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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친해지고 싶은 호감형이기는 하지만 평일 오후 두시의 6호선에서 눈에 띌 정도지, 출퇴근 시간 2호선에서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을 희미한 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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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아를 위해서라면, 우주를 횡단할 만큼 전 확신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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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다른 이의 세계에 무력하게 휩쓸리고 포함당하며 살아가야 한다면, 차라리 아폴로의 그 다시없이 아름다운 세계에 뛰어들어 살겠다. 그 세계만이 의지로 선택한 유일한 세계가 되도록 하겠다…… 주영의 선택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아무 고민 없는 아둔한 열병 같은 것이 아니었다. 차라리 명확한 목표 의식의 결과였다.
그런데 그 세계가, 주영이 선택한 단 하나의 세계가 사라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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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아는 계속 걸었고, 경민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두 사람의 좌표가 멀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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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남자친구가 두렵다니까. 어쩌다 이런 지경에 온 걸까. 종국에는 아무 감정 없어질까 걱정했던 적은 있지만 두려워질 줄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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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같다고 생각 안 해. 한 번도 너 바보 같다고 생각한 적 없어. 넌 같은 자리에 있는 걸 지키고 싶어하는 거잖아. 사람들이 너무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들을. 난 너처럼 저탄소 생활을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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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총을 겨눴던 두 사람은 나란히 경민의 부엌 서랍을 뒤지며 중국요릿집 번호를 찾는다.
이것은 아주 이상한 밤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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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민의 몸속에서 약간의 수증기와 함께 은은한 초록빛이 흘러나왔다. 한아가 몸을 일으켜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딸꾹.”
한아는 울음을 멈추고 딸꾹질을 시작했다. 도저히 눈을 뗄 수 없는 광경이 그 안에 있었다. 훗날 한아는 그 순간이, 인생의 분기점이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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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퍼센트 정도는 광물이야. 딱 보기에도 그렇지? 탄소대사를 하지 않으니 이런저런 기계 장치가 덧붙은 건데 그건 빼고 봐줘. 어쩐지 부끄럽다.”
어느 포인트에서 부끄러운 건지 전혀 판단할 수 없어, 한아는 탁 맥이 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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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민은 알몸을 보여준 것처럼 굴었지만 그건 그보다는 회전하며 구조를 바꾸는 광물이라 만화경을 들여다본 것 같았고, 미묘하게도 한아가 느낀 건…… 아름다움이었다.
아름다운 구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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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묻는 게 예의인 것 같았다. 상식 있는 지구인으로서의 예의.
“어차피 발음 못해. 그냥 편한 대로 불러.”
“그럼 그냥 나중에 정하자.”
그래서 한아는 경민이, 일단은 경민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것이 따뜻한 수프를 가져다주도록 가만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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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반해버린 거지. 그거 알아? 내가 너한테 반하는 바람에, 우리 별 전체가 네 꿈을 꿨던 거? 하지만 첫번째로 널 보고 널 생각한 건 나였기 때문에 내가 온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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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내 망원경은 달랐어. 깨어나서 내가 잠든 동안 어디를 비췄는지 체크해보면 꼭 비슷한 지점을 스쳐갔더라고. 지구에서도 아주 좁은 면적을. 우주가 얼마나 넓은데 그건 너무 이상한 일이었어. 그래서 한동안 잠들지 않고 계속 그 근처를 살폈지. 곧 망원경이 뭘 보고 있었는지 알았어. 그러니까, 웃기지? 나보다 내 망원경이 더 먼저 널 사랑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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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냐, 아냐. 평범하게 길거리 정도가 보일 뿐이야. 너희 가게 유리창이 크니까 작업하는 걸 볼 수 있었고…… 가까이에서 보고 싶었어. 나는 탄소 대사를 하지 않는데도 네가 내뿜는 이산화탄소를 흡수하고 싶었어. 촉각이 거의 퇴화했는데도 얼굴과 목을 만져보고 싶었어. 들을 수 있는 음역이 아예 다른데도 목소리가 듣고 싶었어. 너를 위한, 너에게만 맞춘 감각 변환기를 마련하는 데 긴 시간이 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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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왜 경민이 얼굴로 왔어? 물론 처음에 널 봤으면 꽤 놀랐겠지만…… 정우성 얼굴로 올 수도 있었잖아!”
