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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여 안녕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arte(아르테) 펴냄

열 달 전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통과의례처럼 읽으며 나는 내가 이 책에 대한 세간의 열광에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종류의 사람임을 알았다. 『데미안』은 물론 유년기 상실의 아픔, 자아의 새로운 일면을 발견하고 가치 체계의 혼란을 마주하는 청소년기의 경험을 잘 그려낸 소설이다. 그러나 올바른 주체로 우뚝 서는 일, 오직 단단한 내면을 갖는 일을 완수하기 위하여 방황이란 준비되어 있는 것일까? 말하자면 내게 이 소설은 너무 강박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슬픔이여 안녕』은 성장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알을 깨고 나오는 대신 무너져 내리는 세계의 파편에 상처 입는 새의 이야기이고, 성숙의 기회가 퇴행의 욕구에 잠식되다 끝내 굴복하고 마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며, 시간이 흘러도 극복될 수 없는 아픔에 대한, 그런데도 그런 대로 살아지는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성장'이라 불리는 사건의 실체를 이 이야기에야말로 예리하게 포착하고 건져내는 힘이 있다. 성장은 반드시 슬픔을 딛고 일어나 다음 단계로 올라감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저 내 안의 존재를 알아차리고 그것에 인사를 건넴으로써 수행될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에겐 모든 고통과 단절해야 할 필요도, 그럴 능력도 없다. 용기가 두려움에 파훼당한 폐허 위에서도 우리는 어떻게든 살 수 있다. 사강은 그걸 아프게 인정하는 것이다.

사랑받고 싶어서 미워하는 것은 애정에 대한 갈구를 저버리지 못하는 모든 인간의 콤플렉스다. 그런데 사랑을 포기할 수 없다면, 우리가 이 아픔을 묵묵히 통과하는 것 말고 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성장이란 미명 하에 과거에 갇히지 말라고, 알을 깨고 나오라고 많은 작가와 강사들이 소리치지만, 나는 삶이 결코 그런 식으로만 작동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부정할 수 없다면 명명하는 것이 낫다. 나로 산다는 것은, 나만의 용법으로 세계의 존재들을 호명해 나가는 과정까지 포괄하는 일이므로.

"나를 줄곧 떠나지 않는 갑갑함과 아릿함, 이 낯선 감정에 나는 망설이다가 슬픔이라는 아름답고도 묵직한 이름을 붙인다." (첫 문장, p. 11)
👍 인생이 재미 없을 때 추천!
2021년 9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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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에서 채사장은 보수를 지지하는 노동자를 '어리석다'고 표현했고 근 몇 년 간 진보 정당은 '어리석은' 노동자들을 '계도'하지 못했다. 정부의 지원이 터무니없이 부족하다고 불평하면서 '복지 여왕'들의 나태에 치를 떠는 '그들'을 어떻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나는 억압과 소외가 사라진 세계를 꿈꾸는 진보주의자인데, 그래서 이런 물음은 시작부터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누가 누구를 어리석다고 말하는가? 국가는 '그들'을 잘 이해하고 있는가? <<힐빌리의 노래>>의 저자 밴스는 가난한 백인 노동자 출신으로서 지금의 '큰 정부'가 '우리'를 구원할 수는 없다고 항변했고 뭇사람은 그의 주장이 보수 진영에게 유리하게 인용될 것을 우려한다. 확실히 그의 주장엔 그런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게 왜 문제란 말인가? 만약 보수주의가 억압받고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에 더 잘 기여하는 것으로 드러난다면 나는 언제든지 보수를 지지할 것이다. 물론 밴스는 틀렸을 수 있다. 어떤 사람도 다른 사람보다 어느 모로나 더 어리석지 않다는 말은 입바른 소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우리는 누가 더 어리석은지를 항상 잠정적으로,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

<<힐빌리의 노래>>는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다양한 변수를 이야기하지만 핵심은 지리적, 문화적, (그리고 특히) 가정 환경으로 귀결된다. 가난한 동네는 물질적 빈곤만 대물림하지 않는다. 마약과 성을 탐닉하는 부모, 접시가 날아다니는 주방, 학습된 무기력, 약속이나 미래에 대한 투자는 무용한 것이라는 인식, 공부는 '계집애'스럽다는 편견과 마초이즘, '스파클링 워터'가 무엇인지부터 장학금 수혜 방법까지에 이르는 정보를 제공할 사회적 자본의 부재를 밴스는 가난과 함께 물려받았다. 그는 그와 같은 환경에서 삶의 중요한 순간에 적절한 방식의 정서적 지지를 보내 준 사람들이 성공의 결정적 요인이었음을 시인한다. 관료주의적이고 체계적인 감시 시스템은 그를 돕지 못했다. 사회복지사는 실질적 보호자인 조부모를 무시하고 어린 밴스를 위탁 가정으로 보내려 했고 밴스는 사랑하는 엄마와 헤어지지 않기 위해 모든 게 괜찮다고 거짓말해야 했다. 마약 중독자가 어린아이에게는 잃고 싶지 않은 엄마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쪽과 모르는 쪽 중 어느 쪽이 더 어리석은가. 밴스의 언어로 듣고, 말하려는 제도의 노력은 충분했는가?

