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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책
출간일
2025.1.31
페이지
456쪽
상세 정보
조선시대 사람들은 초상화를 왜 그렸고, 어떤 용도로 사용했을까? 초상화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고, 사람들은 초상화를 어떻게 활용했을까? 화가들은 초상화의 주인공을 실제 모습대로 그리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렇다고 그저 외형만 잘 닮게 그리면 되었을까? 그리고 초상화의 주인공들은 그저 “잘 그려 주시오!” 하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을까?
이 책은 조선시대 초상화들에 얽혀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통해 당대 정치, 사회, 문화상을 추적, 해설한다.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어진’, 충성심의 증표로 왕이 하사한 ‘신하 초상’, 각 당파나 학파의 정통성을 과시하기 위해 그려진 ‘스승 초상’, 지방 수령과 백성들의 이해관계에서 생겨난 ‘목민관 초상’, 출사와 은일 사이의 고뇌가 담긴 ‘사대부 초상’, 그리고 사랑과 애도의 마음이 담긴 ‘벗과 가족의 초상’까지, 저자는 조선시대 초상화 120점을 하나하나 분석하여 미술사적 의미와 흐름을 밝힐 뿐 아니라, 그 초상화가 어떤 배경에서 그려졌으며, 그려진 초상화들은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힘을 발휘했는지, 초상화를 단순한 그림 이상의 무언가로 여겼던 당대 사람들의 인식은 무엇인지, 그렇게 그려진 초상화가 정치, 사회, 문화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추적한다.
※ 누드 제본 도서입니다.
상세정보
조선시대 사람들은 초상화를 왜 그렸고, 어떤 용도로 사용했을까? 초상화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고, 사람들은 초상화를 어떻게 활용했을까? 화가들은 초상화의 주인공을 실제 모습대로 그리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렇다고 그저 외형만 잘 닮게 그리면 되었을까? 그리고 초상화의 주인공들은 그저 “잘 그려 주시오!” 하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을까?
이 책은 조선시대 초상화들에 얽혀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통해 당대 정치, 사회, 문화상을 추적, 해설한다.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어진’, 충성심의 증표로 왕이 하사한 ‘신하 초상’, 각 당파나 학파의 정통성을 과시하기 위해 그려진 ‘스승 초상’, 지방 수령과 백성들의 이해관계에서 생겨난 ‘목민관 초상’, 출사와 은일 사이의 고뇌가 담긴 ‘사대부 초상’, 그리고 사랑과 애도의 마음이 담긴 ‘벗과 가족의 초상’까지, 저자는 조선시대 초상화 120점을 하나하나 분석하여 미술사적 의미와 흐름을 밝힐 뿐 아니라, 그 초상화가 어떤 배경에서 그려졌으며, 그려진 초상화들은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힘을 발휘했는지, 초상화를 단순한 그림 이상의 무언가로 여겼던 당대 사람들의 인식은 무엇인지, 그렇게 그려진 초상화가 정치, 사회, 문화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추적한다.
※ 누드 제본 도서입니다.
출판사 책 소개
외형은 물론 정신까지 담아내려 한 조선시대 초상화,
예술성 높은 그림들의 이면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까?
초상화에 깃든 조선의 정치, 사회, 문화 풍경
조선시대 사람들은 초상화를 왜 그렸고, 어떤 용도로 사용했을까? 초상화는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고, 사람들은 초상화를 어떻게 활용했을까? 화가들은 초상화의 주인공을 실제 모습대로 그리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으며, 그렇다고 그저 외형만 잘 닮게 그리면 되었을까? 그리고 초상화의 주인공들은 그저 “잘 그려 주시오!” 하고 가만히 앉아만 있었을까?
이 책은 조선시대 초상화들에 얽혀 있는 다양한 이야기들을 통해 당대 정치, 사회, 문화상을 추적, 해설한다.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어진(御眞)’, 충성심의 증표로 왕이 하사한 ‘신하 초상’, 각 당파나 학파의 정통성을 과시하기 위해 그려진 ‘스승 초상’, 지방 수령과 백성들의 이해관계에서 생겨난 ‘목민관 초상’, 출사(出仕)와 은일(隱逸) 사이의 고뇌가 담긴 ‘사대부 초상’, 그리고 사랑과 애도의 마음이 담긴 ‘벗과 가족의 초상’까지, 저자는 조선시대 초상화 120점을 하나하나 분석하여 미술사적 의미와 흐름을 밝힐 뿐 아니라, 그 초상화가 어떤 배경에서 그려졌으며, 그려진 초상화들은 어떤 역할을 하고 어떤 힘을 발휘했는지, 초상화를 단순한 그림 이상의 무언가로 여겼던 당대 사람들의 인식은 무엇인지, 그렇게 그려진 초상화가 정치, 사회, 문화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를 추적한다.