한아는 경민을 빙자해 다가온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그건 아무리 봐도 사기였다. 우주적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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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보검도 돼? 박서준도 좋아. 아, 임시완! 역시 임시완이 좋겠어.”
한아가 떠오르는 대로 좋아하는 배우들의 이름을 말하자 경민이 진심으로 난처한 얼굴을 했다.
“초상권을 존중해줘야지. 하지만 취향은 잘 고려해볼게.”
“농담이었어.”
“진담도 섞여 있지 않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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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가 승낙하면?”
“그럼 네가 죽을 때까지 쭉 머물 거야.”
“네 수명은?”
“지구 단위로는 앞으로 8만 년쯤 더 살 수 있어. 그래도 여기 오느라 많이 까먹은 건데.”
“내가 죽은 다음에는?”
“글쎄, 네가 없어도 지구가 여전히 마음에 들지는 모르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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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계인은 심장마비에 걸리기 직전의 얼굴로 기뻐했다. 심장이 있다면 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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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민은 몸을 반쯤 일으켜 한아를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에 어쩐지 코가 간질간질하다고 느끼는 한아였다. 무슨 빔을 쏘는 걸까, 이상한 외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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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민은 영 동의할 수 없는 듯했다.
“네가 없으면 내 여행은 의미가 없어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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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외계인이라도 정말 괜찮아?”
여전히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지구인 약혼자에게 걱정스레 묻는 경민이었다.
“외계인이고 지구인이고 2만 광년을 달려와주면, 아무래도 호감이 가지. 대단한 호감은 아니고, 기본적인 호감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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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 지역이라는 말에 미묘하게 빈정이 상했다.
“왜? 위험하기는 외계인들이 더 위험하지. 맨날 불 뿜으려 그러고 더 폭력적이구만.”
“아니, 꼭 그런 문제 말고도 환경 자체가 좀 위험하지.”
“여기만큼 포근한 환경이 어딨다고 그러냐?”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다른 생명체들이 탄소 대사를 할 거라고 생각하지 마. 지구도 시점에 따라 굉장히 유독한 환경일 수 있어.”
지구를 사랑하는 한아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건 모르겠고…… 여기 잠깐 앉아 있어봐.”
“어디 가?”
겁먹은 얼굴로 경민이 한아를 붙들었다. 한아는 피식 웃었다. 지난 몇 달간 이런 바보 같은 존재를 무서워했다니 아득했다. 지구 정복은커녕 롤러코스터도 하나 제대로 못 타는 녀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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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상이야.”
“상?”
경민이 솜사탕의 촉감에 놀라 하며 물었다. 감각 변환기가 아주 고장나진 않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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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메슥거려 하며 수고스럽게 와줬으니까.”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솜사탕을 떼어먹고는 경민이 아, 하고 작은 신음 소리를 냈다.
“어때?”
“상상했던 것보다 더 좋아.”
“그치?”
“이거 말고 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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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아는 계속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다시 여행하고 싶지는 않아? 공항에 오니까 여행 싫어하는 나도 막 그런 기분이 드는데.”
“네가 내 여행이잖아. 잊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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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서 한아가 느낀 감정은 새로웠다.
“보고 싶어.”
그 말이 자연스럽게 새어나왔다. 망할, 외계인이 보고 싶었다. 익숙해져버렸다. 그런 타입도 아니면서 매일 함께 보내는 데 길들여져버렸다.
