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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정복

버트런드 러셀 지음
사회평론 펴냄

  -공작새는 다른 공작새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  공작새는 다른 공작새의 꼬리를 부러워하지는 않는다. 모든 공작새는 자기 꼬리가 가장 훌륭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작새는 평화로운 새이다.

  쇼펜하우어는 그의 저서인 '행복론'에서 인간의 운명을 3가지로 분류했다. 첫번째 인간을 이루는 것은 인격으로 건강, 힘, 아름다움, 기질, 도덕성, 예지와 예지의 함양을 들었고, 두번째는 인간이 지니는 것을 소유라 했고, 세번째로 인간이 남에게 드러내보이는 것은 인상으로 명예, 지위, 명성이라 했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이러한 기질들을 갖추어야 얻을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불행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행복'이란 단어는 좋은 운수란 뜻이있고 이는 '행운'이란 단어와 동일한 의미이다. 반면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한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정복'은 다루기어렵거나 힘든 대상 따위를 뜻대로 다룰수 있게된다는 단어와 맑고도 조촐한 행복이란 단어가 동음이의어의 관계에 있다.
  러셀의 '행복의 정복'을 한마디로 정의하라면 행복은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그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불행에 대해 러셀이 기술한 부분 살펴보자. "전형적으로 불행한 사람은 청소년 시절에 정상적인 만족을 박탈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 결과, 그 한가지 만족을 과대평가하게되어 자신의 생활을 오직 그 만족을 얻는 방향으로만 이끌게 되고, 자연히 거기에 방해가 되고, 성격이 다른 성취들에 대해서는 아주 부당한 평가를 내리게 된다."

아이는 부모의 사랑과 축복 속에서 태어나고, 호기심으로 그의 주변을 학습해나간다. 어느순간부터 아이에 대한 부모의 애정이 성공에 대한 기대감으로 변해가고, 학교라는 곳은 사회에 필요한 인재상과 기준에 이르도록 아이를 가르친다. 그러한 과정을 순조롭게 거쳐 기준을 충족시킬만한 지위를 사회에서 인정받으면 '성공한 사람'이라 일컬음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자율적이든 타율적이든 행복의 기준이 외부적 요소인 소유와 인상이 내부적 요소인 인격보다 더 강조되고 인정받는다는 것에 있다. 그러한 두 가지 기준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또는 타인의 시선에 의해 불행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인간을 이루는 것, 즉 본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것이 많을수록 외부로부터 필요한 것이 더 적어지고, 다른 사람이 덜필요한 사람이다.
문제는 인간은 자신에 대해 잘 알지 못함으로 인해 소유와 인상에 더 가중치를 두거나 ,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자기자신을 지나치게 높게 인식하는 데 있다.

'아르고스'는 100개의 눈을 가진 괴물로서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에 따르면 그의 몸에 붙어있는 눈들은 번갈아 휴식을 취하며. 제우스의 사랑을 받은 '이오'를 감시하며 항상 깨어있는 상태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제우스의 명을 받은 헤르메스에게 살해당하게되고. 이후 헤라는 그의 눈들을 공작의 깃털에 붙여 장식했다고 한다.

러셀은 공작은 자신의 꼬리를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평화로운 새라고 불렀다.  그렇다면 공작은 왜 자신의 꼬리를 훌륭하다고 생각했을까?

아르고스의 눈들이 타인의 시선이라면, 공작의 그러한 연결관계는 단절이라기보다 결합이며, 꼬릿털은 공작을 다른 새보다 구별되고 아름다운 새로 만들어준다. 공작은 자신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인식하면서도 다른 공작들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래서 공작은 평화로운 새이다.

우리는 스스로 고립되지 않는한 타인의 시선과 사회의 평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한 기준은 우리가 인식하기 전부터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다.  그것이 우리에게 적합한 것이 아니거나 감당할 수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아르고스라는 괴물에게 감시당하는 수인일 뿐이다. 그러한 감시를 견딜 수 없을 때. 정신은 불안이라는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신체는 스트레스를 야기하는 '코르티솔'이라는 호르몬을 분비한다. 
그러나 그러한 기준은 고정되는 것이 아니며,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들은 사회에 규정된  부분적인 지위에 불과할 뿐 온전한 '나'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타인의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으므로  어느 정도까지는 고려할 필요는 있다. 그래야 자신이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공간과 여유를 확보할 수있기 때문이다.