억압을 중층적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담론이 확장하면서, 진보는 점점 더 '엘리트'의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인종, 난민, 젠더, 기후와 같이 세분화된 의제들이 진보의 외연을 넓히는 동안 러스트벨트의 빈부 격차는 꾸준히 커져 왔다. 나는 신좌파가 문제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힐빌리'의 삶을 두껍게 읽자는 주장부터가 애초에 신좌파적 사유에서 빌려 온 것이다. 그러나 '신좌파'라는 용어가 암시하는 것처럼 '구좌파'의 의제들이 '한때' 진보를 추동했던 낡은 담론으로 여겨져선 안 된다. 가난은 여전히 누군가에게 현재이다. 단지 가난이 물질적 빈곤으로서 존재할 뿐 아니라 오바마의 '매끄러운' 연설에서 느껴지는 소외감의 형태로서까지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제 알게 되었을 뿐이다. 밴스의 말대로 미국이 이미 빈자들에게 충분한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사회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부가 준 돈으로 술을 사 마시는 사람들이 이른바 시스템의 개선만으로 새 삶을 살게 되진 못하리라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이런 현실 속에서 진보의 책무 중 하나는 '그들'의 언어를 독해해 내고 '그들'의 언어로 말하기를 연습하는 일일 것이다.

밴스가 '운'이라 표현한 '애정'은 산업 사회 이래로 '가사화'되면서 '비가시화'되었고, '애정 결핍'과 같은 경험은 치유학 패러다임의 지배 하에 심리학적 문제로 밀려났다. 그래서 나는 <<힐빌리의 노래>>를, 애정의 불평등이 직조하는 억압을 묵과해 온 현실을 고발하는 책으로 전유한다. 사랑은 이제 사회적 문제가 되어야 한다. 가정이 사적인 영역으로 남아야 한다면 우리에겐 새로운 공동체, 새로운 사랑의 장소가 필요하다. 어쩌면 '진보의 실패'를 돌파할 길도 거기에 있을지 모른다.

힐빌리의 노래

J. D. 밴스 지음
흐름출판 펴냄

5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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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보티즘이라는 말이 있다. 장애를 가진 신체에 대한 일종의 페티시즘인데, 이를테면 다리가 절단된 몸에 끌리는 것이다. 디보티즘도 사랑이 될 수 있을까?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에서 김원영은 남성 디보티에게 구애를 받은 장애 여성 앨리슨의 경험을 소개한다. 앨리슨의 주변인들은 그를 소름끼쳐하고, 앨리슨의 마음은 더 복잡해진다. 내 몸에 끌림을 느끼는 게 비정상이란 말인가? 큰 가슴이나 엉덩이는 괜찮고, 다리가 잘린 몸은 매력적인 신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인가? 나아가 앨리슨이 '정상적인' 남자를 사랑하게 된다면, 어떻게 그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 수 있을까?

벨 훅스가 자각하고 있듯, 사랑은 자동 발생적이지 않다. 우리는 올바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사랑이란 저것이 아니라 이것이고, 바로 이런 사랑을 할 때 우리의 삶이 충만해질 것임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신체적 매력보다 상대의 잠재력과 본모습을 발견하는 '진짜 사랑'을 추구하는 사회가 도래한다면 앨리슨은 디보티즘 같은 '변태성욕' 없이도 충만한 사랑을 누릴 수 있으리라. 그런 사회가 도래한다면 말이지. 그러니까 훅스는, 매력의 분배가 불평등한 사회에서 앨리슨이 어떻게 사랑을 쟁취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해 주는 바가 없다. 그저 좋은 사랑을 정의하고 그 효과를 광고할 뿐이다. 이토록 간편하게 'How'에 괄호를 칠 거라면, 나는 그가 적어도 'All About Love'라는 제목으로 이 책을 출판하는 일에는 보다 신중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나는 참된 사랑을 통해 너의 본모습을 발견하고 자아를 확장하고 싶어. 그래서 비록 네 몸에 끌리지는 않지만, 너를 내 사랑으로 선택하기로 결단을 내렸어."라는 말을 듣는 앨리슨의 심정은 어떨까? 김원영은 디보티즘 자체가 사랑인 것은 아니라고 분명하게 못박지만, 한 사람의 신체가 그의 개별성이 구현되는 장소라는 점을 지적한다. 나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의무감 때문이 아니라 진정으로 나의 몸을 욕망하기를 원한다. 나의 신체는 나의 영혼만큼이나 고유한 것이고, 나를 구성하며 물리적 공간을 점유하는 실재이기 때문이다. 훅스의 정의대로 사랑이 행동이고 실천이라면, '몸'을 사랑의 촉매 정도로 국한하는 담론이 오히려 일종의 자기기만일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이 무엇이며 왜 좋은지를 명료하게 말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어려운 일은 실천이고, 실천의 장벽에는 우리의 의지를 넘어서는 환경들이 산재한다. 나는 훅스의 책이 누군가의 삶을 바꿀 수 있다면 그렇게 바뀔 수 있는 삶에 이미 어떤 특권이 내재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사랑은 더, 더 깊은 딜레마까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훅스의 말마따나 사랑은 너무도, 너무도 중요한 것이니까.

