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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징조와 연인들

우다영 지음
민음사 펴냄

해가 지면 조용한 술집에 마주 앉아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학부에서 회화를 전공하고 대학원에서 예술학을 공부했던 과정에 대해, 여태까지 작게나마 참여했던 전시와 거기서 만난 사람들에 대해, 특히 생각지도 못한 관점으로 전시를 기획해 나를 놀라게 했던 선배 큐레이터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석이는 어릴 때 물인 줄 알고 잘못 먹은 부동액 때문에 위세척을 했던 일에 대해, 고등학교 때 스쿠터를 타다가 교통사고가 난 일에 대해, 군대에서 탱크와 벽 사이에 손이 껴서 손가락뼈가 세 개나 부서진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는 세 살 무렵 갑자기 생긴 천식에 대해, 부모님이 주말마다 데리고 다녔던 공기 좋은 여행지들에 대해, 뒤늦게나마 태어난 두 동생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석이는 미학과에 가기 전에 조소과를 준비했던 기간에 대해, 큐레이터 일 이외의 다양한 아르바이트에서 겪었던 경험에 대해, 1년 전 독립해서 혼자 살기 시작한 생활에 대해 이야기 했다.
“신기해.”
석이는 정말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전혀 상관없는 궤적을 그리다가 우리가 이렇게 만나다니.”
나도 속으로 생각했다. 맞아, 이건 신비로운 일이야.
“이상하지? 처음 봤을 때부터 너랑 이야기해 보고 싶었어.”
석이는 턱을 괴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봤다.
“누구한테도 이렇게 내 이야기를 한 적 없어.”
한참 대화에 빠져 있다가 조명이 어두워져서 주위를 둘러보면 가게 안은 텅 비고 석이와 나만 남아 있었다. 석이는 내가 사는 아파트 앞까지 함께 왔다가 다시 컴컴한 강을 건너 집으로 돌아갔다.

-

“네가 통증으로 감각한다면 좋아, 네 마음이 놓일 만큼 멀리 떨어질게. 나는 하나도 아프지 않고 뜨겁지 않지만 네가 그걸 상상하고 있잖아? 좋아. 석아, 난 다 좋다고. 위험이 내 발끝에서 시작된 희미한 그림자에도 닿지 못하도록 할게.”

-

“너랑 같이 있고 싶어.”
석이가 말했다.
“나도 그래.”
“너랑만 나누고 싶어. 너를 웃게 해 주고 싶어. 왜 너인지 모르겠지만, 왜 네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내가 나를 견디고 능가할 용기가 생기는지 정말 모르겠지만, 나도 너에게 그런 사람이면 좋겠어. 지금 나는 너에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 만으로도 즐겁고도 편안해.”
“나도야. 나도 그래, 석아.”
그러면 석이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그맣게 속삭였다.
“나를 많이 안아 줘서 고마워.”

-

같이 잠이 들어도 나는 이른 아침에 눈을 떴고 석이는 나보다 짧으면 한두 시간, 길면 대여섯 시간을 더 잤다. 나는 석이를 깨우지 않고 책을 들춰 보거나 가만히 생각에 잠겨 시간을 보냈다. 잠든 모습을 빤히 구경하다가 살살 만져 보아도 석이는 잠에서 깨지 않았다. 그럴 때면 닫힌 눈꺼풀 너머의 세계와 내 세계의 시차는 얼마나 벌어진 걸까 가늠해 보았다. 방은 이미 익숙하고 편안했지만 홀로 깨어나 찬찬히 바라보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이고, 알고 보니 전혀 다른 사람이었는데, 심지어 체온마저 이렇게 다른데 한 물결 속에 섞여 있다는 게 놀라워. 또 우리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거대한 물속으로 함께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신비로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가 있겠지. 너이고 나인 이유가.”
석이는 아리송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눈앞에 펼쳐진 물을 바라봤다. 그대로 오래도록 말이 없다가 불현듯 조그맣게 속삭였다.
“나랑 이곳에 와 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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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오빠의 하얀 피부가 부러웠어요. 부러워서 울면 오빠가 솓을 뻗어 내 볼을 살살 문질렀어요 ‘자, 봐. 내가 이렇게 만지면 네 얼굴이 하얘져.’ 나도 손을 뻗어 오빠의 뺨과 광대와 눈썹을, 둥글고 차가운 코와 폭이 좁은 턱을 어루만졌어요. ‘어때, 내 얼굴이 까매졌지?’ 하고 오빠가 물으면 나는 끄덕끄덕 그렇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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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누구나 가시광선을 보며 살아가지만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빛의 영역이 있단다. 우리는 평생 그것을 보지 못하고 죽지만 보이지 않는 빛과 아직 발견되지 않은 빛이 우리 곁에 없는 것은 아니야. 때때로 우리 눈은 실수를 해서 아주 희박하게 다른 영역의 빛을 볼 때가 있는데, 그것은 이유 없이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명명할 수 없는 어떤 일의 결과라고 할 수 있지. 어쩌면 영혼이나 유령을 보는 사람들은 좀 더 넓은 영역의 빛을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단다. 우리는 현재를 살아간다고 믿지만 실은 과거와 미래가 현재와 분리되지 않은 채 순서도 정렬도 없이 동시에 생성되는 거라면? 정신 분열증이나 치매 환자가 제대로 우주를 보는지도 모를 일이지. 파동으로 봤다가 입자로 봤다가, 그 고양이가 죽었다고도 살았다고도 횡설수설하는 게 진실일 수도 있어. 그들이야말로 우리의 더러운 이중 속마음과 겉치레 몸뚱이를 간파하고 있는지도 몰라. 고정된 관념을 정확히 보는 사람들, 혹은 보려는 것만 보는 정상인들이 사실은 제정신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란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들은 그것의 전부가 아니야. 절대로 그것을 온전히 볼 수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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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고리를 돌려 소리 나지 않게 문을 잠그는 것을 좋아해요. 문 뒤에 숨어서 아무도 내가 숨은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안도감을 느껴요. 글을 쓰면 그런 기분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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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드디어 운명적 사랑을 만났다고 믿는 눈치였지만 나는 사랑은 대체로 운명적인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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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어쩐지 내가 조금 더 자란 어느 날 문득 이 날을 떠올리게 되리라는 막연한 예감이 들었다. 황이 하는 말을, 말을 하는 황의 마음을 어렴풋이 이해하게 되리라고. 그런 신비로운 순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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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까닭 없이 온 세상이 하얗게 빛나는 순간이었다. 끊임없이 달라지고 물러지는 삶 속에서 그것은 감쪽같이 달고 부드럽게 넘어가곤 했다.