닮게 그린다는 것 - “터럭 한 올이라도 더 많으면 곧 다른 사람이다!”
조선시대에 초상화 제작을 의뢰받은 화가에게 요구된 가장 중요한 사항은 누구라도 주인공을 단번에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닮게’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송나라 유학자 정이(程頥)의 “터럭 하나라도 더 많으면 곧 다른 사람이 된다.”라는 말이 자주 인용되었다. 이에 따라 화가들은 주인공의 모습을 더 닮게 그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면서 회화 기법상의 큰 진전을 이루었다. 저자는 1700년을 전후하여 초상화 표현 기법에 일대 변화가 있었다고 하면서, 김진규가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김만중 초상>(1600년대 말)과 <김진규 초상>(1710년대)을 통해 이러한 변화를 잘 알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한편, 실제 모습에 가깝게 그리는 쪽으로만 초상화 기법이 발전해 나가지만은 않았다. 김진여가 그린 <권상하 초상>(1719)은 서양의 명암법이 잘 반영되어 있어 사실적 재현 솜씨가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는데, 이보다 후에 그려진 진재해의 <유수 초상>(1726)은 서양화법을 반영하지 않고 따뜻한 질감의 피부색을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 결과적으로 <권상하 초상>은 사실적이기는 하나 어둡게 그려진 반면, <유수 초상>은 매우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로 재현되었다. 오늘날 사람들도 자기 얼굴의 주름이나 잡티가 드러나지 않기를 원해서 사진을 보정하는 것처럼, 당대 사람들도 사실적인 그림만을 지향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과장된 묘사로 내면을 드러내다 - <송시열 초상>, <박세채 초상>, <윤두서 자화상>
외형 못지않게 내면 즉 주인공의 정신적인 면을 드러내는 것도 중시되었는데, 이때는 주인공의 특징적인 면을 의도적으로 과장되게 부각한 경우가 많았다. 얼굴 곳곳의 굵직하고 구불구불한 주름, 붉은색의 두꺼운 입술, 무성한 수염과 눈썹, 큰 몸체 등 매우 강렬한 인상의 인물로 보이게 하는 <송시열 초상>, 떡 벌어진 어깨, 넓은 팔소매 등 덩치가 매우 커 보이게 그려져서 그의 제자가 “높고 큰 산의 형상”이라 말한 <박세채 초상>이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 한쪽 귀밑에서 다른쪽 귀밑까지 빙 둘러 나 있는 수염 한 올 한 올이 서로 얽히지 않고 가지런히 바깥쪽으로 뻗은 모습으로 그려진 <윤두서 자화상>을 두고, 저자는 “윤두서는 자신이 평생 쌓은 학문적·예술적 성취와 자신감의 근원을 자화상에 담아내고자 했으며, 자신의 머리(얼굴)에서 기가 발산되는 듯한 모습으로 수염을 표현함으로써 이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고 말한다.
초상화는 곧 ‘주인공의 대체물’ - <안향 초상> 도난, 훼손 사건
조선시대 사람들은 닮게 그려진 초상화를 주인공의 ‘대체물’로 인식했다. 1684년 소수서원에 도둑이 들어 그곳에 봉안돼 있던 <안향 초상>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도둑은 <안향 초상>을 훼손한 뒤 고을의 성 서쪽 큰길가에 버렸다. 당시 이 지역에서는 순흥부를 다시 설치하기로 함에 따라 여러 관공서의 신축을 자체적으로 진행하면서 많은 백성들이 부역에 동원되었고, 이 때문에 지역 양반들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우의정 남구만은 이러한 백성들의 원성을 안향 초상화 도난 및 훼손 사건의 주요 원인으로 지적했다. 즉 당시 사람들은 안향의 초상화를 한낱 그를 재현한 ‘그림’으로 보지 않고 바로 ‘안향’ 자체로 보았고, 안향은 곧 양반 사대부의 대명사였으며, 그래서 안향의 초상화를 훼손함으로써 불만을 표시했던 것이다.
