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적마음

김응교 지음 | 책읽는고양이 펴냄

일본적마음 (김응교 인문여행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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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2017.11.30

페이지

240쪽

#까마귀 #마츠리 #무사도 #문학 #문화 #예술 #와비사비 #일본 #하이쿠

상세 정보

이 책은 아시아적 관점에서 일본 문화와 그들의 정체성을 관찰하고 연구한 인문에세이다.
지진이 난무하는 섬나라 일본, 폐쇄된 곳에서 그저 숙명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한 민초들과 막강한 무사의 나라. 이 속에서 깊게 뿌리 내린 ‘체념’, ‘집단주의’, ‘부끄러움과 수치’, ‘죽음’의 문화를 통해 문학평론가인 저자는 오늘의 일본을 읽고, 비평의 글을 써내려간다.
일찍이 미국인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가 제2차 세계대전 중 적국인 일본의 이중성에 대해 《국화와 칼》로서 비판했다면, 이 책은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더 나아가 제국주의 일본으로부터의 반성을 요구하는 아시아인이라면 짚고 넘어가야 할 일본의 민낯을 찾아가는 안내서이다.

왜 일본사람은 찬란한 벚꽃을 보며 죽음을 떠올리는가.
왜 단순하고 밋밋한 내용의 영화 '철도원'을 보며 한없이 눈물흘리나.
"잇쇼켄메이" 왜 일본사람들은 사소한 일조차 목숨걸고 하겠다고 습관처럼 말하며,
어째서 대를 잇는 장인이 많을까.
하루키는 일본인의 무엇을 대변하는가
야스쿠니 신사, 그들은 어떻게 신을 만들었고, 왜 반성을 모르는가.


체념의 문화
피할 수 없을 때, 단 하나의 선택은 받아들임 뿐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상이 자기 문화 속에 들어왔을 때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일본인의 생활방식 중 하나다. 지진 같은 재해의 비극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폐쇄된 좁은 공간에서 어떤 숙명도 피할 수 없을 때, 단 하나의 선택은 ‘받아들임’인 것이다. 어느 나라보다 많이 발달되어 있는 괴기담 시리즈도 일본의 이런 특성에 기반한다. ‘무섭다’는 호기심이 일상에 스며든 결과이다. 헤어질 때 쓰는 인사말인 ‘사요나라〔左?なら〕’라는 말 속에도 체념의 철학이 깔려 있다. ‘사요’는 즉 ‘그렇다면’ 일 뿐이다. ‘현실이 그렇다면 그대로 이 사실을 솔직히 받아들여 헤어집시다’ 라는 의미인 것이다.
에도 시대의 화가 호쿠사이가 그린 「후카쿠 36경」을 보면, 후지산도 삼킬 듯이 덤벼드는 파도에 마구 흔들리는 세 척의 생선잡이 배가 있다. 배에 탄 사공들은 피할 수 없는 거센 파도 앞에 납작 엎드려 있다.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을 대하는 자세다. 이런 풍경은 자연과 재해에 맞대응하는 일본인의 집단심리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오늘날 이들의 집단정신을 엿볼 수 있는 것은 마을축제인 마쓰리(祭り)다. 일본인 스스로도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이 흥분의 공통분모는 하나의 제의가 주는 동질성의 힘, 피의 힘이다. 1억의 수다스러움은 미코시〔神輿 : 가마, 수레〕로 상징되는 집단정신으로 모아진다. 한편, 집단적인 힘이 자신들의 울타리를 벗어났던 지난 날, 무시무시한 이기와 차별의 결과를 낳았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죽음의 문화
목숨 걸고 일하고 죽음은 가볍게


지진이 빈번한 일본이란 땅은 죽음과 친해질 수밖에 없는 자연적 배경이다. 그래서일까. 일본 사람들은 눈부시게 만개한 벚꽃을 보면서도 죽음을 생각한다.