올 어바웃 러브

벨 훅스 지음
책읽는수요일 펴냄

6개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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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게임>에서 기훈은 다른 사람들의 죽음을 밟고 올라서면서도 상우가 그 죽음을 당연시할 때 분노하고, 죽은 사람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구태여 상기시킨다. 하지만 그는 나와 상대 중 한 명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걸 아는 게임에서 일남을 속이다가 정작 그 사실을 들키자 죄책감에 눈물 짓기도 한다. 기훈의 이런 행동들은 일견 위선적으로 보인다.

이 게임에서 죽고 죽이는 것은 절대 규칙이다. 모두 살리기를 이룰 방법은 없다. 단지 죽음을 매개로 어떤 관계를 맺을 수 있을지를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상우에게 경쟁자들의 죽음은 승리의 도구일 뿐이지만 기훈에게 그것은 우정을 확인하는 방식이고 내 삶의 무게를 더하는 책임이다. 이런 점에서 <오징어 게임>은 자본주의 사회뿐 아니라 부분적으로 생태계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길고양이가 살면 그만큼의 야생 새들이 사냥당해 죽는다. 레비나스 윤리학의 "죽이지 말라"라는 제1계율은 실천될 수 없다. 무엇도 죽이지 않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해러웨이는 그래서 레비나스를 비판한다. "죽이지 말라"라는 계율은 죽여도 되는 생명과 죽이지 말아야 하는 생명의 암묵적 구별을 은폐하고, "죽여도 되는" 범주에 속한 생명에게 이것은 무지막지한 일이다. 우리에게 필요하고도 가능한 실천은 "죽여도 되는 걸로 만들지 말라"라는 계율이다. 죽음이 죄임을 깊이 인정하고, 죽임의 책임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다.

<오징어 게임>의 기훈은 죽음과 죽임의 관계망 속에서 "죽여도 되는 걸로 만들지 말라"라는 계율을 반성적으로 실천한다. 그런 점에서 기훈의 승리는 순전한 권선징악만이 아니라 관계성의 윤리의 승리이다. 해러웨이는 이 윤리가 비인간에게까지 작동될 것을 요청한다. '나'는 오롯이 나가 아니고 수많은 장내 미생물이며 이들은 박테리아의 공생으로부터 왔다. 그러나 그 공생은 아름답지 않았고 한쪽이 다른 쪽을 소화하는 데 '실패'함으로써, 서로가 서로의 삶을 아슬아슬하게 위협하면서 이루어지고 유지되었다. 나는 내가 먹는 닭에게 의존하고 닭은 모이를 주는 사람에게 의존하지만 그 관계는 평등한 것이 아니다. 상호 의존한다는 것은 안정화된 자리에서 손을 꼭 맞잡는 게 아니라 불균등한 권력관계 속에서 주체와 대상의 자리를 오가며 상대가 준 실뜨기의 패턴을 받고 내가 만든 패턴을 되돌려 주는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타자와 이런 실뜨기를 한다. 하지만 무엇과 연결되고 무엇과 단절될지 필연적으로 선택해야만 한다. 모든 곳에서 모든 것에 응답할 수는 없으니까. 그 지점에서 윤리가 발생한다.

나는 주위의 타자들과의 관계를 인식하고 그들에게 적절히 응답하고 있는가? 타자의 고통을 나눌 준비가 얼마나 되어 있는가? 나의 지식이 어디에서 왜 무엇을 봄으로써 얻어진 지식인지, 내 앎의 객관성이 담보하는 부분성과 국지성이 어느 정도인지 충분히 성찰하고 있는가?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는 우리의 모든 지식과 관계가 국지적이라는 새삼스러운 진실을 상기시키지만 소개되는 사유의 구체성과 깊이는 결코 작지 않다. 페미니즘 생태학과 과학기술학의 접합을 통해 새로운 생각의 지평으로 독자를 이끄는 책이다.

해러웨이, 공-산의 사유

최유미 (지은이) 지음
비(도서출판b) 펴냄

2023년 12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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