초상화 봉안의 정치학 - 추모를 더욱 간절하게 만드는 힘
16세기 중반 이후 훈구 세력을 누르고 권력을 쟁취한 사림 세력은 선현을 기리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했으며, 전국 각지에 서원을 건립해 나가면서 ‘초상화의 힘’에 주목했다. 초상화가 선현을 사모하고 기리는 마음을 더욱 간절하게 만드는 중요한 매개체라고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1814년 소론계 유학자 강필효가 유봉영당(酉峯影堂)에서 윤증의 초상화를 보고 “마치, 그때 선사(先師) 앞에서 친히 말씀을 듣는 듯했다.”라고 한 것, 17세기를 대표하는 남인 유학자 장현광이 정몽주의 초상화를 첨배한 뒤 “거슬러 당시를 멀리 상상하니 구천(九泉)에서 다시 나오신 듯하네.”라고 한 것 등이 그 예로, 저자는 16세기 이후 초상화는 단순히 특정 인물을 재현한 그림이 아닌, 위패에 버금가는 봉안 대상으로서의 권위를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생사당 봉안용 초상화 - 목민관과 백성들 간의 결탁의 산물
조선시대 초상화 중 상당수는 주인공이 화가에게 의뢰해 제작한 것이 아니라, 그를 추모하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려진’ 것이었다. 이 중에는 한 고을에서 선정(善政)을 베풀고 떠난 목민관을 기리기 위해 고을 사람들이 제작한 ‘생사당(生祠堂) 봉안용 초상화’라는 것이 있다. 생사당은 제향 대상 인물이 살아 있는데도 그를 제사 지내기 위해 세운 사당을 말한다. 1595년경 평안감사 이원익을 위해 지역 백성들이 세운 생사당이 그 시발점으로 여겨지는데, 저자는 생사당의 유래 및 성행의 흐름을 평안감사 허적‧이만원‧홍만조, 평양서윤 성수웅 등의 초상화를 들면서 살핀다.
한편, 생사당 조성은 17세기 말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는데, 이 시기에 조정에서는 생사당의 무분별한 난립에 따른 폐단에 대해 거듭 논의했다. 즉 지방관들이 ‘양리(良吏)’라는 명예를 얻을 요량으로 세금을 무분별하게 경감하는 등 필요 이상의 은혜를 베풀고, 지역민들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생사당을 건립해 주었던 것이다. 영조는 1724년 이후 평안도에 건립된 관찰사의 송덕비(頌德碑)와 생사당을 모두 철거할 것을 지시했다. 결국, 생사당 봉안용 초상화는 17~18세기에 출몰한 특수한 그림이 되고 말았다.
제자들이 화가를 시켜 몰래 그린 스승의 초상화 - <윤증 초상>
1711년 여름, 도화서 화원 변량은 윤증의 초상화 두 점을 그렸다. 이때의 초상화 제작은 윤증의 제자들이 주관했다. 제자들이 윤증에게 초상화 제작 계획을 말하자 그는 “나의 부친도 초상화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그것을 가질 수 있겠느냐.”며 제의를 거절했다. 이에 제자들은 향음례(鄕飮禮) 행사를 진행하는 중에 화가 변량을 무리 중에 들어가게 해 몰래 스승의 모습을 그리게 했다. 이로써 윤동수는 이런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하늘이 도우심에 힘입어 스승의 형상을 그려 초상화를 얻었다. 완연히 양기(陽氣)가 만물을 기르는 듯한 용모이시니, 춘풍의 기운을 띠신 것 같네. 지금에 이르러 목소리와 형상이 영원히 사라진 후에도 첨배하여 우러러 바라볼 수 있으니, 후덕한 품성이 어렴풋하나 기상이 방불하여 웃고 말씀하는 소리가 들리고 귀한 가르침을 받는 듯하네. 어찌 사림과 후학의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먼저 죽은 벗을 떠올려 그린 윤두서의 역작 - <심득경 초상>
윤두서는 친한 벗 심득경이 세상을 떠난 지 4개월 만인 1710년 11월에 그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가며 <심득경 초상>을 완성했다. 이 초상화에는 이서가 짓고 윤두서가 쓴 찬문 두 편이 있다. 심득경보다 이서는 열한 살이 많았고, 윤두서는 다섯 살이 많았지만 두 사람은 심득경을 친구로 여겼다. 심득경이 죽은 지 2개월여에 이서는 그를 위한 제문에서 “아! 내가 공을 잃은 뒤로 정신이 나간 모양이다. 좌우에서 공을 보고, 앞뒤에서 보고, 오가면서 함께했던 장소에서 보고, 꿈에서도 보고, 어른어른하고 희미한 사이에도 보았다. 아! 공의 모습을 어느 날에 잊겠는가! 공의 덕스러운 모습을 어느 날에 놓겠는가!”라며 애통해했는데, 이후 심득경의 모습을 윤두서가 재현해 놓은 것이다. 『연려실 기술』에는 “득경이 죽은 후 두서가 득경의 초상화를 추작(追作)하여 그 집에 보냈더니 온 집안이 놀라서 울었”다고 적혀 있는데, 그만큼 실제 모습대로 재현해 낸 윤두서의 솜씨를 짐작할 수 있는 일화인 것이다.