행복한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러셀은 "행복한 사람은 객관적으로 사람이자 자유로운 사랑과 폭넓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며, 이러한 사랑과 관심을 통해, 그리고 다음에는 그의 사랑과 관심이 다른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애정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통해 자신의 행복을 확보하는 사람이다."라고 정의했다.

나에게 행복이란, 받아들인 것 받아들이고, 인정할 것을 인정함으로써 깨닫게 되는 상태이며,  '행복의 정복'은 그러한 상황을 뜻대로 다루면서 얻게되는 맑고도 조촐한 행복을 말한다.





" '우리는 자신이 갖지 않은 것을 보면 곧잘, 이게 내것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아쉬워한다. 하지만 그 대신에 가끔 ' 이게 내 것이 아니라면 어떨까?' 라고 물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행복론'에서-
👍 불안할 때 추천!
2020년 11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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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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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



* 하루 종일 자신의 눈과 귀로 느끼고 사고하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데 불가결한 조건이다.



사랑의 기술



‘사랑의 기술’이란 이름을 가진 두 권의 책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오비디우스’의 책으로 2000년간 작업의 정석이란 별명을 가졌다. 그리고 또 다른 책은 ‘에리히 프롬’이 쓴 것으로, 그는 현대사회에서 변질되어가고 있는 사랑의 의미를 다시 정의하려했다.

올해 사랑의 기술은 ‘방탄소년단’이 추천한 세 개의 책 중의 하나로 재조명받기 시작했으며, 나머지 두 권인 ‘데미안’과 ‘영혼의 지도’는 본문에서 연관된 부분을 간략히 소개하고자 한다.

두 개의 사랑의 기술은 감각적인 사랑과 그것을 넘어선 것에 대하여 각각 다른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오비디우스의 책은 프로이드가 내린 성의 개념과 유사한 생각을 담고 있다. 프로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이드’는 본능적 에너지인 ‘리비도’의 저장고이며 쾌락을 추구한다. 여기서는 도덕도 선악도 없다. 그는 이러한 이드가 억압을 당하면 신경증의 원인이 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에서는 사랑은 상호간의 본능적 욕구이며 결혼은 제도적인 것에 불과한 것으로, 그것으로부터의 일탈이 행복의 원천인 것이라고 본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받아들여지기 힘들었고, 급기야 그는 황제에 의해 유배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은 어머니의 구속적인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프로이드는 모성을 표상하는 상징물로서 그리스 신화 속에 나오는 스핑크스를 사용했는데, 스핑크스는 여자의 머리와 짐승의 몸통을 하고 있으며 그는 그러한 특징이 ‘모성애’의 양면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했다.

  모성애는 자녀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되지만, 지나치게 편향되는 경우 자식을 그르칠 수 있다. 그러한 집착은 아이를 존재가 아닌 소유의 대상으로 한정시키게 되고, 그렇게 자라난 아이는 모성에 지배에서 자유롭지 못하므로 결국 어른이 될 수 없다. 그는 아비를 증오하며 항상 어머니의 자궁에 머물고 싶어 하는 습성을 지니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오이디푸스콤플렉스’ 이론이다.

지나친 모성애는 프롬의 인생에 중대한 악영향을 미쳤고, 결국 그를 여러 번의 사랑과 이별을 경험하도록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삶처럼 젊은 세대들이 사랑의 실패를 반복 하지 않기 위해서는 먼저 실패의 원인을 밝혀낸 후 스스로 사랑의 의미를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저자의 경험이 녹아들어있는 이 책은 얇은 두께이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사랑의 개념을 보다 심층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에로스’라는 개념은 사랑의 한 측면만을 확대해석한 것에 불과하며, ‘플라토닉 러브’라고 불리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그러한 영역들을 다루고 있는 플라톤의 ‘향연’은 사랑을 감정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으로 구분하지 않고 양자를 포괄하여 에로스란 개념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는 인간은 육체적으로 생식을 통해 그리고 창조를 통해 인간을 이끌어주는 아름다움이 바로 사랑이라고 말한다.



사랑의 속성



사랑은 우리의 시작과 함께 속해있었지만 인간 속에 태초부터 잠재하는 것으로서, 그 대상은 사랑을 현실화 시킨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경험적인 것과 선험적인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서서 걷는 것, 말하고 읽는 것을 배울 수 있지만 사랑에 대한 것들은 누구에게도 배울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에 대한 지식을 스스로 습득하고 그것을 토대로 적용할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하다.

