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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
두꺼운 책
출간일
2013.12.12
페이지
480쪽
상세 정보
지식을만드는지식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이로 추천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석을 덧붙였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잡았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다.
여기 한 시인이 있다.
그는 일제 식민 통치기 중후반기의 조선 문단을 배경으로 활동을 하다가 분단을 겪으며 문학인으로서의 정체성에 심한 교란을 겪게 된다. 당시 모든 문학인이 그러했듯이 그 또한 정치적 판단과 선택이라는 가파른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청년 시절 수년간 서울 문단에서 활동했던 경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 후 만주 일대를 유랑민처럼 떠돌면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부유적(浮游的) 삶을 살았다. 그러한 와중에서 해방이 되었고, 조국은 정치적 이념과 지향을 달리하는 두 체제로 분단되었다. 그의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 한반도의 관서 지역이었다. 시인의 부모 형제와 일가친척 모두가 고향 부근에서 살았다. 시인 또한 떠돌이 생활을 정리하면서 고향 가까이서 살고 싶었을 것이다. 굳이 서울로 월남해 내려올 만한 어떤 정치적 신념이나 노선이 별도로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해방 이후 북쪽에 수립되었던 공산주의 정권 치하에서 그는 한 사람의 주민으로서 당시 사회의 중심권으로 진입하지 않고 비교적 온건하고 소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가 한때 거주했던 한반도의 남쪽 지역에서는 완전히 잊힌 시인이 되었다. 우리는 이를 일러 문학사에서의 매몰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다가 1987년 서울에서 분단 시기까지의 그의 작품을 모은 시 전집이 발간되었다. 이후로 그는 남한의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인으로 화려하게 되살아났다. 그의 이름은 백석(白石, 1912∼1995)이다.
이제는 백석 시인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백석은 인기 시인의 반열에 올라 있다. 오죽하면 젊은 시인들조차도 문학 수업기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받았던 시인의 한 사람으로 단연 백석을 일컬을 정도로 백석 문학의 감화력과 영향력은 이미 객관적 검증을 받은 상태다.
백석의 시는 시간이 지나도 그 특유의 신선함과 발랄함, 그윽함과 도란거림의 예술적 음영과 세력이 전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특이한 효과로 점차 확장되어 간다. 이러한 확장과 보편화가 주는 놀라움의 근원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오로지 백석 문학이 가장 주안점을 두었던 민족적 전통성이라는 가치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서양 문학(영문학)을 전공했거나 혹은 강의를 들었던 시인들이 대개 서양 문학의 방법론이나 그 분위기에 심취해서 단순 추종자나 그 에피고넨이 되기가 십상인데 한국 문학사에서는 특이한 세 시인이 그 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들은 김소월, 정지용, 백석이다. 서양 문학을 공부한 경험을 가졌으면서도 오히려 그들은 민족의 전통이라는 후미진 뒷골목으로 돌아들었던 것이다.
일본 아오야마학원 영문과에 재학하며 영미 문학에 관한 지식과 교양을 충분히 습득했던 백석이 어떻게 민족적 전통이라는 가치관 쪽으로 확연히 돌아앉아 시 창작의 중요 테마로 떠올리며 애착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인가? 백석의 시는 모더니즘을 통해 창작 방법론을 익혔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모더니즘이 지닌 한계와 제한성을 비판하고 극복하는 방법으로 변화를 주었다. 이러한 작업은 식민지 자본주의가 드러내고 있던 여러 부정적 파괴적 징후를 시인이 매우 침통한 표정으로 응시하며 고뇌하는 활동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백석의 문학 세계가 나타내는 전통성의 다양한 갈래와 그 의미에 대해 낱낱이 점검하고 확인해 보면 시인 백석이 식민지라는 정치적 문화적 폐쇄 공간 속에서 문명과 반문명에 관한 시적 담론을 지속적으로 펼치는 작업에 몰두했다는 점이 명확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일관된 노력에 힘을 쏟은 것이 당시 시인이 품고 있었던 일정한 비평적 의도의 반영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문명과 반문명이라는 대립항에서 일제가 그토록 자부심과 우월감을 가졌던 문명이야말로 가장 극단적이고 전형적인 반문명이었다는 사실을 백석 시인은 강조하고자 했다. 이와 더불어 한국인의 문화적 전통이야말로 상대적 제국주의문화를 압도하고 진정한 문명으로 힘차게 나아가는 길이었음을 시인은 작품을 통해 역설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세정보
지식을만드는지식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은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하고 각각의 작가에 대해 권위를 인정받은 평론가들을 엮은이로 추천했다. 엮은이는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석을 덧붙였다.