86세 노모의 모습을 영원히 간직하고자 한 그림 - <복천 오 부인 초상>
<복천 오 부인 초상>(1761)은 영조 대의 대표적인 왕실 인사였던 밀창군 이직의 부인 동복오씨의 86세 때 초상화다(복천은 동복의 옛 지명으로, 지금의 전남 화순군 동복면을 가리킨다). 이 그림은 그녀의 아들 이익정이 평소 가깝게 지내던 강세황에게 의뢰하여 그려 받은 것이다. 인물의 사실적 재현을 통해 정신적인 면까지도 그림에 담아낼 수 있다고 믿었던 강세황은 오 부인을 매우 왜소하고 마르고 병약한, 당시 모습 그대로 표현했다. 탈모가 진행된 듯한 머리, 깊은 얼굴 주름, 왼눈만 살짝 뜬 모습 등은 그녀의 건강 상태를 여실히 보여 준다. 오 부인은 1762년 3월 13일에 세상을 떠났다. 화기가 작성된 1761년 9월경에 그림이 그려졌다고 가정하면, 초상화 제작 후 약 6개월 뒤에 사망한 셈이다. 저자는 당시 오 부인이 침상을 벗어나지 못할 정도로 건강이 매우 나빴을 것으로 짐작하면서,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몸이 야위어 가는 데다 지병으로 계속 누워 있어야 하는 노모를 보는 아들 이익정의 심정”, “머지않아 모친을 다시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이 그림이 그려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아버지와 아들의 애절함이 담긴 초상화 모음, 《칠분전신첩》
화가 임희수는 1750년 7월 27일 18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그는 유일한 작품으로 《칠분전신첩(七分傳神帖)》을 남겼는데, 이 화첩에 수록된 <강세황 자화상>과 확인되지 않은 인물의 초상화 한 점을 제외한 17점은 모두 임희수가 그린 것이고, 부기(附記)는 그의 부친 임위가 임희수 사망 후에 초상화첩을 꾸미는 과정에서 기록해 넣은 것이다.
이 화첩에서 가장 특기할 만한 점은 얼굴이 조금씩 다르게 표현된 임위의 초상화 다섯 점이다. 저자는 이 그림들을 ‘임희수가 부친의 모습을 단순히 묘사한 그림’이 아닌, ‘자기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해 달라는 아버지의 거듭된 요청 끝에 완성한 그림’으로 본다. 부자가 나눈 애절한 혈육의 정에서 나온 산물이라는 말이다. 특히 유탄(柳炭)으로 얼굴 윤곽과 수염만 소략하게 그린 미완성 초상은 임희수가 죽기 불과 10여 일 전에 그린 것으로, “손이 떨려 미처 몰골법으로 채색하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는 아버지 임위의 기록은 의미심장하다. 저자는 “이 부기를 읽고 나서 이 초상화를 보면, 몸이 성치 않아 손을 떨면서도 부친의 초상화를 완성하려 한 임희수와 그의 죽음을 예감하며 자신을 그리는 모습을 지켜보는 임위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겹쳐 떠오른다. 또한 자신이 사랑한 아들이 세상을 떠난 후 그가 남긴 자신의 초상화를 보는 임위의 마음이 얼마나 비통했을지 공감하게 된다.”고 말한다.
자신의 어진 제작에 온힘을 쏟은 숙종
숙종은 조선시대 초상화 연구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무엇보다도 그가 세 차례에 걸쳐 자기 어진을 제작함으로써 재위 중인 국왕이 어진을 제작하는 관행을 거의 200여 년 만에 복원시켰기 때문이다. 이후 거의 모든 후임 국왕들이 그가 마련한 어진 제작 관행과 의례 절차를 좇아 재임 중에 다수의 어진을 제작했다. 결과적으로 숙종은 조선 중기의 이른바 ‘무어진(無御眞) 시대’를 마감하고 조선 후기의 화려한 ‘어진 시대’를 열었던 임금으로 평가된다.