많은 사람들에게는 사랑은 받는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다. 만일 그렇다면 사랑은 행운의 동의어에 다름 아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행운은 과정이나 노력 없이 주어지는 것을 뜻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활동성이 수반된 사랑은 그만큼의 또는 그 이상의 사랑을 받게 되며, 그에게 행운이란 곧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는 것이 되어버린다.

프롬은 ‘활동’은 어떤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활동, 곧 자신의 힘의 생산적 이용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알랭 바디우는 활동의 개념을 외연적인 만남에까지 의미를 확대하여, 만남은 활동성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며 항상 그에 대한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그의 이론을 적용해본다면 무의미한 것으로 보이는 것일지라도 당사자에게는 의미가 되는 만남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다. 그렇다면 만남을 필연의 연속적인 것이라고도 정의내릴 수 있을 것이다.

  낯선 만남들 속에서 사랑을 발견했던 사람들은, 그것이 영원히 계속될 것으로 예상한다. 그러나 한 때 가슴 벅차게 만들었던 감정들이 의미가 아닌 ‘의도’로써 다가올 때, 사랑은 익숙한 것으로 변해버리고, 그것은 서로에게서 자신을 점점 멀어지게 만드는 이유가 되어버리고 만다.



자유로서의 사랑 그리고 평등



한편 자유주의적 개념과 자유의지적 개념에서는 사랑은 쓸데없는 위험에 불과하다고 본다. 그러나 진정한 자유는 방종이 아니라 ‘인간은 어느 순간에도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자유에 주어지는 것은 행복이 아니라 낯선 변화에 맞닥뜨리는 가능성이며, 그것은 갈등과 충돌 속에서 역사와 함께 나온 소산물이다. 그러한 과정 없이 주어진 자유는 어떤 이에게는 형벌이 될 수 있으며, 자유는 점점 더 불안한 위치에 처하게 된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우월하다고 생각되는 타인들에게 기꺼이 바친다. 이러한 사실은 제국주의와 공산주의 그리고 파시즘의 역사 속에서 나타났다. 하지만 현대의 극단적 자본주의와 사이비 민주주의에서도 그대로 재현되는 현상이다.

  ‘평등은 종교적 맥락에서는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식이며, 우리 모두 인간으로서 똑같은 천품을 갖고 있고, 우리 모두 일체라는 뜻을 갖고 있다. 그것은 인간은 서로가 목적인 한 동등한 존재이며 서로 수단이 되는 결코 없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인간에게 대집단 속에서 마찰 없이 원활하게 일하도록 서로 동일한 원자적 인간이 되기를 요구하고 있다. 그들은 상품이 규격화를 요구하는 것처럼 사회적 과정이란 명분으로 인간의 표준화를 요구하고 이를 평등이라고 포장한다. 남자와 여자는 대립적인 극으로써 평등한 것이 아니라 동일하게 되었다.’

장자크 루소 또한 ‘에밀’에서 “자연의 특별한 사명에 따라 그 자연의 목적을 향해서 가는 것이기에 만일 한쪽 성이 다른 성을 더 닮았다면 그 성은 더 완전하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

각 사람은 자신의 몸에 남성호르몬과 여성호르몬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테스토스테론은 주로 남성의 정소에서 분비되며 여성의 난소와 부신에서도 적은 양의 테스토스테론이 분비된다. 테스토스테론의 수치가 높으면 자신감이 상승하고 승부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성격을 갖게 된다. 테스토스테론이 쾌감이 느끼는 뇌를 활성화시키기 때문이다.

에스트로겐은 여성의 제2차 성징을 발현하고, 월경주기의 간격, 여성생식기의 운동, 수정, 착상, 초기배아의 영양에 적합한 환경을 만든다. 에스트로겐은 크게 3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폐경기 여성에게 나타나는 에스트론과 가임기 여성에게 많이 존재하는 에스트라디올 그리고 임신기간 동안 분비되는 에스트리올이 있다. 에스트라디올과 에스트론은 주로 난소에서 합성 분비되며 지방 조직과 부신에서도 분비된다. 반면 에스트리올은 임신한 여성의 태반에서 만들어지며 남성은 부신과 정소에서 에스트로겐이 분비되며, 양이 여자에 비해 매우 적고, 주로 정자의 수와 형성에 도움을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자는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 비율이 높고, 여자는 여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의 수치가 높다. 이러한 점은 남녀의 물리적 실체로서의 차이이며, 정신적인 영역에서는 남성성과 여성성으로 구분되는데, 구스타프 칼 융은 남성의 여성적 자아를 ‘아니마’, 여성의 남성적 자아를 ‘아니무스’라고 명명했다. 그에 의하면 정신은 하나의 스펙트럼으로서 자외선 끝에는 ‘원형’이 자리하고 적외선 끝에는 ‘본능’이 자리한다.