각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잡았다. 단, 띄어쓰기는 읽기 편하게 현대의 표기법에 맞춰 고쳤다.
여기 한 시인이 있다.
그는 일제 식민 통치기 중후반기의 조선 문단을 배경으로 활동을 하다가 분단을 겪으며 문학인으로서의 정체성에 심한 교란을 겪게 된다. 당시 모든 문학인이 그러했듯이 그 또한 정치적 판단과 선택이라는 가파른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청년 시절 수년간 서울 문단에서 활동했던 경력이 있었다. 하지만 그 후 만주 일대를 유랑민처럼 떠돌면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부유적(浮游的) 삶을 살았다. 그러한 와중에서 해방이 되었고, 조국은 정치적 이념과 지향을 달리하는 두 체제로 분단되었다. 그의 고향은 평안북도 정주, 한반도의 관서 지역이었다. 시인의 부모 형제와 일가친척 모두가 고향 부근에서 살았다. 시인 또한 떠돌이 생활을 정리하면서 고향 가까이서 살고 싶었을 것이다. 굳이 서울로 월남해 내려올 만한 어떤 정치적 신념이나 노선이 별도로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해방 이후 북쪽에 수립되었던 공산주의 정권 치하에서 그는 한 사람의 주민으로서 당시 사회의 중심권으로 진입하지 않고 비교적 온건하고 소극적인 삶을 살았다. 그가 한때 거주했던 한반도의 남쪽 지역에서는 완전히 잊힌 시인이 되었다. 우리는 이를 일러 문학사에서의 매몰 현상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다가 1987년 서울에서 분단 시기까지의 그의 작품을 모은 시 전집이 발간되었다. 이후로 그는 남한의 문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인으로 화려하게 되살아났다. 그의 이름은 백석(白石, 1912∼1995)이다.
이제는 백석 시인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백석은 인기 시인의 반열에 올라 있다. 오죽하면 젊은 시인들조차도 문학 수업기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받았던 시인의 한 사람으로 단연 백석을 일컬을 정도로 백석 문학의 감화력과 영향력은 이미 객관적 검증을 받은 상태다.
백석의 시는 시간이 지나도 그 특유의 신선함과 발랄함, 그윽함과 도란거림의 예술적 음영과 세력이 전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특이한 효과로 점차 확장되어 간다. 이러한 확장과 보편화가 주는 놀라움의 근원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오로지 백석 문학이 가장 주안점을 두었던 민족적 전통성이라는 가치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서양 문학(영문학)을 전공했거나 혹은 강의를 들었던 시인들이 대개 서양 문학의 방법론이나 그 분위기에 심취해서 단순 추종자나 그 에피고넨이 되기가 십상인데 한국 문학사에서는 특이한 세 시인이 그 반대의 길을 걸었다. 그들은 김소월, 정지용, 백석이다. 서양 문학을 공부한 경험을 가졌으면서도 오히려 그들은 민족의 전통이라는 후미진 뒷골목으로 돌아들었던 것이다.
일본 아오야마학원 영문과에 재학하며 영미 문학에 관한 지식과 교양을 충분히 습득했던 백석이 어떻게 민족적 전통이라는 가치관 쪽으로 확연히 돌아앉아 시 창작의 중요 테마로 떠올리며 애착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인가? 백석의 시는 모더니즘을 통해 창작 방법론을 익혔음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모더니즘이 지닌 한계와 제한성을 비판하고 극복하는 방법으로 변화를 주었다. 이러한 작업은 식민지 자본주의가 드러내고 있던 여러 부정적 파괴적 징후를 시인이 매우 침통한 표정으로 응시하며 고뇌하는 활동과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백석의 문학 세계가 나타내는 전통성의 다양한 갈래와 그 의미에 대해 낱낱이 점검하고 확인해 보면 시인 백석이 식민지라는 정치적 문화적 폐쇄 공간 속에서 문명과 반문명에 관한 시적 담론을 지속적으로 펼치는 작업에 몰두했다는 점이 명확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일관된 노력에 힘을 쏟은 것이 당시 시인이 품고 있었던 일정한 비평적 의도의 반영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문명과 반문명이라는 대립항에서 일제가 그토록 자부심과 우월감을 가졌던 문명이야말로 가장 극단적이고 전형적인 반문명이었다는 사실을 백석 시인은 강조하고자 했다. 이와 더불어 한국인의 문화적 전통이야말로 상대적 제국주의문화를 압도하고 진정한 문명으로 힘차게 나아가는 길이었음을 시인은 작품을 통해 역설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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