사쿠라가 만발할 때 술 한 잔 들고
사쿠라가 질 때 함께 죽노라
(하이쿠의 한 구절)

죽음의 문화를 확고히 다져놓은 것은 사무라이 문화다. 사무라이는 ‘배를 주릴망정 명예에 죽고 사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는다. 사무라이 문화, 곧 칼의 문화는 오늘날까지도 변용되어 곳곳에 스며 있다. ‘잇쇼켄메이(一生縣命)’라는 말은 한국말로 의역하면 ‘열심히’라는 뜻이다. 원래는 ‘주군의 영지를 목숨을 걸고 지킨다는 말’이었는데, 그게 더 확실하게 ‘자신의 생명을 걸고 열심히 일한다’로 바뀌어 사용된다. 전국시대 때, 한 영주의 밥에서 머리카락 한 올이 나왔을 때, 벼락 같은 소리가 떨어지자마자 요리사의 머리가 베어졌다는 말이 진짜처럼 전해져 내려온다. 어찌 밥 한 그릇에 목숨을 걸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잇쇼켄메이’는 오늘날 그 장소가 회사든 학교든 가정이든 공장이든 목숨을 걸고 일한다는 의미가 되었다.
일상적으로 봐도 죽음에 대한 이해에는 차이가 있다. 서양에서 죽음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한국의 경우는 최소한 원래의 장소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있다. 반면 일본인은 사망을 ‘나쿠나루모노〔失亡 : 없어지는 것〕’라고 한다. 그야말로 끝나는 것이다.
일본 문화물의 클라이맥스는 종종 ‘아름다운 죽음’으로 미화되곤 한다. 아름답게 미화된 죽음, 큰 것을 위해서는 죽어도 된다는 생각이 이들이 만든 문화물 곳곳에 스며 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일상에서 문제 해결의 한 방법으로 자살을 택한다. 이렇게 일본이라는 나라에서는 종종 죽음으로 문제는 묻히고 더 큰 거짓말로서 보존되어 왔다.
이 죽음의 문화는 1869년에 세워진 야스쿠니 신사에 이르러 정점을 차지한다. 일본을 위해 싸우다 죽은 군인들부터 2차대전 때 죽은 250여만 명의 혼백이 신으로 모셔진 것이다. 죽어서 신이 된다는 명예 앞에서 전쟁에서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였다.
문학평론가인 저자는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하여 ‘치유와 단독자, 힐링의 문학’이라 평하고 있다. 1960년대 후반 일본에서 진행되었던 진보 운동은 실패로 남았고, 그 실패로 생긴 결핍과 결여 속에서 발표된 《노르웨이의 숲》은 곧 치유와 힐링의 대상이 되었다. 하루키의 소설은 마취제, 콜라, 비타민이 된다. 특히 상처를 확인하고 넘어서는 과정은 독자의 마음을 울린다. 최근에 와서는 일본인이 제대로 조우하지 못하는 역사적인 죄의식과 아픔 앞에 서게 하고, 치유의 기회를 부여한다. 일본의 소설가 요시모토 바나나가 자신이 소설을 쓰는 이유에 대해 자실을 막기 위함이라고 한 것처럼, 하루키의 소설 역시 진실이 무엇인지 헷갈려 하는 그들을 치유하는 도구가 된다.
하루키의 문학에서 뚜렷하게 돋보이는 주제는 단독자(Singularity)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실패로 인하여 죽음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외롭고 고독하더라도 혼자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깊이 접근한다. 영리하고 빈틈없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잘 계산된 놀이공원을 연상시키지만, 죽음이 아닌 치유와 힐링으로 공감받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수치의 문화
부끄러움은 무사들을 용감하게 만들었고, 명예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게 만들었다


