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독하는 유튜버의 추천으로 읽게 된 책이지만 그 전까지는 누군지 알 길이 없었다. 저자와의 인터뷰 영상을 통해 저자를 처음으로 뵙게 되었는데 영상 말미에 앞으로는 본인은 세상에 존재 하시지 않을 거란 말씀을 직접적으로 하실때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생각났고 마지막 삶을 받아들이고 계신 그 의연한 태도에 울컥하고 말았다. 그의 마지막 메시지가 바다를 건너 나에게도 닿게 해준 기술력에 너무나도 감사하다. 저자의 어린 시절보다 세상이 빠르게 발전했으나 돌아가신 나의 할아버지의 1910년대와 6.25 참상의 대한민국의 기억이자 역사의 조각들이 저자 보다는 나의 할아버지가 더 삶이 치열하고 처절하고 각박하셨을테고 살아남고 살기 위한 삶이다 보니 날것 그대로의 말씀이셨지 조곤조곤한 혜안을 주시진 못했다. 다만 치열하고 격렬하게 사셨단걸 몸으로 보여주셨고 그 마지막을 못 뵙고 보내드린 점, 좀 더 뵈러 갈거라는 후회가 든다. 그만큼 먹고 살기 좋은 이 세상에 살고 있다고 새삼 느끼고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책을 읽기 전 영상을 먼저 접해서 개인적으로 와 닿는 내용이 많았음을 밝히는 바이다.
‘성찰’의 사전적 정의는 ‘자기 마음을 반성하고 살핌’을 말한다. 전제 자체가 일단 잘못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나에게 주어진 이 삶을 부정해야한단 말인가? 나의 마지막 생애에 가서는 ‘성찰’의 단계에 오를 수 있을까? 불교로 말하자면 열반에 든 성인을 말하는거겠지. 말이 성찰이지 살아가다보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시간은 어느새 저녁 나절이고 퇴근하고 자고 일어나면 또 출근 일의 연속이다. ‘회사 가기 싫다, 쉬고 싶다’는 톱니바퀴 소모품, 저자의 단어를 빌리자면 ‘인적 자원’, 그 이상의 존재인 우리가 무한 챗바퀴 속의 실험용 쥐 마냥 돌고돈다고 생각한다. 어디에서 삶의 질문은 오는 것일까? 책의 제목처럼 삶이 나에게 던지는 질문은 대체 무엇일까? 제목을 보고서는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생각나는건 나뿐일까? 인생이 나에게 던지는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는 프랭클 박사님의 전언처럼 말이다. 봄의 내음이 물씬 풍기는 꽃들과 나무들이 쓰러지지 않고 바람에 제 몸을 맡기는 것처럼 살아가는게 삶의 의연한 자세인가?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불평&불만 없이 해내고 하루를 마감하는게 삶이라 말할 것인가? 나를 스쳐가는 어디를 가는지도 모르는 각계각층의 산업군의 차 속의 운전자들이 ‘나와 가족을 위해 살아가고 있단다’라며 뿜어대는 엔지소리들이 삶인가? 돈을 추구하는 삶? 명예를 추구하는 삶? 사랑을 추구하는 삶? 이런 불확실성과 개개인의 추구하는 다양성이 가득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매 순간마다 고민하고 성찰하고 행동하라는 메세지. 그 본질 자체에는 언제나 사람, 너 스스로가 있다는 메세지가 아닐까. ‘성찰’이란 말은 자기 마음을 반성하고 다시 살핌을 말한다. 그렇다면 제목과 같은 ‘삶의 질문’은 언제나 동일하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개개인의 성찰이 삶의 태도를 결정한다는 말인가?
책의 내용은 21챕터의 편지 형식이다. 보통 성공한 사업가나 동기부여 저자들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예견하며 글을 써내려가는 편이라면 저자는 과거와 현재만을 가지고 삶에 대한 성찰을 제시한다. 그 과거의 삶을 반성하고 살펴보고 앞으로 같이 보낼 수 없는 사랑스러운 손주들에게 보내는 삶의 조언같은 편지말이다. 살아가다 보면 통계적으로 삶은 비슷한 평균값에서 벌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에 누구나 해주는 조언처럼 들릴지 모른다. 인류가 살아가면서 보여주는 반복되는 역사처럼. 그렇기에 이 책을 통해 정답을 추구하려는 독자는 과감히 책을 덮는걸 추천한다. 진부하기 짝이 없다고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살아가는 본인 스스로가 가장 중요하지 왜 삶의 마지막을 앞둔 이에게 고리타분한 내용을 본인도 안다고 치부하는 그 내용들을 들어야 하는가라고 생각된다면 말이다. 하지만 이런 진부한 내용이 우리네 삶의 본질 그 자체이기 때문에 마냥 꼰대의 잔소리로 들을 순 없을 것이다.
저자는 본인이 책을 쓸거라곤 생각지 못했다고 한다. 가난을 겪지 않으려고 선택한 직업이 많은 부를 가져다 주었지만 돈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저자가 일을 위해 떠나기 전 저자의 어머니께서 ‘이런 경험들이 너가 책을 쓰는데 보탬이 될 것이다’라고 한 점에서 저자는 ‘황금씨앗’이라는 표현을 쓴다. 부모와 교사들이 자녀들과 아이들이 지니고 있지만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보호자들이 아이들의 ‘황금씨앗’에 대해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양육자들의 역할은 ‘황금씨앗’의 발현을 발견해주고 발화시키도록 물질적, 정신적 지원들이 아이들의 삶에서 황금의 꽃으로 피어나는 과정이 되게끔 해주는 것이 아닐까. 저자가 책을 쓴 것처럼. 아직 발현되지 않은 아이들의 무한한 가능성을 말이다.
아이의 성장 가능성을 발화시키지만 아이들이나 어른들이나 우리는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다. 내일 아침 눈을 못 뜨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되는게 당연한데도 삶을 영위하는 연속성을 언제든지 주어져 있다는 자만에서 비롯된 거겠지. 그렇기에 언제나 삶이 우리에게 주는 첫 질문은 감사하라는 메세지가 아닐까. 그러나 현실은 그런 모습들을 직접적으로 일어나게 해주지 못한다. 자만의 굴레를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에 그렇기에 미래를 더 찬란하게 바라보는 시선과 행동이 존재하니까. 욜로처럼 현재를 탕진하라는 바가 아님이 이 책의 관통하는 시작의 성찰이자 마지막을 마무리하는 성찰이다. 그래야만이 이 불확실성의 그득한 범지구적인 사회에서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유지하며 삶이 주는 질문에 대해 대답할 수 있기에. 그리고 덜 후회하는 삶을 살기 위해.
삶이 던지는 질문은 언제나 같다
찰스 핸디 (지은이), 강주헌 (옮긴이) 지음
인플루엔셜(주)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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