“이런…… 이런, 말도 안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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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의 새로운 소유자는 전 소유자에 대해 늘 빚진 기분이었다. 자율적으로 한 계약이었지만, 매일 곁에서 숨쉬는 한아를 얻다니 너무 이익을 본 것 같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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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항해 하세요, 원래의 경민씨.”
가끔 창밖 밤하늘을 향해 건배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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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뭔가 달랐다. 원래의 경민을 보냈을 때의 그런 몸이 간질간질하고 신경이 쏠리고 불안해지는 보고 싶음이 아니었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심해를 헤매고 있어도 이어져 있는 보고 싶음이었다.
기다리는 게 즐거울 수도 있구나. 이건 또 새로운데?
한아는 계단에 앉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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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집단 무의식 때문에 경민이 한아를 사랑하면, 그 별 전체가 한아를 사랑한다고 했다. 한아 역시 어째선지 우주를 건너오는 그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표면적이고 의식적인 것은 각자의 것이었지만, 더 깊은 곳은 강하게 묶여있는 별이었다. 한아는 그 단순하면서도 복잡한 사랑이 약간 난감했지만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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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민의 고향 사람들이 사랑하는, 혹은 사랑하게 될 우주 곳곳의 존재들을 생각했다. 집단 무의식 때문에 경민은 그 사랑도 희미하게나마 감지하고 함께 느끼고 또 꿈꾸고 있을 텐데, 질투가 났다. 사랑을 독점하고 싶은 질투인지, 아니면 그런 수많은 사랑의 지류들을 함께 느끼고 싶은 질투인지 분명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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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민이 와준 건, 왠지 대놓고 인정하긴 싫었지만 행운이었다. 우주적 행운. 한 반광물 생명체의 획기적 진화. 대단한 희생을 기반으로 한 기적. 뭐라고 이름 붙이든간에 한아는 망원경 앞의 저녁들이 좋았다. 가끔은 점점 좋아지는 게 경민인지, 그 저녁 시간들인지 헷갈리기도 했지만.
소리 없이, 먼 우주의 휘어진 빛들이 두 사람의 저녁에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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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광막함을 견디고 싶지 않고, 긴 여행에 필요한 한정된 자원을 미래 세대에게 양보하고 싶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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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합성인들이 열두 개의 손가락으로 흙 위에 글과 그림을 늘어놓는 모습은 언제 봐도 지겹지 않았다. 때로 그들의 머리카락 덩굴에서 꽃이 피기도 했다. 나팔꽃과 비슷한 형상이었다. 한아는 경민 없이 혼자서도 새벽에 일어나 종종 그들을 바라보았다. 한아가 좋아하는 행성들 중 하나가 되었다.
한아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특히 자꾸 그곳을 바라봤는데, 놀랍게도 새로운 아이디어가 샘솟았다. 광합성인들이 보내주는 것은 아닐까, 한아는 다정한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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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아는 그 얼굴이 아니라 얼굴 너머에 있는 존재를 사랑한다고 느꼈다. 이 사랑은 혼란스럽지 않아, 입안으로 말했고 확신했다. 외부 슈트 없이 본연 그대로의 돌덩어리라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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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민아.”
한아는 익숙한 이름을 불렀지만 부를 때 이름의 주인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한아에게 경민이란 이름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처럼 여겨졌다. 아주 특별한 사랑을 이르는지 말. 이제 그 사랑의 온전한 소유권은 이 눈앞의 존재에게 있었다. 언젠가 사라질 섬에서, 사라지지 않을 감정을 가지고 두 사람은 잠이 들었다. 경민은 인간처럼 잠이 드는 게 좋았다. 단순히 무의식에 접속하는 게 아니라, 정말 눈꺼풀을 감고 몸을 늘어뜨리는 행위를 모사하는 게 좋았다. 한아가 세상을 슬퍼하거나 아프게 생각하지 않고 편안히 잠들면 그 풀어진 표정을 보는 것도 좋았고, 그럴 때마다 지구에 날아온 것이 정말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안도감 속에서 경민 역시 꿈결에 들어가면, 무의식으로 연결된 먼 곳의 속삭임이 경민의 행운을 축하해주었다. 경민은 오만해질 정도로 행복했다. 부럽지? 그러니까 너희들도 얼른 달려가. 하얗게 타는 발자국을 남기면서 열심히 달려가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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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아는 외계인 배우자가 마치 신라 시대 사람들이 아라비아에서 온 유리그릇을 소중히 여겼던 것처럼 조심조심 섬세한 도자기를 다룰 때, 또 콩비지를 마법 수프 끓이듯 저을 때 어이없음과 사랑을 동시에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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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수명이 긴 돌이랑 결혼해서 노후 준비 같은 건 안 해도 될 것 같으니까.”