일본인은 ‘스마마셍〔済みません〕’이라는 말을 참 많이 쓴다. 이 말은 일본인의 부끄러움의 미학을 대변하는 일상적인 용어이다. 미안해하거나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일본인들에게 보편화되어 아예 육체화되어 있다. 서구의 문화인류학자들은 이런 부끄러움의 미학을 일본인만의 특징으로 보곤 하지만, 사실 동양에 널리 퍼져 있는 일반적인 특성이자, 유교권의 국가에서는 하나의 덕목이기도 하다. 다만, 일본만의 특징은 부끄러움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는 극한의 정서에 있다.
일본인의 부끄러움을 만들어내는 핵심을 논할 때, 전통적인 일본 문화론에 따르면 일본인의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특성은 집단주의다. 가령, 서양의 죄의 문화에 대별되는 일본인의 ‘부끄러움의 문화’, 계급적인 사회를 뜻하는 ‘종적 사회’, 응석부림을 뜻하는 ‘아마에〔甘え〕문화’, 철저한 동료의식이 형성되어야 함께 일하는 ‘나카마〔中間〕의식’, ‘일본의 특수한 집단주의를 강조해서 말하는 ‘집단아(集團我)’라는 개념 등이 사실은 모두 집단주의와 연결되어 있다. 이 집단주의를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무사도(武士道)’이다. 무사가 명예스럽게 사는 길은 “수치를 당하지 않는 것”이다. 명예란 곧 수치스럽지 않은 것이고, 불명예란 수치스러운 것이다.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면 차라리 스스로 배를 가르는 ‘하라키리〔腹’切り〕를 택했다.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무사들을 용감하게 만들었고, 명예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행동을 만들었다. 그것이 일본인들에게 일반화되면서 태평양전쟁 때 군국주의와 만났을 때는 살아 있는 부끄러움보다 죽음을 택하는, 그들 말로 ‘옥쇄(玉碎)’라는 ‘명예로운 길’을 택하게 만들었다.
일본인이 사죄를 모르는 배경에도 수치의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태평양전쟁 때 군인 위안부 등에 대하여 다른 나라 사람들이 ‘죄’라고 생각할 때, 일본의 정치인들 혹은 일본이라는 ‘국가주의’를 강하게 강조하고자 하는 이들은 이런 일들을 ‘수치’로 파악한다. 이런 불명예를 스스로 인정할 수 없으니 숨기거나 왜곡하고 싶어한다.


야스쿠니 신사
미화된 민족적 자존심에 묻는다


야스쿠니〔靖國〕신사에 진열되어 있는 정로환(征露丸). 이 약의 역사는 1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4~5년에 벌어졌던 러일전쟁 때, 물이 안 맞아 일본 병사들은 전쟁을 하던 중에 복통을 참아야 했다. 이 때 강력한 살균력을 지닌 크레오소트를 주성분으로 하는 정로환은 병사들의 배를 치료해주는 신의 약이 되었다. 정로환은 말 그대로 러시아를 정복하는 알약이었다. 아직도 일본은 러일전쟁을 조국방위전쟁이라 설명한다. 아시안을 백인 인종주의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이었다는 왜곡 아래 정로환은 야스쿠니 신사에 진열되어 있다.
야스쿠니, 이 말은 ‘평화로운 국가’라는 뜻이다. 일본어 사전을 보면, ‘나라도 진정(鎭定)할 힘’이라고 짧게 나와 있다. 진정이란 말은, ‘눌러 조용하게 만들다’란 뜻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과 세계를 눌러 조용하게 만들어버리는 상징물인 것이다. 이 신전을 만든 메이지 천황은 평화를 꿈에도 그리워하며 15년 전쟁을 일으켰고, 히로히토 천황은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전쟁에서 앞장섰던 군국주의자들이 그대로 있기 때문에 반성하지 않는다. 반성하면 앞선 정권을 전부 부정하는 모순이 생기기에, 진정한 반성은 불가능하다.
야스쿠니 신사에 가면 유슈칸〔遊就館〕이라는 전시관이 있다. 유슈칸의 입구에는 한 인물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 1835~1867〕의 초상화다. 막부(幕府)가 설립되고 엄격한 신분 구조로 나뉘어져 있던 무렵, 료마는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넓은 시야를 갖고 원활하게 정권교체를 실현시켰다. 사카모토 료마를 일본인의 뇌리에 각인시킨 사람은 시바 료타로이다. 그가 쓴 《료마가 간다》는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일본인에게 잃었던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시켜 주었고 시바 료타로는 ‘국민작가’의 반영에 올랐다. 유슈칸 입구를 장식하는 사카모토 료마의 의미는 곧 ‘시바 사관’에 있다. 이는 ‘자유주의 사관’과 《새로운 역사 교과서》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법가의 나라인 일본은 성공했고, 유교의 나라 중국과 한국은 대정체를 겪고 있다는 생각, 이른바 시바 료타로의 자세는 ‘일본판 오리엔탈리즘’에 지나지 않다. 국가주의는 이들이 말할 때 ‘민족적 자존심’이지만, 타자로서 볼 때는 배타주의 혹은 선민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첫째, 우리는 사실에 근거한 판단에 기초한 ‘사실적인 자존심’이냐 하는 잣대를 물어야 할 것이다. 둘째, 그것이 이웃 나라와 더불어 역사의 미래를 위한 ‘공생의 자존심’이냐 하는 문제를 문제를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야스쿠니 신사의 민족적 자존심은 두 가지 모두에게서 빗겨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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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희