일반적으로 남성성의 특징은 이성적이며, 목표지향 적이고, 추상적이며, 수직적 질서를 중시한다. 반면 여성성은 감성적이며, 현실지향 적이고, 구체적이며 수평적 관계를 중시한다.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지만, 각 개체는 남성성과 여성성을 각기 갖추고 있다. 그것은 호르몬 또는 자아의 비율의 차이이며, 그 정도에 따라 성격과 성향이 갖춰진다. 그러나 갖춰진다는 말이 고정된다는 뜻이 아니라, 출발점이 다를 수도 있다는 말로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부여된 성역할이 적합한 대우를 받지 못하면, 즉 남자가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여자가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되어 과도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면, 그것을 조절하는 코르티솔 호르몬에 이상이 생겨 기억장애뿐만 아니라 우울증, 소진, 정신병까지 발생시킬 수 있다. 현대사회는 이러한 각기 다른 성의 장단점과 차이점을 무시하고 있고, 남자도 여자도 같은 수준의 표준화를 원하며 사람들은 점점 중성화되어가고 있다.

남성적이라는 것이 기득권이 아니고 여성적이라는 것이 열등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차이가 자발성을 가질 때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이상의 것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명한 사람들은 남녀 간의 대립을 조장하는 선동가들에게 속지 말고, 그것을 강요하는 사회에 대해서 비판의 목소리를 내야 될 것이다.

  칼 융은 “원형은 본성적 힘의 형성원리이기 때문에 원형의 상징인 자외선의 남색은 본능의 상징인 적외선의 적색과 혼용되어 우리에게 보라색으로 보이고 또 다른 경우에는 본능처럼 보이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따라서 진정한 성역할이란 여성과 남성의 차이를 없애 중성적인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성적 정체성 위에 남성성과 여성성을 조화시키는 것이라 해석해야한다.

헤르만 헤세는 그의 소설 ‘데미안’에서 데미안을 남성성으로, 그의 어머니 에바 부인을 여성성으로 대치시켰다. 그러한 대극적 요소를 가진 요인들이 하나의 개체에서 충돌할 때(외부적으로는 전쟁이고 내부적으로는 내적투쟁을 말한다.) 새는 드디어 껍질을 깨고 스스로 날아오르게 되는 것이다. 마침내 싱클레어는 그가 데미안이자 에바 부인이며 동시에 그 자신이라는 것을 각성하게 되고, ‘아브락사스’는 그를 떠나게 된다.



사랑의 조건



근대 이전의 사회에서는 사회적 신분이 사회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그러나 산업사회를 거치면서 신분적 요소보다 경제적 요소가 중요해졌고 사람들은 낭만적 사랑을 예찬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분적 요소는 경제적 요소에 다름 아니며, 낭만은 구매력이 있을 때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되었다. 사회적 기준이 사랑의 전제조건이라면 ‘적자생존’의 원리 속에서 살아남는 사랑은 과연 얼마나 될까?

  알랭 바디우는 현대인들은 위험의 부재라는 범주 안에서 사랑을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사랑에서 모든 중요성들이 박탈된다고 한다. 왜냐하면 사랑에는 상실의 위험이라는 요소가 항상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식과 도박에서 리스크가 클수록 수익률이 높아지듯이, 사랑을 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충돌과 갈등 같은 위험은 서로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갖도록 만들어주고 더 많은 힘을 얻게 한다. 그 때문에 이 시대에도 여전히 로미오와 줄리엣들이 있는 것이다.

키에르 케고르는 사랑을 세 단계로 나누었다. 첫 번째 심미적 단계에서 사랑의 경험은 헛된 유혹에 빠져 그것을 만족하는 것을 말한다. 그 다음의 윤리적 단계에서는 사랑은 진정한 것으로 변하며 자기 고유의 진지함을 실현하게 되고, 이는 불변을 향하는 영원한 맹세로 변한다. 마지막으로 종교적 단계에서는 사랑에 대한 맹세의 절대적인 가치가 결혼이라는 의식을 통해 승인받는 경우를 말한다.

