 없이 불특정 다수와 섹스를 하는 사람을 용서하고 받아들인다는 건 지금껏 지겹도록 반복되었던 ‘남자가 한 번 바람 피울 수도 있지. 네가 용서해야지.’라는 지극히 남성 중심적이고 오만한 논리의 변주에 불과해 보여 기분이 나빴다. 글쎄 퀴어 커플이 그렇게 나온다고 해서 그게 오마주가 될까? 오마주 또한 원작에 대한 존경의 의미인 것을.
이현석의 「다른 세계에서도」는 작가 자신의 치열한 문제의식이 담겨 있는 수준 높은 소설이라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공익법학회 친구들과 낙태죄에 대해 논의하던 것도 생각났다. 그러면서 공익법학회 친구들도 낙태에 대해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 결정권의 대립항이라는 구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낙태가 여성의 고뇌에 찬 비극적 결단이고 절대 남용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강조했다는 것도 생각났다. 생각해보면 사실 우리가 낙태에 대해 그렇게 비관적으로 생각할수록 여성의 자기 결정권은 언제나 태아 혹은 태아도 되지 않은 배아의 생명권 또는 아가방 속에 있을 권리보다 뒷순위에 놓이게 된다. 이 부분은 아주 예민하게 다루어져야 할 필요가 있지만, 낙태에 대해 논의할 때 힘을 덜 줄수록, 여성의 자기 결정권이 더욱 유의미하고 자유로워지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현석이 한 편의 완결된 소설을 통해 이렇게 고민할 거리를 던져준 것 자체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김초엽의 「인지 공간」은 김초엽이 지난 소설집을 통해 보여준 단편 소설들에 비하면 다소 아쉬운 편에 속한 듯 보인다. 인지 공간은 제대로 와 닿지 않고 결말은 다소 뻔한 느낌이 든다. 소설 속 인물들이 매력 있지도 않다. 다만 그녀의 아이디어만큼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도 좋은 소설을 써 주면 좋겠다. 그녀가 1993년생이라는 건, 그럼에도 젊은작가상을 거뜬히 타내고 있다는 것은 아직 보여줄 것이 한참 남았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장류진의 「연수」는 참 진하다. 남성을 배제한 채 젊은 여성(기혼/비혼)과 나이 든 여성만으로 많은 이야기를 전달한다. 적절한 거리감을 무시한 채 가부장제 내에서 공고화된 여성의 입장에서 젊은 여성들에게 불편한 질문이나 말을 하는 나이 든 여성들을 보여줌으로써 그녀는 현실적인 기성세대 여성을 그려낸다. 기실 페미니즘이 당도하기 전의 기성세대 여성과 현대의 여성은 전제부터 사고방식까지 많은 부분이 다르다. 기성세대 여성들이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사실은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세대의 여성을 포함한 페미니즘은 매우 다양한 층위의 논의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 소설을 보면서 우리 한국문학이 마침내 그러한 단계에까지 도달했다는 생각에 깊이 감탄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에 운전 강사가 주인공 대신 경적을 감내하며 차로 변경을 도와주는 모습을 보며 단기적으로는 여성 연대의 희망을, 그러나 중장기적으로는 어쩌면 서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 할 수 있는 자들끼리 이리도 쉽게 연대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중장기적인 숙제는 이 글을 읽은 자들의 몫으로 남겨둔 것일까.
마지막으로 장희원의 「우리의 환대」 는 전복(顚覆)의 힘이 있다. 그것도 기성세대 남성을 전복하기 때문에 그것은 더 큰 쾌감(?)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으면서 한편으로는 나 역시 전복돼야 할 대상이었음을 고백한다. 나 역시 중산층, 이성애, 단일인종의 틀 안에서의 독법에 너무 익숙해졌음을 말이다. 특히나 이 셋이 모두 붕괴될 때, 즉 하층의 서로 다른 인종 간 동성애는 나 역시 받아들이기 어색했음을 고백한다. 그만큼 사회의 주류적 시선은 무섭다. 정상과 비정상을 구별하는 그 압도적인 힘에서 벗어날 힘을 갖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지만 그만큼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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