@jinnwxy

일본에 대해 굉장히 깊게 알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책 한 권으로 한 나라를 이해하기는 어렵겠지만 이 책은 충분히 그렇게 표현해도 되겠다고 생각한다. 일본 특유의 와비사비 문화나 축제 문화같은 가벼운 일본의 모습부터, 속 깊숙이 마그마가 끓고 있는 듯한 정치 문제와 야스쿠니 신사, 고이즈미 총리같은 쓰레기 사상들도 제대로 간파할 수 있었다. 학교에서 배우던 일본보다 더 적나라하고 상세하게 알게 되어 더욱 분노하기도 했다. 일본은 정말 멀고도 가까운 나라구나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공생의 의미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되짚어보게 되었다.

일본적마음

김응교 지음
책읽는고양이 펴냄

👍 떠나고 싶을 때 추천!
2021년 7월 9일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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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han Kim

@vtdimuec1uqk

'적'이란 표현이 일본어 잔재여서 될 수 있으면 쓰지 말라는 책을 며칠 전에 읽었는데 책 제목이 <일본적 마음>이다. 너무나 '일본적'이 아닌가 반감도 조금 생기지만 <일본의 마음>으로 번역된 책도 있어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자. 책 제목부터 시비를 걸었지만 이 책은 일본에 학자, 그리고 시인으로 살고 있는 저자의 담백한 일본 인문에세이다. 한 손에 들어오는 아담한 책 크기에 단락마다 길이도 적당해 리듬감있게 읽힌다. 일본 문화, 예술, 사무라이 중심의 전통, 야스쿠니 신사로부터 일본사와 한일관계에 이르기까지 주제도 폭넓다. 일반 여행서처럼 가볍지도 않고 너무 많은 지식을 쏟아내어 거부감이 들게하지도 않아 좋다.

형식만 유난히 강조되는 줄 알았던 일본 다도가 조금 모자란 가운데 마음의 충족과 심오함을 찾는 '와비사비'를 근본으로 하는 일본을 대표하는 첫번째 문화중 하나라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았다. 도쿄 어느 공원에서 징그럽게 많은 까마귀를 경험했지만 일본 축구 대표팀 문장에까지 쓰이는 줄도 처음 알았다. 승리의 행운을 안기는 길조를 넘어 기적을 가져온다는 신성한 의미까지 부여 받는 것이 일본의 까마귀다. 좀 더 이야기하면 축구대표팀의 승리를 기원하는 까마귀는 발이 세 개다. '삼족오'. 일본의 시, 하이쿠와 유럽의 일본 열풍을 불러온 그림, 우키요에에 대해서도 이 책은 초급 안내서 역할을 훌륭하게 해낼 만하다.

오랜 시간 일본에서 몸소 느끼고 일본인과 교류했던 지식을 풀어 놓아 더욱 믿음이 간다. 게다가 사무라이 문화나, 배경 설명을 위한 역사 서술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면서도 필요한 정보들은 담았다. 그 페이지만 따로 복사해 두고 싶을 정도다. 억울하게 죽은 주군에 대한 의리로 복수하되, 그것이 쇼군이 정한 규율 위반임을 받아들여 할복하는 47인의 사무라이 이야기, '츄신구라'도 일본의 (또는 일본적) 마음을 이해하는데 필수일 것이다.

올해 일본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 전반에서 교양으로서 공부를 시작하려 하는데 좋은 안내서임에 틀림없다.

일본적마음

김응교 지음
책읽는고양이 펴냄

읽었어요
2019년 6월 17일
0
아쿠님의 프로필 이미지

아쿠

@2ds8g675dshh

일본 문화를 다양한 관점으로 풀어나간 책 초반에 취향이 안맞음에도 읽기 좋은 문체와 적절한 사진등으로 잘보게 만들었음 다만 역시 후반갈수록 취향이 안맞다보니 음...역시 난 에세이는 안맞는듯...이것도 랜덤책의 묘미겠지

일본적마음

김응교 지음
책읽는고양이 펴냄

2018년 8월 8일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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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이 책은 아시아적 관점에서 일본 문화와 그들의 정체성을 관찰하고 연구한 인문에세이다.
지진이 난무하는 섬나라 일본, 폐쇄된 곳에서 그저 숙명을 받아들이는 데 익숙한 민초들과 막강한 무사의 나라. 이 속에서 깊게 뿌리 내린 ‘체념’, ‘집단주의’, ‘부끄러움과 수치’, ‘죽음’의 문화를 통해 문학평론가인 저자는 오늘의 일본을 읽고, 비평의 글을 써내려간다.
일찍이 미국인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가 제2차 세계대전 중 적국인 일본의 이중성에 대해 《국화와 칼》로서 비판했다면, 이 책은 한국인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더 나아가 제국주의 일본으로부터의 반성을 요구하는 아시아인이라면 짚고 넘어가야 할 일본의 민낯을 찾아가는 안내서이다.