정말 아무렇지 않은 일이었다. 어떤 일의 전조나 의미있는 전경이 될 순간을 순진한 얼굴로 지나가는 것은.
2021년 10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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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키모들은 고래를 잡는 게 아니라 잡혀 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착취당할 바엔 몸을 던지는 게 고래일까, 제 잔해가 세계를 돌며 전시될 줄은 알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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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으로 입수하는 공포를 극복한 경험을 따라 첫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 사랑하는 아기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서로를 구하러 뛰리라는 확신이 떠올라 다음 잠수가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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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홀로 남았을 때 누구도 와 주지 않는 세상을 원치 않는다. 그러니 이번도 내가 가야 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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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럴 거면 왜 태어났는지……. 파도 소리만 그 말을 옮겼다. 지금은 세상이 아득했다. 어깻죽지와 목 뒤로 손을 넣자 해수의 체온이 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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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의 이유를 찾아야만 했는데, 그러다 보면 서로가 가장 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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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가장 아픈 부분은 그만큼 날카로워 사랑하는 이도 자주 찔렀다. 사랑하는 이의 기울어진 몸은 너무나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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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에서 살아온 이 생물이 목소리를 가지면 무엇을 처음으로 말하고 싶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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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돌아왔으니까…… 나는 그거면 돼.”
해수가 울면 은하도 울 수 있다. 공명하는 마음만이 은하를 삶으로 이끌었다. 해수도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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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그럴 수밖에 없는 날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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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들은 신의 환생 같아. 눈동자부터 숨, 지느러미, 몸통, 꼬리 전부 다. 그들이 배 주변을 기웃거리거나 노을을 등지고 수영하는 모습을 보면 인간사는 부질없이 느껴지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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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은하를 제외하고 굴러갔다. 문득 영혼을 햇살에 절여 빨랫줄에 걸고 싶었다. 보송보송한 심정을 덧입어야만 용기가 생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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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꽃도 불행을 알까, 뿌리내리고 살던 터전에서 파인 기분은 어떨까, 의문하며 화분을 돌보는 사이 꽃은 명을 다하고 까만 점을 오도도 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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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은 어떻게 답을 찾아야 할까. 불행의 계절이 찾아오면 어떤 자세로 지나야 하나. 마음을 돌보는 일은 왜 이렇게나 어려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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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본성은 이미 알았다. 우리에겐 개나리꽃 하나에 웃고, 진달래 끝에 맺힌 이슬에 울 수 있는 본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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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 너머엔 낙원이 있다고 말해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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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지구를 완성하면 데리러 올게. 잊지 않고 널 데리러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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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한 외계에도 외로운 구석은 있다. 어떤 별은 지구의 푸르름을 천국이라 착각하며 끌려오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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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신의 뼈들이 별의 물질처럼 소란스러웠다.
그 착란의 일부를 훔치려는 마음으로, 은하는 차게 식은 해수에게 입 맞췄다. 입술이 닿은 곳은 목과 턱이 만나는 귓불 아래였다. 맥박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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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로 귀환하면 더이상 쓸쓸한 별에 그 애를 홀로 두지 않으리라. 낙원을 일구고, 지구 바깥에 아름다운 세상이 있음을 증명하리라. 언젠가 그날이 오면…… 해수도 행복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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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로-세슘의 비행 속에서 은하는 자신이 죽음을 이해한다는 착각에 빠졌다. 일부만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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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생을 마친 별의 격변이 인류의 노선을 이끌었다. 은하는 광대히 울려 퍼지는 별들의 관현악 사이로 날았다. 우주는 생각보다 훨씬 수다스러웠다. 인간이 모르던 시절에도 수많은 합성음을 냈다. 의식에서 잊힌 것들은 우주로 향하여 영원한 선율이 되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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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는 성장하며 바다에 더욱 매료되었고 그때마다 은하는 그 애를 빼앗길까 두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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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도 고칠 게 한두 군데가 아니야. 네가 곁에 있으면 좋겠는데.”
“때로 넌 나를 안타깝게 만들어. 잔인할 만큼.”
“……미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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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빨리 낙원을 완성해야 했다. 지구가 종말을 맞아도 우리에게 발 디딜 안식처가 있음을 해수에게 알리고 싶었다. 처절한 밑바닥을 보이지 않는 바다가 있음을, 본대부터 검은 물결에서 빛을 피우는 바다가 있다는 걸 전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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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대원의 죽음을 예습 삼아 새 장례 문화가 탄생했다. 인체의 성분과 하이드로-세슘, 바다, 그리고 압력이 만나면 고밀도의 거울처럼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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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이 많은 인간일수록 선명한 거울로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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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인 시체의 부패 과정과 달리 명경 물질로의 전이는 아름다웠다. 은하는 언젠가 거울이 될 자신의 육체와 삶을 생각했다. 제 존재는 죽음 후에도 반사경이 돼 타인들을 비출 예정이었다. 그날이 오면 후회 없는 삶이라 회고하며 감상에 젖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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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을 결정하는 일은 고달팠다. 미결된 무엇인가가 끊임없이 방해했다. 삶의 최종 장을 원하는 방식으로 닫는 건 위대한 권한이었다. 하지만 은하는 부족함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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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애 곁으로 가고 싶다. 이런 생각을 하자 해수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정확히는 하늘을 본 것이겠지만 미래의 나는 과거의 해수와 눈을 마주쳤다고 착각했다. 폐부 깊이 해수가 지났던 시간들을 새기고 싶었다. 그 바람이 일으킨 착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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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가 곁에 있다면 저 구슬픈 노래의 뜻을 알려 주었을까? 음파가 우주를 흔들 때마다 해수에 대한 그리움이 심해진다.
……그 애에게 푸른 환영을 고백할 걸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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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위한 낙원을 만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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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고 싶어, 얘기하고 싶어, 천 년이 흐르든 만 년이 흐르든 심장이 구하는 이야기를 마음껏 하고 싶어. 지금, 시간이 얼마나 흘렀지? 우리에겐 얼마나 남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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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네 행복을 상상했어. 먼 별의 반짝임이 눈에 들어오면 그때만 사람의 마음이었어. 낙원에서 너만은 행복하길 기도했어. 그곳은 어떤 세계일까, 수많은 별들을 지나 도착한 땅은 아름다울까. 홀로그램으로 뒤덮인 육지가 보일 때 널 생각했어. 시간이 지날수록 너는 선명했어 되풀이하는 습관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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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이 빛을 흡수하면 음파가 생겨. 귀를 기울이면 노래가 들리지. 있잖아, 은하야. 나도 전부 고백할게. 너도 솔직하게 말해 줄래?”
“그래.”
“내가 미운 적 많았지?”

