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박자에 맞춰
줄을 내려가는 것

Edited by
해나
독서라는 건 요즘같이 빠른 시대엔 참 비효율적인 행위처럼 느껴지죠.  10분, 5분, 1분짜리 영상에도 많은 정보들이 담겨 나오는데 두꺼운 책을 한장 한장 읽고 있자면 그저 한량 같은 마음이 들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걱정 없이 펑펑 쓸 수 있는 시간이 있다면 고민 없이 책을 펼치고 싶어요. 

그건 아마 독서가 저에겐 몇 안 되는 나만의 박자로 해 나갈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일 거예요.
유튜브를 봐도, 영화를 보아도, 상대방의 대화를 듣는 와중에도 흘러들어오는 정보는 내가 아닌 타인의 속도에 맞춰져 있죠. 요즘 MZ세대들에게 독서가 다시 유행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어요. 아이돌 팬들 사이에선 공항 패션보다 공항 책에 더 관심을 가지기도 하고, 책과 함께 술을 즐기는 책바도 많이 생겼죠. 오프라인 독서모임과 함께 오래된 서점도 활기를 찾고 동시에 미국 Z세대들은 더 이상 밤 문화를 즐기지 않는다는 기사도 있더군요. 일찍 잠자리에 들고 더 많은 숙면을 선호하면서요. 

어쩌면 우린 너무나도 많은 제각각의 미디어와 타인의 박자들에 지쳐버린 건 아닐까요. 어렸을 때부터 빠른 미디어에 익숙한 Z세대가 자신의 취향에 맞는 책을 찾아 떠나는 현상은 그저 우연의 일치는 아닐 겁니다. 

조급함 없는 고요한 독서
저는 요즘 호주에 와있습니다. 여러 도시 중 인구밀도가 가장 낮은 퍼스라는 도시인데요. 서울에선 직항 항공편도 없고, 상대적으로 유명하지 않는 도시이죠. 복잡한 광화문 한복판에서 일을 다니다 퍼스에 떨어진 지금, 별천지 다른 세상에 와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요. 신호등을 건널 때 타인에 어깨에 부딪치지 않는 것, 고요히 서있으면 새소리와 바람 소리가 들리는 이 상황이 아직은 행복하게 낯설답니다.

읽는다는 건 저에게 조급한 숙제 같을 때도 있었고, 그저 편안한 위로일 때도 있었어요. 플라이북에서 서점 인터뷰와 뉴스레터를 맡고 있는 에디터로서 읽어야 하거나 읽고 싶은 책들이 항상 장바구니에 도사리고 있거든요.

입국을 하고 처음으로 “나의 숨처럼 읽는다”라는 말을 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내가 소화시킬 수 있는 만큼, 편안한 박자와 말맛을 찾아 책을 읽어나가는 건 대단한 평온이자 위안이더라고요.  세상엔 제 속도대로 할 수 없는 것들이 참 많잖아요. 일의 마감, 예상치 못한 사건들, 남이 만든 미디어 중 유일하게 나의 속도로 소화시킬 수 있는 건 독서라 느껴요.
나의 것이 아닌 책장들
독서가 언제나 평안을 가져다 준 건 아니었어요. 남들보다 뒤처지고 있다는 생각에 자기계발 서적을 쫓기 듯 모으기도 하고, 이 책을 안 읽으면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에 잠을 줄여가며 책을 읽기도 했습니다. 

요즘도 “인생을 바꾼 책”, “000이 추천하는 인생책 10권”과 같은 리스트를 보면 말릴 새도 없이 눌러보곤 하죠.  하지만 영화 평론가 이동진 님의 책 구절을 보고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은 없다. 
저는 인생이 책 한 권으로 바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사람의 인생을 바꾼 책이 내 인생까지 바꿀 리도 없습니다.
그러니 인생의 숙제처럼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은 없습니다.

― 이동진 『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

독서라는 건 책 욕심이 근질거려 서점 계단을 내려가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 같아요. 책 표지에 촉감을 살피고, 간혹 디자인에 혹해 읽지도 않을 책을 사기도 하는 모든 여정을 포함하는 일이죠. 타인의 인생 책장을 참고할 순 있지만 그 책장이 나의 책장이 될 수는 없을 거예요. 우린 한 공간에 살고 있지만 각자의 우주에서 다른 인생을 맛보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자신만의 책장을 가진 사람은 온전한 자신의 세계에 더 가까워 질 수 있죠. 독서를 사랑한다는 건 나의 숨결대로 문장을 읽을 수 있다는 말이니까요. 이 시끄러운 세상 속에서 나만의 박자를 들을 수 있다는 건 대단한 일이기에  독서를 하는 이들이 더 매력적이고 단단하게 느껴집니다. 

책을 좋아하는 저조차 버스에서 쉽게 숏폼 콘텐츠에 손이 가곤 합니다. 하지만 10초, 20초 사이 빠르게 넘어가는 스크린보다 자신의 박자와 취향을 알아가는 독서의 세계가 훨씬 깊고 넓음을 잊지 않았으면 해요.  

이동진 님의 말처럼 세상에 읽어야 할 책 같은 건 없을 거예요. 한 권의 책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만큼 삶이 단순하지도 않죠. 하지만 이동진 님의 책에서처럼 여러 권의 책, 그리고 우리가 책을 대하는 태도가 삶을 바꿀 거라는 것은 아주 확실해요. 하지만 그럼에도 바쁜 일상 속 시간을 내어 책을 펼치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죠.   

저는 되도록 자기 전에 한챕터씩 책을 읽는데요. 여러분들도 자신만의 독서 루틴을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요? 나만의 책과 책장, 그리고 종이를 넘기는 시간까지 온전히 즐길 수 있는 시간을 갖길 바라요. 독서라는 건 결국 이 혼잡한 세상 속에도 나만의 세계가 있음을 상기시켜 주는 일이니까요.

 그래서 나의 책장을 채울 때, 또는 플라이북에서 취향이 같은 타인의 책장을 발견했을 때, 박자와 취향이 맞은 것 같아 아무도 몰라 줄 기쁨을 느낄 때가 많아요. 보르헤스의 문장으로 글을 마칩니다. 오늘도 따뜻한 커피와 문장 속에서 자신의 한 부분을 찾을 수 있는 평온한 하루가 되길 바랍니다. 

책 읽기를 행복의 한 형태로, 기쁨의 한 형태로 생각해야 하는 거예요. 난 의무적인 독서는 잘못된 거라고 생각해요. 의무적인 독서보다는 차라리 의무적인 사랑이나 의무적인 행복에 대해 얘기하는 게 나을 거예요. 우리는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어야 해요. 늘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책이 지루하면 내려놓으세요. 그건 당신을 위해 쓰인 책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읽고 있는 책에 빠져드는 걸 느낀다면 계속 읽으세요.”
의무적인 독서는 미신 같은 거예요.

― 호르헤루이스보르헤스,윌리스반스톤 『보르헤스의 말 : 언어의 미로 속에서, 여든의 인터뷰』

해나
@haenanov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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