왜 일본사람은 찬란한 벚꽃을 보며 죽음을 떠올리는가.
왜 단순하고 밋밋한 내용의 영화 '철도원'을 보며 한없이 눈물흘리나.
"잇쇼켄메이" 왜 일본사람들은 사소한 일조차 목숨걸고 하겠다고 습관처럼 말하며,
어째서 대를 잇는 장인이 많을까.
하루키는 일본인의 무엇을 대변하는가
야스쿠니 신사, 그들은 어떻게 신을 만들었고, 왜 반성을 모르는가.


체념의 문화
피할 수 없을 때, 단 하나의 선택은 받아들임 뿐


받아들이기 어려운 대상이 자기 문화 속에 들어왔을 때 ‘숙명’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일본인의 생활방식 중 하나다. 지진 같은 재해의 비극도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폐쇄된 좁은 공간에서 어떤 숙명도 피할 수 없을 때, 단 하나의 선택은 ‘받아들임’인 것이다. 어느 나라보다 많이 발달되어 있는 괴기담 시리즈도 일본의 이런 특성에 기반한다. ‘무섭다’는 호기심이 일상에 스며든 결과이다. 헤어질 때 쓰는 인사말인 ‘사요나라〔左?なら〕’라는 말 속에도 체념의 철학이 깔려 있다. ‘사요’는 즉 ‘그렇다면’ 일 뿐이다. ‘현실이 그렇다면 그대로 이 사실을 솔직히 받아들여 헤어집시다’ 라는 의미인 것이다.
에도 시대의 화가 호쿠사이가 그린 「후카쿠 36경」을 보면, 후지산도 삼킬 듯이 덤벼드는 파도에 마구 흔들리는 세 척의 생선잡이 배가 있다. 배에 탄 사공들은 피할 수 없는 거센 파도 앞에 납작 엎드려 있다. 거역할 수 없는 운명을 대하는 자세다. 이런 풍경은 자연과 재해에 맞대응하는 일본인의 집단심리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오늘날 이들의 집단정신을 엿볼 수 있는 것은 마을축제인 마쓰리(祭り)다. 일본인 스스로도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이 흥분의 공통분모는 하나의 제의가 주는 동질성의 힘, 피의 힘이다. 1억의 수다스러움은 미코시〔神輿 : 가마, 수레〕로 상징되는 집단정신으로 모아진다. 한편, 집단적인 힘이 자신들의 울타리를 벗어났던 지난 날, 무시무시한 이기와 차별의 결과를 낳았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죽음의 문화
목숨 걸고 일하고 죽음은 가볍게


지진이 빈번한 일본이란 땅은 죽음과 친해질 수밖에 없는 자연적 배경이다. 그래서일까. 일본 사람들은 눈부시게 만개한 벚꽃을 보면서도 죽음을 생각한다.

사쿠라가 만발할 때 술 한 잔 들고
사쿠라가 질 때 함께 죽노라
(하이쿠의 한 구절)

