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가네코 후미코 지음 | 이학사 펴냄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일본 제국을 뒤흔든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 옥중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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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2012.4.10

페이지

366쪽

상세 정보

박열의 동지이자 아내이며 조선을 사랑하고 일본 제국에 맞선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의 옥중 수기집이다. 이 옥중 수기는 재판에 참고가 될 만한 과거 경력을 써 내라는 예심판사 다테마쓰의 명령에 따라 가네코 후미코가 쓴 그녀의 일대기이다. 가네코 후미코는 재판이 모두 끝난 후 판사로부터 수기를 돌려받고, 이를 동지인 구리하라 가즈오에게 보내, 구리하라가 그녀의 사후 5주년을 맞아 출간함으로써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가네코 후미코의 말대로, 단 한 점의 거짓도 없이 그녀의 모든 생활을, 전 생애를 있는 그대로 고백한 기록으로 그녀가 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선물이며 유작이다. 공부를 매우 잘했고 머리가 좋았던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 수기 전체에 걸쳐서 비상한 기억력과 문재 넘치는 묘사력으로 20세기 초반의 일본과 조선의 다양한 풍경과 생활상을 그리고 있다. 이 수기를 편집한 구리하라는 서문에서 "아마 누구라도 눈물 없이는 읽기 힘들 이 수기를 전국의 뜻있는 독자들에게 보내고 싶다."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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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무엇이 후미코라는 사람을 만들었는지
알게해 준 책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가네코 후미코 지음
이학사 펴냄

2019년 7월 2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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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In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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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가네코 후미코 지음
이학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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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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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박열의 동지이자 아내이며 조선을 사랑하고 일본 제국에 맞선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의 옥중 수기집이다. 이 옥중 수기는 재판에 참고가 될 만한 과거 경력을 써 내라는 예심판사 다테마쓰의 명령에 따라 가네코 후미코가 쓴 그녀의 일대기이다. 가네코 후미코는 재판이 모두 끝난 후 판사로부터 수기를 돌려받고, 이를 동지인 구리하라 가즈오에게 보내, 구리하라가 그녀의 사후 5주년을 맞아 출간함으로써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가네코 후미코의 말대로, 단 한 점의 거짓도 없이 그녀의 모든 생활을, 전 생애를 있는 그대로 고백한 기록으로 그녀가 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선물이며 유작이다. 공부를 매우 잘했고 머리가 좋았던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 수기 전체에 걸쳐서 비상한 기억력과 문재 넘치는 묘사력으로 20세기 초반의 일본과 조선의 다양한 풍경과 생활상을 그리고 있다. 이 수기를 편집한 구리하라는 서문에서 "아마 누구라도 눈물 없이는 읽기 힘들 이 수기를 전국의 뜻있는 독자들에게 보내고 싶다."라고 말한다.

출판사 책 소개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는
- 박열(朴烈)의 동지이자 아내로서 일본 제국을 뒤흔든 '아나키스트'다.
- 일본의 천황제와 대결하고 잘못된 기존 제도, 관습과 투쟁하여 독자적인 사상을 형성하고 근대를 넘어설 수 있는 관점을 구축한 '전사'다.
- '대역죄'로 복역하다가 23살 꽃다운 나이에 감옥에서 죽은 '자율적인 개인'이자 '꿈꾸는 젊은이', '아픈 청춘'이다.