사랑에 대한 선언은 서로에게 근본적인 책임을 부여하는데 이는 영원한 사랑을 보장하는 행위가 아니며 삶에서 지속되고 있는 여러 가지 방식을 사랑이 창출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사랑이 둘의 선언이고 영원한 것이지만 그것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질서 속에서 그 증거를 순간마다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알랭 바디우는 사랑에는 항상 재연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실 사랑을 창출하는 행위는 다른 두 사람이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써 그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즉 자유의지로 선택한 그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곧 의미를 창출하는 행위로서 ‘계속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더 나아가 결단이 되고 약속이 된다. 그러한 신성한 계약은 서로가 동등한 위치에서 영원히 갱신되어야하는 것이다.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내가 이 사랑을 위해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도대체 당신은 내게 어떤 의미인가? 인간은 계속적으로 삶으로부터 이러한 질문들을 받게 될 것이며, 그들은 각자가 자신의 사랑에 책임을 질 수 있을 때에만 그러한 질문들에 스스로 대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대가 그대 자신보다도 다른 사람을 더 사랑하는 한 그대는 정녕 그대를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대를 포함해서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한다면 그대는 그들을 한 인간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프롬이 내리는 사랑의 정의에 따르면, 사랑은 사랑하고 있는 생명과 성장에 대한 적극적 관심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사랑은 상대방에 대해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겸손, 객관성, 이성의 발달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자신의 자아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의 사랑의 대상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 따라서 사랑은 자신에 대하여 아는 지식인 ‘자기애’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제 자신에게 다시 한 번 질문을 해보자. 나는 나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주변 사람들은 나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인식은 나의 평가와 얼마나 일치하는가?



사랑에 관한 지식 그리고 실현



사랑이 지식이라면 진정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사랑을 할 때 오히려 자기 자신을 더 잘 알 수 있다. ‘존재냐? 소유냐?’ 에서 프롬은 사랑은 소유할 수 있는 물건이 아니라 하나의 과정, 즉 사람이 주체가 되는 내적행동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주체성이 기반이 된 사랑은 상대방을 동일한 개체로서 인정하게 된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상대방을 자신만큼 소중한 존재로써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이다. 이기심은 자신의 세계를 상대방에게 강요하려드는 점에서 구별되며, 사랑은 상대방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함께 세계를 형성해나가게 된다. 따라서 사랑은 원칙적으로 우리 자신을 포함한 어떤 사람이나 대상에게로 향할 수 있는 준비로서 한 인간에 대한 사랑은 인간 자체에 대한 사랑으로 확대된다.

‘형제애’는 모든 인간에 대한 사랑이며, 배타성을 가지지 않는다. 여기서 사랑이란 이성과의 사랑을 넘어 동질감 속에서 서로가 각기 독특하고 존중받을만한 개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형제애를 통해 사람들과의 결합과 일치를 경험하게 된다. 그것은 자신보다 약한 이를 동정하는 것에서 시작되며 그것은 약하고 위태로운 자신을 인식하며 사랑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그리스 비극에서 사람들이 비극적인 주인공의 운명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안타까움과 비애를 느낄 때 영혼이 정화되는 체험으로서 ‘카타르시스’적인 동조감을 느끼게 되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성애에서는 분리된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지만 모성애에서는 한 몸이었던 두 사람이 분리되는 차이점이 있고, 형제애와 모성애는 근본적으로 한 사람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성애와 구분된다. 그러나 보편적인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모든 사랑은 하나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바로 ‘신’과 결합된 사랑이다.

우리를 보호해주시는 존경과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기를 원하는 대상에 대한 사랑은 자기애의 당연한 결과라고 '사보아 보좌 신부'는 고백했다. 결국 자기애는 사랑의 시작단계이자 최종단계로서 사랑의 대상들과 나를 하나로 결합하게 만든다. 다만 사랑은 주체성을 바탕으로 할 때 각자의 차이로 구별되며, 그러한 차이는 서로에 대한 존중을 내포한다.

‘우리는 모두 하나지만 우리는 각기 독특하고 복제할 수 없는 실재이다. 그리고 나 자신의 자아에 대한 사랑은 다른 존재에 대한 사랑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하나이지만 둘이라는 사랑의 역설적인 만남 속에서 인간은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게 되고, 그렇게 구축된 세계의 질서를 통해 관계를 설정하며 각자의 의미를 찾아나가게 되는 것이다.