“아직도 내가 밉니?”
“사랑해.”
“미워해도 돼.”

“해 줄 이야기가 정말 많아……. 아. 지구도 자살하길 원했다는 말을 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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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간격으로부터 달이 태어났어.
폐허의 시간, 죽음 직전의 지구 속에서.
그를 닮은 위성이 탄생했어. 햇빛을 수용하며 유려하게 미끄러지더니 우주로 나아갔어. 등대처럼 빛을 띄워 우아한 왈츠를 청하듯 지구를 끌었지. 지구와 달의 첫 무도회를 상상해 봐. 달은 자신의 단면을 한 번에 하나씩만 보여 줄 수 있었어. 울퉁불퉁한 크레이터와 난도질한 자국, 비틀린 분화구들이 드러났어. 오해하기 쉬웠지. 달은 같은 상처를 가진 지구의 반영이었으니까. 그 위로 태양 광선이 기울어 난생 처음 보는 색으로 달이 빛나자 지구는 고백했어.
죽음 속에서도 돌이킬 수 없는 것들이 태어나는구나.
달은 반쪽짜리 얼굴로 미소지었어.
사랑이란 얄궂어. 부서지는 만큼 탄생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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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눈물은 왜 바다 성분과 비슷할까? 잘 생각해 봐. 지구의 아이들이 바다에 이끌리는 데에는 이유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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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선 누군가의 생이 막을 내릴 때 아름다운 물질을 찾아냈어.”
“그 얘기를 하는 널 보는 게 좋아.”
“나랑 같이 떠나자.”
고래의 눈동자가 바다와, 하늘과, 은하를 훑었다. 해수는 미소 짓더니 입을 다물었다. 원을 그리며 은하 주변을 헤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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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를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낙원으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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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고래들의 노래를 전수받고 지구를 일곱 바퀴쯤 돌았을 때야.”
“응.”
“네가 보고 싶었어.”
“그랬구나.”