죽음의 문화를 확고히 다져놓은 것은 사무라이 문화다. 사무라이는 ‘배를 주릴망정 명예에 죽고 사는 것’을 좌우명으로 삼는다. 사무라이 문화, 곧 칼의 문화는 오늘날까지도 변용되어 곳곳에 스며 있다. ‘잇쇼켄메이(一生縣命)’라는 말은 한국말로 의역하면 ‘열심히’라는 뜻이다. 원래는 ‘주군의 영지를 목숨을 걸고 지킨다는 말’이었는데, 그게 더 확실하게 ‘자신의 생명을 걸고 열심히 일한다’로 바뀌어 사용된다. 전국시대 때, 한 영주의 밥에서 머리카락 한 올이 나왔을 때, 벼락 같은 소리가 떨어지자마자 요리사의 머리가 베어졌다는 말이 진짜처럼 전해져 내려온다. 어찌 밥 한 그릇에 목숨을 걸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잇쇼켄메이’는 오늘날 그 장소가 회사든 학교든 가정이든 공장이든 목숨을 걸고 일한다는 의미가 되었다.
일상적으로 봐도 죽음에 대한 이해에는 차이가 있다. 서양에서 죽음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이미지를 갖고 있다. 한국의 경우는 최소한 원래의 장소로 돌아간다는 의미가 있다. 반면 일본인은 사망을 ‘나쿠나루모노〔失亡 : 없어지는 것〕’라고 한다. 그야말로 끝나는 것이다.
일본 문화물의 클라이맥스는 종종 ‘아름다운 죽음’으로 미화되곤 한다. 아름답게 미화된 죽음, 큰 것을 위해서는 죽어도 된다는 생각이 이들이 만든 문화물 곳곳에 스며 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일상에서 문제 해결의 한 방법으로 자살을 택한다. 이렇게 일본이라는 나라에서는 종종 죽음으로 문제는 묻히고 더 큰 거짓말로서 보존되어 왔다.
이 죽음의 문화는 1869년에 세워진 야스쿠니 신사에 이르러 정점을 차지한다. 일본을 위해 싸우다 죽은 군인들부터 2차대전 때 죽은 250여만 명의 혼백이 신으로 모셔진 것이다. 죽어서 신이 된다는 명예 앞에서 전쟁에서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였다.
문학평론가인 저자는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하여 ‘치유와 단독자, 힐링의 문학’이라 평하고 있다. 1960년대 후반 일본에서 진행되었던 진보 운동은 실패로 남았고, 그 실패로 생긴 결핍과 결여 속에서 발표된 《노르웨이의 숲》은 곧 치유와 힐링의 대상이 되었다. 하루키의 소설은 마취제, 콜라, 비타민이 된다. 특히 상처를 확인하고 넘어서는 과정은 독자의 마음을 울린다. 최근에 와서는 일본인이 제대로 조우하지 못하는 역사적인 죄의식과 아픔 앞에 서게 하고, 치유의 기회를 부여한다. 일본의 소설가 요시모토 바나나가 자신이 소설을 쓰는 이유에 대해 자실을 막기 위함이라고 한 것처럼, 하루키의 소설 역시 진실이 무엇인지 헷갈려 하는 그들을 치유하는 도구가 된다.
하루키의 문학에서 뚜렷하게 돋보이는 주제는 단독자(Singularity)에 대한 깊은 성찰이다. 실패로 인하여 죽음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외롭고 고독하더라도 혼자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깊이 접근한다. 영리하고 빈틈없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잘 계산된 놀이공원을 연상시키지만, 죽음이 아닌 치유와 힐링으로 공감받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수치의 문화
부끄러움은 무사들을 용감하게 만들었고, 명예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게 만들었다


일본인은 ‘스마마셍〔済みません〕’이라는 말을 참 많이 쓴다. 이 말은 일본인의 부끄러움의 미학을 대변하는 일상적인 용어이다. 미안해하거나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일본인들에게 보편화되어 아예 육체화되어 있다. 서구의 문화인류학자들은 이런 부끄러움의 미학을 일본인만의 특징으로 보곤 하지만, 사실 동양에 널리 퍼져 있는 일반적인 특성이자, 유교권의 국가에서는 하나의 덕목이기도 하다. 다만, 일본만의 특징은 부끄러움보다는 차라리 죽음을 택한다는 극한의 정서에 있다.
일본인의 부끄러움을 만들어내는 핵심을 논할 때, 전통적인 일본 문화론에 따르면 일본인의 인간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특성은 집단주의다. 가령, 서양의 죄의 문화에 대별되는 일본인의 ‘부끄러움의 문화’, 계급적인 사회를 뜻하는 ‘종적 사회’, 응석부림을 뜻하는 ‘아마에〔甘え〕문화’, 철저한 동료의식이 형성되어야 함께 일하는 ‘나카마〔中間〕의식’, ‘일본의 특수한 집단주의를 강조해서 말하는 ‘집단아(集團我)’라는 개념 등이 사실은 모두 집단주의와 연결되어 있다. 이 집단주의를 만드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바로 ‘무사도(武士道)’이다. 무사가 명예스럽게 사는 길은 “수치를 당하지 않는 것”이다. 명예란 곧 수치스럽지 않은 것이고, 불명예란 수치스러운 것이다. 수치스러운 일을 당하면 차라리 스스로 배를 가르는 ‘하라키리〔腹’切り〕를 택했다.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은 무사들을 용감하게 만들었고, 명예를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행동을 만들었다. 그것이 일본인들에게 일반화되면서 태평양전쟁 때 군국주의와 만났을 때는 살아 있는 부끄러움보다 죽음을 택하는, 그들 말로 ‘옥쇄(玉碎)’라는 ‘명예로운 길’을 택하게 만들었다.
일본인이 사죄를 모르는 배경에도 수치의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태평양전쟁 때 군인 위안부 등에 대하여 다른 나라 사람들이 ‘죄’라고 생각할 때, 일본의 정치인들 혹은 일본이라는 ‘국가주의’를 강하게 강조하고자 하는 이들은 이런 일들을 ‘수치’로 파악한다. 이런 불명예를 스스로 인정할 수 없으니 숨기거나 왜곡하고 싶어한다.