‘나는 당신을 통해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세계를 사랑하고, 당신을 통해 나 자신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어야한다.’

플라톤은 사랑의 도약 속에는 보편의 씨앗이 있다고 말했다. 알랭 바디우는 이 말을, 사랑은 우연의 순전한 특이성에서 보편적 가치를 한 요소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경험이라고 해석한다.

사랑이 진정으로 어떤 것인지 깨닫는 자들은 주어지는 어떠한 어려움도 참고 견디게 될 것이며, 그 과정은 고통스러울지라도, 눈물 끝에 맺게 되는 사랑의 결실들은 그것을 잊게 해줄 것이다.

‘이데아’란 이상적인 가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구성하는 형식과 실체들이 하나의 개념으로 표상되는 것을 말하며, 따라서 ‘사랑의 이데아’란 만남과 그 순간의 모든 감정과 기억 그리고 의미와 판단 등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라 정의할 수 있다.

‘하루 종일 자신의 눈과 귀로 느끼고 사고하는 것은 사랑을 실천하는 데 불가결한 조건이다.’ 사랑은 얻으려고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경험하고 체험하는 행위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비로소 우리는 삶의 깊은 의미로 들어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에 대해 너무나 많은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도 정작 한마디 말로밖에 표현하지 못한다. 그러나 사랑을 담은 한 마디는 여러 가지 맹세 앞에 서로를 구속되도록 만든다. 루소의 표현을 빌리자면 선량한 신이 그러한 질서를 통해 존재하는 것들을 유지시키며 부분과 전체를 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단순히 강렬한 감정만이 아니다. 그것은 결의이고 판단이고 약속이다.’ 그에따라 '우리는 우리 자신의 하인이 될 것이며, 우리 자신의 주인이 될 것이다. 결국 우리는 서로에게 시중을 들게 될 것이다.'

그래서 랭보의 시처럼 ‘사랑은 재발명 되어야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러한 것으로.’



『그저 이웃 사람의 인연이라 할지라도

  그대를 보고, 목소리 들을 수만 있다면

  내겐 더없는 기쁨이어라.

  바라건대 그대의 오빠가 되던 그대의 아버지가 되던

  아니, 그 무엇이든 그대 원하는 것이 되리라』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지음
문예출판사 펴냄

👍 동기부여가 필요할 때 추천!
2020년 11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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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준

@rpaucekdhxbw

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목적보다는 철학을 쉽게 이해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 원문보다는 요약서나 자기계발서 풍의 책을 더 선호하는 편이다.

그런 책들이 나쁘다거나, 내가 수준이 높다는 식의 말을 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쉽게 읽히는 책은 철학이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다. 왜냐하면 철학에서는 결과보다 그러한 결론을 도출한 사고의 과장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과값은 고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철학에는 여러 사조가 있고,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들이 잠재되어 있는 것이다.

인생론에서도 독서에 관한 내용들을 다루고 있는데, 독서또한 인생의 과장과 유사하다.현상에 대하여 자신만의 관점없이 시도때도 없이 책을 읽는다하여 지혜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식이 꽉찬 바보가 될뿐이다.

앞으로의 세상은 이전보다 삶의 질이 개선될 것이다. 그러나 범람하는 소셜미디오와 광고 그리고 광범위한 지식들로 인해 우리의 정신의 질은 그만큼 떨어지게 될 것이다. 

생각하는 것은 고통을 수반한다. 쇼펜하우어도 이러한 것이 삶의 본질적인 측면이라 말한다. 그러나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면서 고통을 줄이고 쾌락의 양을 늘리고 있다. 벤담의 공리주의적인 입장에서 우리의 사회는 선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을까?

우리는 많은 지식과 정보를 통해 많은 것을 알지만 정작 중요한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한다. 자신이 상상하는 부분과 사회의 페르소냐에 갇혀 부분적인 면만을 지레짐작하고 일반화하고 있을 뿐이다.

쇼펜하우어는 독설가답게 이러한 위선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그 자신도 비판의 대상에 속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고로 코로나 시기가 또 다시 돌아왔다. 이러한 시점에서 한해를 돌아보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인생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을 것 같다

쇼펜하우어의 행복론과 인생론

아르투르 쇼펜하우어 지음
을유문화사 펴냄

👍 외로울 때 추천!
2020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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