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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시집

정지용 (지은이) 지음
범우사 펴냄

꿈에도 잊히지 않을 장면(들)

『정지용 시집』(시문학사, 1935)을 읽기 시작한 곳은 어머니의 본가이자 나의 고향인 전라남도 영광이었다. 추석을 맞아 고향에 들르는 마음이 들떴지만 잊지 않고 시집을 챙겼다. 가족과 인사를 나누고 맛있는 음식을 먹다가는 냉큼, 시집을 들고 길을 나섰다. 마을회관 지나 어느 작은 다리 위에 걸터앉아서는 소리 내어 시를 읽기 시작했다.

앞서 읽었던 김소월과 한용운의 시집이 내용으로나 형식으로나 통일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면, 정지용의 시집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수묵화를 그리듯 내처 자연에 대해 묘사하다가 점점 종교적인 색채를 띠는 시편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한 명의 시인이 쓴 것 같은 느낌이 아니었는데, 그것은 이 시집에 초기와 중기에 쓰인 시들이 한데 묶여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초기에 쓰인 시들에 보다 집중하고자 했다.

정지용 하면 무엇보다도 「향수」라는 시가 먼저 떠오른다.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 리야”(57-58쪽), 다섯 번이나 반복하여 되뇌는 시구. 정지용은 잊히지 않는 모든 “그 곳”을 바라보려 한다. 바다로, 계절로, 주야로, 식물로, 풍경으로 그의 시선이 옮겨간다. 오래 그리워하며 관찰한 사람만이 포착할 수 있는 순간이 그의 시에 가득하다. 이런 부분들이 특히 좋았다.

좋은 아침― / 나는 탐하듯이 호흡하다. / 때는 구김살 없는 흰 돛을 달다. (「아침」, 33쪽)
철없이 그리워 동그스레한 당신의 어깨가 그리워. 거기에 내 머리를 대면 언제든지 머언 따듯한 바다 울음이 들려오더니………… (「황마차」, 83쪽)
표범 껍질에 호젓하게 싸이어 / 나는 이 밤, ‘적막한 홍수’를 누워 건너다 (「밤」, 85쪽)
선뜻! 뜨인 눈에 하나 차는 영창 / 달이 이제 밀물처럼 밀려오다 (「달」, 90쪽)

오감을 모두 사용하여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을 나도 볼 수 있게 하는 정지용의 시는 중·고등학교 시절 배웠던 것처럼 공감각적 심상으로 가득하다. 이미지를, 소리를, 냄새를, 느낌을 상상하다 보면 내가 시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다. 들어가서는 화자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고심하게 된다. 무얼 말하려고 이렇게 아름다운 단어 그러모았는지 초사하게 된다. 역시나 좋았던 「옛이야기 구절」에서는 화자가 해주는 “나가서 얻어온 이야기”(153-154쪽)를 기름불이 듣고, 부모가 듣고, 시골 밤이 듣는다. 전하는 내용보다 누군가 그것을 듣고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한 이야기. 정지용은 그런 이야기들을 시를 통해서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지 생각해본다.

다음 장에는 세 장의 사진을 첨부한다. 이 사진들을 글자로 환원하면 몇 자 정도 될까. 가늠할 수 없겠구나 생각했다. 한 장 사진에 누군가의 삶이 옴팍 담겨있고, 자연의 이치가 살아 숨쉬기도 하니까. 정지용도 자신의 마음속 고이 간직한, 빛바래지 않는 여러 장의 사진을 시로 풀어낸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나는 저 세 장의 사진을 이 글로 풀어낸 것일까.
2021년 9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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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 보러 다대포 가는 1호선 안에서 박솔뫼의 「여름의 끝으로」를 읽다가 이런 부분이,

“차미를 안고 등에 코를 묻으면 땅콩 냄새 같은 고소한 냄새가 났다. 일정한 소리로 코를 골며 자는 차미의 등에 코를 대고 고소한 냄새를 맡았다. 잠이 올 것 같은 냄새였다.” (33쪽)

어젠 요가원에 좀 빨리 갔고, 한참 동안 나와 선생님 그리고 고양이 샨티밖에 없었는데, 샨티는 내 요가 매트 위에 올라와, 내게 등을 돌린 채로 앉아 있고, 바즈라아사나로 요가를 준비하려던 나는, 금세 샨티의 집사가 되어, 샨티의 등을 주물주물, 코를 대고 고소한 냄새를 맡으며, 창문 사이로 불어오는 어느덧 서늘해진 바람과 따듯한 샨티의 등을 동시에 만졌다. 여름의 끝이구나.

믿음의 개는 시간을 저버리지 않으며

박솔뫼 지음
스위밍꿀 펴냄

2023년 10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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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부산 가는데 『미래 산책 연습』 진짜 안 챙기려 했거든? 방금 후루룩 훑었는데 도무지 안 들고 갈 수가 없네··· 이를테면 이런 장면,

"된장찌개를 시켰는데 비빔밥을 시킬걸 하는 생각을 하다가 이제 하루가 지났고 남은 휴일은 무얼 하지 머릿속으로 일정을 정리하려 했지만 때마침 테이블에 커다란 보리차 주전자가 탕 소리를 내며 놓였고 커다랗고 따뜻한 주전자를 보자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졌고 보리차를 마시자 반찬이 나오고 상추가 나오고 앞으로의 일을 생각할 틈도 없이 테이블 위에 빠짐없이 차려진 밥을 먹기 시작했다." (47쪽)

나도 정말 제발 진실로 진정 이렇게 여행하고 싶다···
2023년 10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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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과 문학평론가가 주고받은 열두 편의 서신을 모아 놓은 책. ‘지금-여기’의 책들에 관해 나누는 이야기라 무척 재미있다. 두 분이 함께 읽은 책 중에는 내가 살펴보았거나 읽었던 책이 왕왕 있었고. 김대성, 김봉곤, 김지연, 김혜진, 서이제, 알렉세이 유르착, 유성원, 임솔아, 임현, 장류진, 조지 오웰, 한병철의 작품. 3분의 1 이상은 알고 있어서 어찌나 다행이었는지. 그러나 내가 모르는 작품에 관해 나누는 서간을 읽을 때도 역시 즐거웠다. 온종일 한국문학 이야기 정말로 자신 있는 나로서는,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책 가지고 양껏 수다 떠는 걸 지켜보는 게 못내 좋았다. 문학이 수다를 떨게 만드는 순간은 정말로 좋다!

*

“차이에 대한 기만적인 인정으로 무언가를 봉합해버리려는 편의적인 행태에 대해, 저 역시 선생님과 똑같이 못마땅해하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서로의 생각 안으로 들어가 그 다름 속에서 한껏 부대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 계기를 촉발하지 않는 타자는, 아무리 ' 차이'라는 명분으로 세련되게 포장하더라도 결국 동일성의 반복에 불과할 따름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듯 선생님과의 대화 혹은 열띤 논쟁이 즐거웠던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대화에서는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부드럽게 넘어가는 '합의와 존중의 정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67쪽)

이 부분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작년에 친구들과 (독서모임)을 시작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은 역시나 서로의 생각이 이렇게나 다르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서로의 생각 안으로 들어가 그 다름 속에서 한껏 부대”꼈을 때. 올해도 앞으로도 마음껏 그럴 수 있으면 좋겠다.

이 편지는 제주도로 가는데, 저는 못 가는군요

장정일 외 1명 지음
안온북스 펴냄

2023년 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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