1. '가네코 후미코'는 누구인가

가네코 후미코는 우리에게는 비교적 낯선 인물이다. 그러나 그녀는 박열의 동지이자 아내이며 조선을 사랑하고 일본 제국에 맞선 아나키스트로서 제법 알려져 있기도 하다.
1903년 일본 요코하마 시에서 태어난 가네코 후미코는 9살이 될 때까지 무적자였다. 말하자면 천황제 국가의 가족제도의 희생자로서 무적자이자 여성이라는 이중의 억압으로 삶을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억압과 고난은 유년시절과 조선의 고모 집에서 보낸 7년에 걸친 고통스러운 시간, 그리고 일본으로 돌아와서도 계속된다.
가네코 후미코는 열일곱 살 되던 1920년 봄에 도쿄로 혼자 올라와, 신문팔이, 가루비누 행상, 식모살이, 식당 종업원 등을 하며 공부를 한다. 가네코 후미코가 자신을 발견하고 사회주의사상에 눈뜨기 시작한 것은 고학을 하며 사회주의자와 아나키스트를 만나면서부터였다. 특히 조선인 '주의자들'(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자가 섞여 있었다)과의 만남이 그녀의 사상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조선에서 생활한 경험이 있는 그녀는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물로서 고통 받는 식민지 조선인과 가족제도의 희생물로서 노예처럼 살아온 자신을 동일하게 파악하고 그 정점이 천황제라고 인식하며, 천황제와 대결하기 시작한다. 또한 그녀는 이때 베르그손, 스펜서, 헤겔 등을 읽고, 특히 슈티르너, 니체 등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가네코 후미코는 1922년 봄부터 아나키스트 박열과 동거를 하며 함께 투쟁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박열과 함께 한인 사상 단체의 효시로 평가되는 흑도회의 기관지 『흑도』 창간호와 2호를 1922년 7월과 8월에 발간하고, 이어 박열과 함께 아나키스 단체 흑우회를 결성한다. 11월에는 박열과 함께 『후데이센징』을 창간하고 1923년 6월까지 4호를 발간한다(3호와 4호는 『현사회』로 개제). 그리고 1923년 4월 박열과 함께 대중 단체 불령사를 조직한다. 가네코 후미코는 자신의 노예적인 삶을 거부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국가와 사회의 모순, 기존의 제도와 대결하면서 치열한 투쟁을 계속한 것이다.
1923년 9월 1일 간토대지진이 일어나자, 9월 3일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과 함께 검속된다. 1924년 초 예심 심문 과정에서 폭탄 입수 계획이 드러나자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대역죄'로 대심원으로 넘겨져 1926년 3월 25일 사형선고를 받는다. 열흘 뒤 '은사'에 의해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으나 7월 23일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에서 죽는다. 공식적으로는 '목매달아 죽었다'라고 하나 '타살 의혹'이 있으며 지금까지 정확한 사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그해 11월 5일 가네코 후미코의 유해가 박열의 선영(경북 문경)에 안장된다(2003년 11월 묘를 박열의사기념관 옆으로 이장).

2. "누구라도 눈물 없이는 읽기 힘들" 옥중 수기: 가난과 학대와 고난으로 점철된 가네코 후미코의 삶

이 옥중 수기는 재판에 참고가 될 만한 과거 경력을 써 내라는 예심판사 다테마쓰의 명령에 따라 가네코 후미코가 쓴 그녀의 일대기이다. 가네코 후미코는 재판이 모두 끝난 후 판사로부터 수기를 돌려받고, 이를 동지인 구리하라 가즈오에게 보내, 구리하라가 그녀의 사후 5주년을 맞아 출간함으로써 이 수기는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가네코 후미코의 말대로, 이 수기는 단 한 점의 거짓도 없이 그녀의 모든 생활을, 전 생애를 있는 그대로 고백한 기록으로 그녀가 이 세상에 남긴 유일한 선물이며 유품이다. 공부를 매우 잘했고 머리가 좋았던 가네코 후미코는 옥중 수기 전체에 걸쳐서 비상한 기억력과 문재 넘치는 묘사력으로 20세기 초반의 일본과 조선의 다양한 풍경과 생활상을 그리고 있다.
이 수기를 편집한 구리하라는 서문에서 "아마 누구라도 눈물 없이는 읽기 힘들 이 수기를 전국의 뜻있는 독자들에게 보내고 싶다."라고 말한다. 가네코 후미코가 얼마나 힘들게 세상을 살았기에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다고 할까.