-

나는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어.
너를 만나기 전, 나의 일부가 바다 속에서 죽었고.
너를 만난 후, 너의 아픔이 내 속에서 죽었고.
너를 보낸 후, 세상의 전부가 죽었으니까.
세 번의 죽음을 넘어
다시 지구를 사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어떤 차원에 있더라도, 이 다음의 시간으로 너를 데려가고 싶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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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우리가 바다를 떠날 수 없다면…….”
해수는 일렁이는 반사경으로 변화하는 바다와 뒤엉킨 영혼들을 응시했다. 그들은 별의 움직임, 햇빛의 일그러짐, 바람의 궤적을 고스란히 지상으로 가져왔다. 하늘이 두 겹의 대칭을 이루며 천체를 반영했다. 구아슈 기법으로 푼 듯한 구름들이 지느러미를 편 고래 형상을 만들었다.
“이곳을 천국으로 만들자.”

불온한 파랑

정이담 지음
황금가지 펴냄

2021년 10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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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고통이 주는 시각적 충격은 익숙해지기에는 너무 벅찬 종류의 것들이었다. 이에 더해 언젠가부터 옥지의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한 또 다른 감정은 진성이 고통받는 모습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욕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

“그냥 우리 도망갈까?”
“그러면 게임은 망가질 거고, 데이터들이 폐기될 거야.”
“그렇겠지.”

-

“그렇게 자유로운 시간 동안은 너랑 같이 있을 수 있잖아.”

-

그곳에는 동진과 마찬가지로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프로그래머들이 있었다. 자신이 만든 무언가가 제대로 기능하는 것에 기뻐하고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그 이유를 살펴 작동할 때까지 수정하는 사람들.
순수하게 무언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

진성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데이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 능력 때문에 진성과 함께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

“아까 튜토리얼을 막 끝마치고 내 방에 단둘이 있었을 때, 나 무언가 따뜻한 기분을 느꼈어.”
“그 기분이… 뭔데?”
“그건 아직 나도 모르겠어. 하지만… 너를 볼 때마다 그 따뜻한 기분이 계속 느껴져. 너와 함께 있으면 점점 더 분명해지는 느낌이야.”

-

“되도록 빨리 분명해지도록 할게.”

-

“<장군님의 총애>는 완벽한 서사를 가진 작품이에요. 그 서사를 망치는 것은 가당치 않아요. 애초에 옥지가 진성을 사랑한다니. 그게 말이 돼요?”
“가끔은 말이 안 되는 게 사랑 아닙니까….”

-

“언젠가 끝없는 밤이 다가와, 끝없는 잠을 자게 될지도 모르지.”

“그때, 그대와 함께 잠들면 무엇도 두렵지 않을 텐데.”
옥지의 말에 진성이 고개를 들었다.
“나 이 정도만 욕심부려 봐도 괜찮을까?”
진성은 즉답했다.
“당연하지.”

-

“대표님도… 결국 사랑하는 것을 지키고 싶으신 거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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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원할 수밖에 없는, 저 모니터 안의 두 사람이 가진 사랑이라는 감정의 힘을. 진성이 자신의 피로 바닥에 글씨를 썼을 때, 옥지가 진성을 살리기 위해서 플레이어의 총구 앞에 섰을 때 저 둘이 품었던 감정은 진짜라는 걸. 그리고 그 둘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도 진심이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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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도 무언가를 사랑했고, 꿈을 이루기 위해 무식하다 싶을 정도로 달려들었다. 나와 함께 있는 이 사람들도 역시나 자신이 아끼는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 무식한 일정을 소화하겠노라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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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욕심을 부리면 안 되는 존재라고 생각했어. 정해진 대로 살았고 그 정해진 길마저 언제나 남을 위한 길이었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나는 내가 사랑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것을 지켜 나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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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혜야, 엄마는 언제나 너랑 함께 있을 거야. 오늘도 즐거운 하루 보내고 밤에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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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리의 눈 속에 어린 깊은 슬픔이 보여 나는 꼼짝할 수 없었다. 내가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칼리는 받아들일까? 인간을 대신해 내가 사과해도 좋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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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너와 함께하는 시간이 이토록 찬란한지 미처 몰랐던 때였다. 우리는 옛 추억을 이야기하며 함께 마지막 순간을 맞았다. 앵지가 마지막 숨을 크게 들이쉰 뒤 눈을 감았다. 그 순간 나의 로컬 브레인도 영원히 어둠 속으로 사그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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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를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영. 그 단어가 주는 절망적인 느낌에 지쳐 쓰러질 때까지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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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평생 가장 확고했던 사랑의 대상이 어느 순간 대체되었는데 나는 그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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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귀에서 이명이 시작되어 손바닥으로 귀를 덮었다. 영혼을 복사하기에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나에게 있어서 얄궂은 길이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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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보다 더 나쁠 게 있나요?”
“실패의 양상은 언제나 다양하죠. 짧은 기간이나마 프로그램을 운영한 사람으로서 드리고 싶은 조언은… 산 사람을 죽이는 일과 죽은 사람을 살리는 일은 기본적으로 같은 무게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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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결한 희생과 자기 파괴적 투신을 구별해 내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저는 분명히 보았습니다. 그는 죽음의 기회를, 되도록이면 명예로운 죽음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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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통. 그 단어가 좋았다. 서희는 처음으로 자신의 표정에 이름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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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는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스물두 가지, 대학에 입학할 즈음에는 서른 개가 넘는 표정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모두 훔친 것들이었고 돌려주는 법을 몰라 10년이 되도록 가지고 살았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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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구잡이로 표정을 수집하는 건 쓰레기를 주워다 전시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체계가 필요했다. 서희는 가로축과 세로축으로 된 그래프를 그렸다. 가로축의 한쪽 끝에는 기쁨, 반대쪽 끝에는 슬픔이 자리했다. 세로축 양쪽 끝에는 분노와 평온이 위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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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는 겉으로 고요했고 속으로는 펄펄 끓었다. 사람들은 온화하고 은근한 미소로 중무장 한 서희를 동경했다.

