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 정세랑 작가 느낌의 단편소설들
키치와 환상이 일상의 소소함과 엮여 가볍지만 무게감 있는 소설을 만들어냈다.
웨딩드레스44는 하나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44명의 이야기다.
웨딩드레스를 입는 행위, 즉 결혼을 통해 바뀔 이들의 삶을, 제도가 가져오는 폭력적이지만 드러나지 않는 남녀차별을 그려냈다.
2년 전, 내가 입었던 드레스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 드레스가 스쳐간 신부들의 결혼생활은 어떻게 되었을까.
옥상에서 만나요는 '어느 날 우리집 현관으로 멸망이 들어왔다' 라는 드라마가 떠올랐다. 나의 운명의 상대가 "멸망"이라니, 절망을 먹고 자라는 멸망의 존재. 아무튼 상상력이 대단하다.
여기서의 옥상 같은 곳이 나에겐 어디일까 상상했다.
남편을 만난 벚꽃길일까, 새벽마다 한숨쉬며 멍때리게 되는 우리집 베란다일까.
영원히 77사이즈와 해피 쿠키 이어는 실실 웃으면서 보았다.
2
작가는 주변 지인들의 이야기로
아무것도 아닌 우연, 아주 조그만 초능력, 평범하고 작은 친절, 자주 마주치는 다정함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했다.
사실, 정세랑 작가의 <지구에서 한아뿐>, <피프티피플>, <보건교사안은영>을 본 뒤에 작가이름만 보고 고른 책이어서 그런지 기대감이 좀 컸던 것 같다.
작고 평범한 존재에 판타지를 부여하고 그들을 연결시켜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 좋았었는데, 재인과 재욱, 재훈의 이야기는 그 "연결"이 약했던 것 같다.
프로불편러시대다.
자기와 생각이, 입장이 다르면 서로 헐뜯고 욕하며 비난하고 있다.
서로 안아주면 참 좋을텐데 날이 서 있다.
이런 세상에서 "아무것도 아닌 우연, 아주 조그만 초능력, 평범하고 작은 친절, 자주 마주치는 다정함"이 더욱 필요하다.
임신 후, 타인으로 만난 사람들의 작은 배려와 친절에 깊은 감동을 받는 요즘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덮인 세상에 정세랑 작가가 우연과 초능력과 친절과 다정함을 주입시켜주면 좋겠다.
4
상상하지 못했다.
진이와 지니의 관계
그리고 너무도 당연한 희망을 죽음으로 맺어버리는 결말까지
역시 정유정 작가다.
몰입감과 호흡이 빨라 숨조차 잘 쉬어지지 않게 빨려들어간다.
어느새 내가 램프에 갇힌 진이가 되어가고,
어느새 내가 '다정한 그녀'를 되찾게 해주고 싶은 민주가 되어가고,
어느새 내가 인간의 이기심에 이용만 당하는 지니가 되어간다.
"시간의 어떤 순간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버트런드 러셀
작가는 이 한 줄의 문장으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어떤 순간'을 살아가는 죽음을 앞둔 자의 이야기를 써 나갔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살고 싶음에 고군분투하는 진이의,
그리고 진이를 돕는 민주의 "생의 가장 치열했던 사흘"을 그렸다.
살아있는 한, 할 수 있는 일을 다해야 한다고.
내 마음은 진이의 회복을 응원했다.
진이가 자신의 몸을 찾고, 어쩌면 민주와의 깊은 우정이나 사랑의 결말까지 원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 역시 철저히 이기적이고 파괴적인 인간이었던 것이다.
인간에 의해 인간들 속으로 끌려 나온 후,
인간으로 인해 생사의 질곡을 넘나들고
인간을 위해 쾌락의 도구가 되었다가
인간에게 자신을 통째로 강탈당해버린 지니의 삶을
지니의 시점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인간을 위한 동물의 희생은 당연하다는 듯이......
내가 보노보나 침팬지를 만나게 된다면,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인사해야겠다.
"안녕... 나는 너 친구야..."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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