저자는 숙종이 자신의 어진을 세 차례에 걸쳐 제작한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면서 숙종 본인이 어진 제작에 얼마나 어떻게 깊숙이 관여했는지를 보여 준다. 결국 숙종은 자신의 모습이 핍진하게 재현된 초상화를 통해 자신의 모습이 후대 자손 및 신하들에게 정확하게 전해지고, 태조 및 세조 등 국초(國初)의 공적이 큰 왕들처럼 성군(聖君)으로 기억되기를 간절히 염원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954년 궁중유물 창고 화재로 그의 모습이 온전히 남겨진 어진은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못했다.
격식에 맞지 않는 관모와 의복 차림의 초상화
<강세황 자화상>은 주인공의 내면 의식이 강하게 드러난 것으로 평가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초상화에서 강세황은 오사모(烏紗帽)를 쓰고, 옥색 도포를 입고, 허리에는 붉은 띠를 맸다. 그런데 오사모는 관리가 관복(단령)과 함께 착용하는 관모이고, 도포는 사대부가 벼슬에서 물러나 있을 때 입는 옷을 통칭하여 부르는 야복(野服)의 하나다. 오사모와 도포의 차림은 격식에 안 맞는 옷차림인 것이다. 강세황은 자화상에 남긴 자찬문에서 “관리의 갓을 쓰고 야복(野服)을 입었네. 마음은 산림(山林)에 있으나 이름은 조정의 명부에 올라 있음이 보인다.”라고 했다. 저자는 오사모는 ‘출사(出仕)’를, 야복은 ‘은일(隱逸)’의 상징물이라고 해석하면서, 강세황이 “자신의 마음은 산림에 있으나 이름은 조정의 명부에 올라 있다는 말로써 출사와 은일이라는 상반된 가치 사이에서 고뇌하는 자신의 정신세계를 드러내었다.”고 설명한다. 이처럼 조선시대 초상화는 주인공의 의사가 깊숙이 반영된 그림이면서, 단순히 보이는 모습대로만 그려진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유학자들의 초상화에 표현된 복식의 의미
저자는 이 책에서 특히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초상화에 표현된 복식의 의미에 대해 많은 페이지를 할애하며 그 의미를 밝힌다. 그중 하나가 ‘심의(深衣)와 복건(幅巾)’인데, 이는 주희를 상징하는 ‘옷’으로 조선시대 사대부들 에게 널리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송시열 초상>의 심의와 복건 차림은 송시열이 평생 주희의 학문을 따르고 계승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기 위해 화가에게 요청한 복식이며, 같은 복식으로 그려진 <이삼환 초상>, <유한준 초상> 역시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정자관에 야복(도포) 차림으로 그려진 <이채 초상> 역시 같은 의미로 읽히는데, 특히 이채가 이런 초상화를 남긴 것은 조부 이재의 초상화에서 영향받은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고 한다. 저자는 “그는 야복본 초상화를 통해 조부 이재로부터 자신으로 이어지는 가문의 계보는 물론 학문적 정통성을 드러내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추정하고 있다.
조선시대 초상화의 주인공들은 그림을 통해 자기 모습이 영원히 남을 것이라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기 초상화에 자신이 염원하고 지향했던 것, 나아가 자신의 정신세계, 내면, 사상을 담으려 했다. 이처럼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초상화는 자아를 시각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매우 유용하고 효과적인 매체였다.
그 밖의 주요 초상화 14점
본문에서 다루지 못했지만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초상화 14점을 책 끝에 부록으로 소개했다. <사명대사 진영>은 현전하는 우리나라 진영 중 가장 오래되었고 묘사 방식이 뛰어난 그림 중 하나이며, <조영복 초상>은 조선시대 초상화 중 드물게도 두 손이 표현되었을 뿐 아니라 손가락 마디마디가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어 눈길을 끈다. <김이안 초상>은 큰 키에 깡마른 체형, 뺨 부분이 움푹 들어간 얼굴 등 주인공의 개성적인 외모 묘사가 매우 인상적이며, <고종 어진>은 고종 생전에 그의 어진을 그린 경험이 있는 채용신이 대한제국이 망한 뒤 고종을 추모하려는 일반의 수요에 응하여 제작한 초상화로 추정된다. 1906년 1~2월 전라도에서 결연한 의지로 의병을 모집해 일본과의 전투를 준비 중이던 때의 모습인 <최익현 초상>은 아픈 역사와 함께 의미심장하게 다가오고, 1909년 서울의 천연당사진관에서 촬영한 사진을 토대로 채용신이 황현 사후에 제작한 <황현 초상>은 제작 과정의 특이함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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