뉴 러브

표국청, 황모과, 안영선, 하승민, 박태훈 (지은이) 지음
안전가옥 펴냄

읽었어요
2021년 10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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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친해지고 싶은 호감형이기는 하지만 평일 오후 두시의 6호선에서 눈에 띌 정도지, 출퇴근 시간 2호선에서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을 희미한 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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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아를 위해서라면, 우주를 횡단할 만큼 전 확신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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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다른 이의 세계에 무력하게 휩쓸리고 포함당하며 살아가야 한다면, 차라리 아폴로의 그 다시없이 아름다운 세계에 뛰어들어 살겠다. 그 세계만이 의지로 선택한 유일한 세계가 되도록 하겠다…… 주영의 선택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무 고민 없는 아둔한 열병 같은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명확한 목표 의식의 결과였다.
그런데 그 세계가, 주영이 선택한 단 하나의 세계가 사라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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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아는 계속 걸었고, 경민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두 사람의 좌표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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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남자친구가 두렵다니까. 어쩌다 이런 지경에 온 걸까. 종국에는 아무 감정 없어질까 걱정했던 적은 있지만 두려워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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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같다고 생각 안 해. 한 번도 너 바보 같다고 생각한 적 없어. 넌 같은 자리에 있는 걸 지키고 싶어하는 거잖아. 사람들이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들을. 난 너처럼 저탄소 생활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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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총을 겨눴던 두 사람은 나란히 경민의 부엌 서랍을 뒤지며 중국요릿집 번호를 찾는다.
이것은 아주 이상한 밤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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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민의 몸속에서 약간의 수증기와 함께 은은한 초록빛이 흘러나왔다. 한아가 몸을 일으켜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딸꾹.”
한아는 울음을 멈추고 딸꾹질을 시작했다.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광경이 그 안에 있었다. 훗날 한아는 그 순간이, 인생의 분기점이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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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퍼센트 정도는 광물이야. 딱 보기에도 그렇지? 탄소대사를 하지 않으니 이런저런 기계 장치가 덧붙은 건데 그건 빼고 봐줘. 어쩐지 부끄럽다.”
어느 포인트에서 부끄러운 건지 전혀 판단할 수 없어, 한아는 탁 맥이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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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민은 알몸을 보여준 것처럼 굴었지만 그건 그보다는 회전하며 구조를 바꾸는 광물이라 만화경을 들여다본 것 같았고, 미묘하게도 한아가 느낀 건…… 아름다움이었다.
아름다운 구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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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묻는 게 예의인 것 같았다. 상식 있는 지구인으로서의 예의.
“어차피 발음 못해. 그냥 편한 대로 불러.”
“그럼 그냥 나중에 정하자.”
그래서 한아는 경민이, 일단은 경민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 따뜻한 수프를 가져다주도록 가만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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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반해버린 거지. 그거 알아? 내가 너한테 반하는 바람에, 우리 별 전체가 네 꿈을 꿨던 거? 하지만 첫번째로 널 보고 널 생각한 건 나였기 때문에 내가 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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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내 망원경은 달랐어. 깨어나서 내가 잠든 동안 어디를 비췄는지 체크해보면 꼭 비슷한 지점을 스쳐갔더라고. 지구에서도 아주 좁은 면적을. 우주가 얼마나 넓은데 그건 너무 이상한 일이었어. 그래서 한동안 잠들지 않고 계속 그 근처를 살폈지. 곧 망원경이 뭘 보고 있었는지 알았어. 그러니까, 웃기지? 나보다 내 망원경이 더 먼저 널 사랑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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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아냐. 평범하게 길거리 정도가 보일 뿐이야. 너희 가게 유리창이 크니까 작업하는 걸 볼 수 있었고……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어. 나는 탄소 대사를 하지 않는데도 네가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싶었어. 촉각이 거의 퇴화했는데도 얼굴과 목을 만져보고 싶었어. 들을 수 있는 음역이 아예 다른데도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 너를 위한, 너에게만 맞춘 감각 변환기를 마련하는 데 긴 시간이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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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왜 경민이 얼굴로 왔어? 물론 처음에 널 봤으면 꽤 놀랐겠지만…… 정우성 얼굴로 올 수도 있었잖아!”