야스쿠니 신사
미화된 민족적 자존심에 묻는다


야스쿠니〔靖國〕신사에 진열되어 있는 정로환(征露丸). 이 약의 역사는 1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04~5년에 벌어졌던 러일전쟁 때, 물이 안 맞아 일본 병사들은 전쟁을 하던 중에 복통을 참아야 했다. 이 때 강력한 살균력을 지닌 크레오소트를 주성분으로 하는 정로환은 병사들의 배를 치료해주는 신의 약이 되었다. 정로환은 말 그대로 러시아를 정복하는 알약이었다. 아직도 일본은 러일전쟁을 조국방위전쟁이라 설명한다. 아시안을 백인 인종주의에서 해방시키기 위한 전쟁이었다는 왜곡 아래 정로환은 야스쿠니 신사에 진열되어 있다.
야스쿠니, 이 말은 ‘평화로운 국가’라는 뜻이다. 일본어 사전을 보면, ‘나라도 진정(鎭定)할 힘’이라고 짧게 나와 있다. 진정이란 말은, ‘눌러 조용하게 만들다’란 뜻이다. 야스쿠니 신사는 일본과 세계를 눌러 조용하게 만들어버리는 상징물인 것이다. 이 신전을 만든 메이지 천황은 평화를 꿈에도 그리워하며 15년 전쟁을 일으켰고, 히로히토 천황은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일본은 전쟁에서 앞장섰던 군국주의자들이 그대로 있기 때문에 반성하지 않는다. 반성하면 앞선 정권을 전부 부정하는 모순이 생기기에, 진정한 반성은 불가능하다.
야스쿠니 신사에 가면 유슈칸〔遊就館〕이라는 전시관이 있다. 유슈칸의 입구에는 한 인물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 : 1835~1867〕의 초상화다. 막부(幕府)가 설립되고 엄격한 신분 구조로 나뉘어져 있던 무렵, 료마는 일본의 근대화를 이끈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넓은 시야를 갖고 원활하게 정권교체를 실현시켰다. 사카모토 료마를 일본인의 뇌리에 각인시킨 사람은 시바 료타로이다. 그가 쓴 《료마가 간다》는 제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일본인에게 잃었던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시켜 주었고 시바 료타로는 ‘국민작가’의 반영에 올랐다. 유슈칸 입구를 장식하는 사카모토 료마의 의미는 곧 ‘시바 사관’에 있다. 이는 ‘자유주의 사관’과 《새로운 역사 교과서》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법가의 나라인 일본은 성공했고, 유교의 나라 중국과 한국은 대정체를 겪고 있다는 생각, 이른바 시바 료타로의 자세는 ‘일본판 오리엔탈리즘’에 지나지 않다. 국가주의는 이들이 말할 때 ‘민족적 자존심’이지만, 타자로서 볼 때는 배타주의 혹은 선민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이에 첫째, 우리는 사실에 근거한 판단에 기초한 ‘사실적인 자존심’이냐 하는 잣대를 물어야 할 것이다. 둘째, 그것이 이웃 나라와 더불어 역사의 미래를 위한 ‘공생의 자존심’이냐 하는 문제를 문제를 따져보아야 할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야스쿠니 신사의 민족적 자존심은 두 가지 모두에게서 빗겨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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