“돌이라 부르지 말아줘. 어쩐지 멸칭 같다고.”
“그럼 뭐라고 해?”
“광물, 암석 등등 많잖아. 돌은 어쩐지 싫어.”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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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경민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다.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경민은 언제나, 단절 없이, 연속적으로 한아가 사랑하는 존재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그 이름을 돌려줄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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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민이 한아의 이마에 키스했다. 한아가 이마에 하는 키스 따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면서 마치 입술에 대한 권한을 잃었다는 듯, 그토록 물러선 각도로 잠시 접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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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그러나 한아는 마땅한 동사나 형용사를 찾지 못했다.
“……너야.”
언제나 너야. 널 만나기 전에도 너였어. 자연스레 전이된 마음이라고 생각해왔었는데, 틀렸어. 이건 아주 온전하고 새롭고 다른 거야. 그러니까 너야. 앞으로도 영원히 너일 거야…… 한아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채 말하지 못했고 물론 경민은 그럼에도 모두 알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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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늘 미워해서 미안해요.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때도 싫어할 것 같으니까 제발 비슷한 구석에서 태어나지 맙시다. 우리 한아랑도 마주치지 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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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번에는 속하게 된 곳을 더 사랑할 수 있거나, 아니면 함께 떠날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날 수 있다면 좋겠어. 여기도 아니고 나도 아니었지만, 다음번에는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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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이 되고 점이 되다가, 죽는 걸까? 경민은 한아가 죽고 나서야 돌아오는 걸까? 그런 비극, 외계인들도 좋아하나? 그럼 넌, 나한테 어떤 관을 만들어줄래? 난 날아오르는 관은 싫어. 어떤 관이 가장 친환경적일지 고민하다가 한아는 의식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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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올 거라고 믿었는데 그걸 믿는 날 믿을 수가 없었어. 믿으면서도 전혀 믿을 수가 없었어.”
고장난 고래어 번역기처럼 한아가 말했다. 경민이 한아를 위로하기 위해 목덜미에 천천히 입을 맞췄다. 그러고 나서 팔을 풀고, 한아를 앞으로 돌려 다시 안았다. 돌아와서 처음 입을 맞췄다.
아, 입술이 거기 있었다.
대단한 존재감의 입술이었다. 한아는 눈을 감았고 자신의 차갑고 젖은, 치약 맛이 나는 입술에 경민의 온도 높은 입술이 닿는 걸 느꼈다. 떠나기 전보다 조금 거칠게 느껴졌고, 입술 주름들이 도드라진 것 같았다. 그게 가능한 일이라면 말이다. 한아의 모든 세계가, 경민의 입술에서부터 폭발적으로 뻗어나갔다. 다시 집이 생기고, 별이 생기고, 무한대로 뻗은 항로가 생겼다. 숨을 내쉬었다가. 우주적인 입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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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입술이 원래 다른 누군가의 입술을 따라 만든 모형이라는 건, 껍질뿐이라는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벗어날 수 없는 껍질은 언제까지나 남기 마련이었다. 지구와 은하계와 이 차원을 넘어선다 해도 분명 알 수 없는 세계가 더 큰 바깥벽으로 존재할 터였다. 그러니까 결국 한아에겐 지금, 여기, 이 입술밖에 없었다. 멀리 날아온 입술. 한아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입술. 떠났다가도 돌아오는 입술.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해 조각된 입술. 그 감정적인 입술이 가짜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매듭이 지어진 거야, 이제?”