한아는 경민을 빙자해 다가온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그건 아무리 봐도 사기였다. 우주적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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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검도 돼? 박서준도 좋아. 아, 임시완! 역시 임시완이 좋겠어.”
한아가 떠오르는 대로 좋아하는 배우들의 이름을 말하자 경민이 진심으로 난처한 얼굴을 했다.
“초상권을 존중해줘야지. 하지만 취향은 잘 고려해볼게.”
“농담이었어.”
“진담도 섞여 있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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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가 승낙하면?”
“그럼 네가 죽을 때까지 쭉 머물 거야.”
“네 수명은?”
“지구 단위로는 앞으로 8만 년쯤 더 살 수 있어. 그래도 여기 오느라 많이 까먹은 건데.”
“내가 죽은 다음에는?”
“글쎄, 네가 없어도 지구가 여전히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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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은 심장마비에 걸리기 직전의 얼굴로 기뻐했다. 심장이 있다면 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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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민은 몸을 반쯤 일으켜 한아를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에 어쩐지 코가 간질간질하다고 느끼는 한아였다. 무슨 빔을 쏘는 걸까, 이상한 외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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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민은 영 동의할 수 없는 듯했다.
“네가 없으면 내 여행은 의미가 없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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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외계인이라도 정말 괜찮아?”
여전히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지구인 약혼자에게 걱정스레 묻는 경민이었다.
“외계인이고 지구인이고 2만 광년을 달려와주면, 아무래도 호감이 가지. 대단한 호감은 아니고, 기본적인 호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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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 지역이라는 말에 미묘하게 빈정이 상했다.
“왜? 위험하기는 외계인들이 더 위험하지. 맨날 불 뿜으려 그러고 더 폭력적이구만.”
“아니, 꼭 그런 문제 말고도 환경 자체가 좀 위험하지.”
“여기만큼 포근한 환경이 어딨다고 그러냐?”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다른 생명체들이 탄소 대사를 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 지구도 시점에 따라 굉장히 유독한 환경일 수 있어.”
지구를 사랑하는 한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건 모르겠고…… 여기 잠깐 앉아 있어봐.”
“어디 가?”
겁먹은 얼굴로 경민이 한아를 붙들었다. 한아는 피식 웃었다. 지난 몇 달간 이런 바보 같은 존재를 무서워했다니 아득했다. 지구 정복은커녕 롤러코스터도 하나 제대로 못 타는 녀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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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상이야.”
“상?”
경민이 솜사탕의 촉감에 놀라 하며 물었다. 감각 변환기가 아주 고장나진 않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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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메슥거려 하며 수고스럽게 와줬으니까.”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솜사탕을 떼어먹고는 경민이 아, 하고 작은 신음 소리를 냈다.
“어때?”
“상상했던 것보다 더 좋아.”
“그치?”
“이거 말고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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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아는 계속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다시 여행하고 싶지는 않아? 공항에 오니까 여행 싫어하는 나도 막 그런 기분이 드는데.”
“네가 내 여행이잖아. 잊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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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서 한아가 느낀 감정은 새로웠다.
“보고 싶어.”
그 말이 자연스럽게 새어나왔다. 망할, 외계인이 보고 싶었다. 익숙해져버렸다. 그런 타입도 아니면서 매일 함께 보내는 데 길들여져버렸다.
“이런…… 이런, 말도 안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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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의 새로운 소유자는 전 소유자에 대해 늘 빚진 기분이었다. 자율적으로 한 계약이었지만, 매일 곁에서 숨쉬는 한아를 얻다니 너무 이익을 본 것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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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항해 하세요, 원래의 경민씨.”
가끔 창밖 밤하늘을 향해 건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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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뭔가 달랐다. 원래의 경민을 보냈을 때의 그런 몸이 간질간질하고 신경이 쏠리고 불안해지는 보고 싶음이 아니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심해를 헤매고 있어도 이어져 있는 보고 싶음이었다.
기다리는 게 즐거울 수도 있구나. 이건 또 새로운데?
한아는 계단에 앉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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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집단 무의식 때문에 경민이 한아를 사랑하면, 그 별 전체가 한아를 사랑한다고 했다. 한아 역시 어째선지 우주를 건너오는 그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표면적이고 의식적인 것은 각자의 것이었지만, 더 깊은 곳은 강하게 묶여있는 별이었다. 한아는 그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사랑이 약간 난감했지만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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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민의 고향 사람들이 사랑하는, 혹은 사랑하게 될 우주 곳곳의 존재들을 생각했다. 집단 무의식 때문에 경민은 그 사랑도 희미하게나마 감지하고 함께 느끼고 또 꿈꾸고 있을 텐데, 질투가 났다. 사랑을 독점하고 싶은 질투인지, 아니면 그런 수많은 사랑의 지류들을 함께 느끼고 싶은 질투인지 분명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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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민이 와준 건, 왠지 대놓고 인정하긴 싫었지만 행운이었다. 우주적 행운. 한 반광물 생명체의 획기적 진화. 대단한 희생을 기반으로 한 기적. 뭐라고 이름 붙이든간에 한아는 망원경 앞의 저녁들이 좋았다. 가끔은 점점 좋아지는 게 경민인지, 그 저녁 시간들인지 헷갈리기도 했지만.
소리 없이, 먼 우주의 휘어진 빛들이 두 사람의 저녁에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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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광막함을 견디고 싶지 않고, 긴 여행에 필요한 한정된 자원을 미래 세대에게 양보하고 싶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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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합성인들이 열두 개의 손가락으로 흙 위에 글과 그림을 늘어놓는 모습은 언제 봐도 지겹지 않았다. 때로 그들의 머리카락 덩굴에서 꽃이 피기도 했다. 나팔꽃과 비슷한 형상이었다. 한아는 경민 없이 혼자서도 새벽에 일어나 종종 그들을 바라보았다. 한아가 좋아하는 행성들 중 하나가 되었다.
한아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특히 자꾸 그곳을 바라봤는데, 놀랍게도 새로운 아이디어가 샘솟았다. 광합성인들이 보내주는 것은 아닐까, 한아는 다정한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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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아는 그 얼굴이 아니라 얼굴 너머에 있는 존재를 사랑한다고 느꼈다. 이 사랑은 혼란스럽지 않아, 입안으로 말했고 확신했다. 외부 슈트 없이 본연 그대로의 돌덩어리라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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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민아.”
한아는 익숙한 이름을 불렀지만 부를 때 이름의 주인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한아에게 경민이란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처럼 여겨졌다. 아주 특별한 사랑을 이르는지 말. 이제 그 사랑의 온전한 소유권은 이 눈앞의 존재에게 있었다. 언젠가 사라질 섬에서, 사라지지 않을 감정을 가지고 두 사람은 잠이 들었다. 경민은 인간처럼 잠이 드는 게 좋았다. 단순히 무의식에 접속하는 게 아니라, 정말 눈꺼풀을 감고 몸을 늘어뜨리는 행위를 모사하는 게 좋았다. 한아가 세상을 슬퍼하거나 아프게 생각하지 않고 편안히 잠들면 그 풀어진 표정을 보는 것도 좋았고, 그럴 때마다 지구에 날아온 것이 정말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안도감 속에서 경민 역시 꿈결에 들어가면, 무의식으로 연결된 먼 곳의 속삭임이 경민의 행운을 축하해주었다. 경민은 오만해질 정도로 행복했다. 부럽지? 그러니까 너희들도 얼른 달려가. 하얗게 타는 발자국을 남기면서 열심히 달려가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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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아는 외계인 배우자가 마치 신라 시대 사람들이 아라비아에서 온 유리그릇을 소중히 여겼던 것처럼 조심조심 섬세한 도자기를 다룰 때, 또 콩비지를 마법 수프 끓이듯 저을 때 어이없음과 사랑을 동시에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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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수명이 긴 돌이랑 결혼해서 노후 준비 같은 건 안 해도 될 것 같으니까.”
“돌이라 부르지 말아줘. 어쩐지 멸칭 같다고.”
“그럼 뭐라고 해?”
“광물, 암석 등등 많잖아. 돌은 어쩐지 싫어.”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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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경민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경민은 언제나, 단절 없이, 연속적으로 한아가 사랑하는 존재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그 이름을 돌려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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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민이 한아의 이마에 키스했다. 한아가 이마에 하는 키스 따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면서 마치 입술에 대한 권한을 잃었다는 듯, 그토록 물러선 각도로 잠시 접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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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그러나 한아는 마땅한 동사나 형용사를 찾지 못했다.