한아가 약간 뒤로 물러서며 물었다.
“응. 난 한동안 망원경을 박스에 넣을 생각이야. 다시는 널 멀리서 지켜볼 생각이 없어.”
한아는 경민에게 온 체중을 실어 안겼다. 경민의 오래된 스웨터에서 먼지 냄새, 바람 냄새, 시간 냄새가 났다. 한아는 그 순간의 두 사람이 얼마나 완벽하게 꼭 들어맞는가를 가만 느끼고 있었다. 우주가 그들을 디자인했다. 재단하고 완벽한 스티치로 기웠다. 한아는 그 솜씨를 죽었다 깨도 못 따라 하리라는, 기이한 감탄에 빠져들었다.
그것은 매듭 이후, 끊임없이 이어질 달콤한 하루의 첫날. 셀 수 없는 키스 중의 첫 키스였다. 흔하지 않지만 어떤 사랑은 항상성을 가지고, 요동치지 않고, 요절도 없이 랄랄라 하고 계속되기도 한다.
우주 가장자리에서 일어나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러브 스토리의 시작이면서, 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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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씨와 유리씨 남편이 먼저 가 있어. 우리가 가면 깨어나게 해놨어. 유리씨는 하루도 채 고민 안 하고 동의했다니까.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아?”
그 카드를 꺼내다니. 한아는 맥이 탁 풀려서 그대로 죽을 뻔했다. 유리가 지독하게 보고 싶었다. 먼저 세상을 뜬 지 10년이 넘은 친구가. 다소 쾌락주의자였던 동양화가는 평균 수명까지 살지 못했고, 그 충격에 유리의 남편도 곧바로 뒤를 따랐다. 아니, 그랬나? 그게 자연스러운 죽음이었나? 한아는 갑자기 헷갈렸다. 어쨌든 유리가 없는 노년은 쓸쓸했고, 경민조차 채울 수 없는 부분이 언제나 남아 있었다. 다시 만나고 싶어. 10분이라도 좋으니 수다를 떨고 싶어. 아주 쓸데없는 얘기라도 하고 싶어. 남편 욕을 하고 싶어. 남편 욕을 바가지로 하고 싶어. 미저리인지 머저리인지 모를 외계인이라고. 유리라면 분명 편을 들어줄 거야. 들어…… 줄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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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거부감을 가질 필요 없어. 생각해보면 네가 하던 일들도 비슷했잖아. 특별히 사랑스러운 것들을 부활시키는 거지. 동의한다고 말해줘.”
동의하지 않으면 나한테 그런 짓 할 수 없는 거야? 한아가 눈빛으로 물었다.
“음, 사실 서류상으로는 이미 동의된 거긴 해. 기억나? 우리 결혼식 때 주례 선생님과 나중에 서류를 하나 작성했었잖아. 우주 공용어로 되어 있던 거.”
한아는 기억을 더듬었고, 간단한 신고서라는 경민의 설명에 별 의심 없이 서명했던 게 기억났다. 한아의 오래된 심장이 철렁했다.
“남겨질 날 좀 이해해줘. 너 없이 어떻게 닳아가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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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민이 웃었다. 그토록 젊은 웃음. 들키지 않은 게 기적이었다. 한아도 웃고 말았다. 웃음과 함께 호흡의 리듬이 흐트러졌다. 더이상은 버티기 힘들겠다고 생각했다. 한아는 장난스러운 눈을 한 경민을 마지막으로 보고 눈을 감았다.
심장이 마지막 걸음을 할 때, 경민이 속삭였다.
다시, 다시, 다시 태어나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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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밍망님의 인생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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