“……너야.”
언제나 너야. 널 만나기 전에도 너였어. 자연스레 전이된 마음이라고 생각해왔었는데, 틀렸어. 이건 아주 온전하고 새롭고 다른 거야. 그러니까 너야. 앞으로도 영원히 너일 거야…… 한아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채 말하지 못했고 물론 경민은 그럼에도 모두 알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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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늘 미워해서 미안해요.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때도 싫어할 것 같으니까 제발 비슷한 구석에서 태어나지 맙시다. 우리 한아랑도 마주치지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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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번에는 속하게 된 곳을 더 사랑할 수 있거나, 아니면 함께 떠날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면 좋겠어. 여기도 아니고 나도 아니었지만, 다음번에는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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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이 되고 점이 되다가, 죽는 걸까? 경민은 한아가 죽고 나서야 돌아오는 걸까? 그런 비극, 외계인들도 좋아하나? 그럼 넌, 나한테 어떤 관을 만들어줄래? 난 날아오르는 관은 싫어. 어떤 관이 가장 친환경적일지 고민하다가 한아는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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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올 거라고 믿었는데 그걸 믿는 날 믿을 수가 없었어. 믿으면서도 전혀 믿을 수가 없었어.”
고장난 고래어 번역기처럼 한아가 말했다. 경민이 한아를 위로하기 위해 목덜미에 천천히 입을 맞췄다. 그러고 나서 팔을 풀고, 한아를 앞으로 돌려 다시 안았다. 돌아와서 처음 입을 맞췄다.
아, 입술이 거기 있었다.
대단한 존재감의 입술이었다. 한아는 눈을 감았고 자신의 차갑고 젖은, 치약 맛이 나는 입술에 경민의 온도 높은 입술이 닿는 걸 느꼈다. 떠나기 전보다 조금 거칠게 느껴졌고, 입술 주름들이 도드라진 것 같았다. 그게 가능한 일이라면 말이다. 한아의 모든 세계가, 경민의 입술에서부터 폭발적으로 뻗어나갔다. 다시 집이 생기고, 별이 생기고, 무한대로 뻗은 항로가 생겼다. 숨을 내쉬었다가. 우주적인 입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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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입술이 원래 다른 누군가의 입술을 따라 만든 모형이라는 건, 껍질뿐이라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벗어날 수 없는 껍질은 언제까지나 남기 마련이었다. 지구와 은하계와 이 차원을 넘어선다 해도 분명 알 수 없는 세계가 더 큰 바깥벽으로 존재할 터였다. 그러니까 결국 한아에겐 지금, 여기, 이 입술밖에 없었다. 멀리 날아온 입술. 한아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입술. 떠났다가도 돌아오는 입술.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해 조각된 입술. 그 감정적인 입술이 가짜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매듭이 지어진 거야, 이제?”
한아가 약간 뒤로 물러서며 물었다.
“응. 난 한동안 망원경을 박스에 넣을 생각이야. 다시는 널 멀리서 지켜볼 생각이 없어.”
한아는 경민에게 온 체중을 실어 안겼다. 경민의 오래된 스웨터에서 먼지 냄새, 바람 냄새, 시간 냄새가 났다. 한아는 그 순간의 두 사람이 얼마나 완벽하게 꼭 들어맞는가를 가만 느끼고 있었다. 우주가 그들을 디자인했다. 재단하고 완벽한 스티치로 기웠다. 한아는 그 솜씨를 죽었다 깨도 못 따라 하리라는, 기이한 감탄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매듭 이후, 끊임없이 이어질 달콤한 하루의 첫날. 셀 수 없는 키스 중의 첫 키스였다. 흔하지 않지만 어떤 사랑은 항상성을 가지고, 요동치지 않고, 요절도 없이 랄랄라 하고 계속되기도 한다.
우주 가장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러브 스토리의 시작이면서,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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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씨와 유리씨 남편이 먼저 가 있어. 우리가 가면 깨어나게 해놨어. 유리씨는 하루도 채 고민 안 하고 동의했다니까.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아?”
그 카드를 꺼내다니. 한아는 맥이 탁 풀려서 그대로 죽을 뻔했다. 유리가 지독하게 보고 싶었다. 먼저 세상을 뜬 지 10년이 넘은 친구가. 다소 쾌락주의자였던 동양화가는 평균 수명까지 살지 못했고, 그 충격에 유리의 남편도 곧바로 뒤를 따랐다. 아니, 그랬나? 그게 자연스러운 죽음이었나? 한아는 갑자기 헷갈렸다. 어쨌든 유리가 없는 노년은 쓸쓸했고, 경민조차 채울 수 없는 부분이 언제나 남아 있었다. 다시 만나고 싶어. 10분이라도 좋으니 수다를 떨고 싶어. 아주 쓸데없는 얘기라도 하고 싶어. 남편 욕을 하고 싶어. 남편 욕을 바가지로 하고 싶어. 미저리인지 머저리인지 모를 외계인이라고. 유리라면 분명 편을 들어줄 거야. 들어…… 줄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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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거부감을 가질 필요 없어. 생각해보면 네가 하던 일들도 비슷했잖아. 특별히 사랑스러운 것들을 부활시키는 거지. 동의한다고 말해줘.”
동의하지 않으면 나한테 그런 짓 할 수 없는 거야? 한아가 눈빛으로 물었다.
“음, 사실 서류상으로는 이미 동의된 거긴 해. 기억나? 우리 결혼식 때 주례 선생님과 나중에 서류를 하나 작성했었잖아. 우주 공용어로 되어 있던 거.”
한아는 기억을 더듬었고, 간단한 신고서라는 경민의 설명에 별 의심 없이 서명했던 게 기억났다. 한아의 오래된 심장이 철렁했다.
“남겨질 날 좀 이해해줘. 너 없이 어떻게 닳아가겠니.”

-

경민이 웃었다. 그토록 젊은 웃음. 들키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한아도 웃고 말았다. 웃음과 함께 호흡의 리듬이 흐트러졌다. 더이상은 버티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한아는 장난스러운 눈을 한 경민을 마지막으로 보고 눈을 감았다.
심장이 마지막 걸음을 할 때, 경민이 속삭였다.
다시, 다시, 다시 태어나줘.

지구에서 한아뿐

정세랑 지음
난다 펴냄

2021년 10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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