[일본에서의 유년시절]
가네코 후미코는 아주 어렸을 때는 아버지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으나 부모의 사이가 나빠지면서 예닐곱 살 무렵부터 가난, 고통, 천대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아버지가 엄마를 호적에 올리지 않아 무적자(조선의 고모 집으로 오기 위해 외할아버지의 5녀로 입적하면서 무적자를 면한다)였던 가네코 후미코는 정식 학교도 제대로 가지 못하고 학교에 가서도 연필과 노트를 마련하지 못해 학교를 23일이나 쉬고, 선생님이 출석 확인 때 자신의 이름만 부르지 않고, 절도범으로 몰리는 등 갖은 괄시와 천대를 받는다. 또한 아버지가 이모와 몰래 정을 통해 집을 떠나간 후에는 가난한 생활이 극에 달해 엄마는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며 대장장이, 항구의 하역꾼(고바야시) 등과 동거를 하고, 급기야는 가네코 후미코를 창기로 팔려고 한다. 그후 엄마는 집세를 못내 야반도주를 하고, 결국은 먹고살 수가 없어 동거하던 고바야시의 고향 산골까지 밀려가서 갖은 고생을 한다. 거기서 반년 정도 산 가네코 후미코는 엄마와 함께 외갓집으로 돌아오지만, 엄마가 곧 재혼을 하여 엄마와 헤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다음 해에 가네코 후미코는 조선의 고모 집으로 가서 살게 된다.

[조선에서의 청소년 시절: 식모 생활]
가네코 후미코는 1912년 가을, 고모 집의 양녀가 될 것이라고 믿고 조선에 왔으나 오래지 않아 양녀에서 밀려나고 열두세 살 때부터는 사실상 식모로 전락하여 친할머니와 고모의 온갖 구박을 다 받으며 학교를 다니게 된다. 습자지나 그림물감 등 학교 준비물을 제대로 안 챙겨주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부엌일을 하다가 솥을 깨뜨렸다고 솥 값을 변상하게 하고, 정월 초에 떡국을 먹다가 할머니의 젓가락이 부러졌다고 집 밖으로 쫓아내고, 못사는 집 애와 학교 등하교하는 것을 금지시켰는데 말 안 듣고 함께 다녔다고 매타작을 한 후 헛간에 이틀이나 가두고, 그 일로 두 달이나 학교를 못 가게 한다. 또한 가네코 후미코는 한여름에 집에 다니러 온 할머니 친척의 애를 업고 그 친척 수행하는 것을 거절했다고 할머니에게 짓밟혀 집 밖으로 쫓겨나 이틀이나 먹지 못하고, 그 길로 자살을 결심하여 철길로, 강으로 내달렸으나 결국 자살을 포기한다. 학교에서는 운동이나 놀이를, 가정에서는 모든 자유를 빼앗긴 가네코 후미코는 급기야는 책을 읽고, 잡지와 신문을 보는 것마저 금지당한다. 이런 상황에서 열네 살에 고등소학교를 졸업한 가네코 후미코는 그로부터 일본으로 돌아올 때까지 2년 동안 하루 종일 할머니의 심술궂은 감시를 받으며 완전히 고모 집의 식모로 일한다.

[도쿄에서의 고학 시절]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으로 돌아와 외갓집과 아버지 집을 오가는 생활을 하다가 아버지와 여러 차례 충돌한 후 1920년 봄에 자신의 생활을 스스로 개척하고 창조하기 위하여 가족과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 당시에 '청춘의 꿈, 젊은이의 지상낙원'이라고 여겨지던 도쿄로 혼자 올라온다. 처음에 잠시 작은외할아버지 집에 있다가 독립하여 도쿄 우에노에 있는 신문 보급소에서 기숙하면서 신문을 팔고, 동시에 세이소쿠영어학교와 겐수학관을 다닌다. 그러나 신문팔이 고학은 너무 고된 노동이어서 공부가 안 되는 상황이었다. 결국 쫓겨나다시피 신문 보급소를 그만두고 친구의 소개로 도쿄 유시마의 신하나 초에 셋방을 얻어 살면서 가루비누 노점상과 행상을 한다. 그러나 가루비누 행상으로는 밥도 얻어먹기 힘들었다. 그래서 구세군 소대장의 소개로 사탕가게 집에서 연말까지 식모살이를 하고 식모살이를 하는 동안은 학교를 그만둔다. 그다음 해 초에 '주의자' 사이에서 2개월 정도 더부살이를 하다가 다시 작은외할아버지 집에서 집안일을 도우며 학교를 다닌다. 그해 11월 작은외할아버지 집을 나와 고치마치의 유라쿠 초에 있는 이와사키오뎅집(일명 '사회주의 오뎅')에서 일한다. 여기서 낮에는 손님을 접대하고 밤에는 학교를 다닌다. (이 수기는 가네코 후미코가 이곳에서 기숙하면서 박열을 만나 교제하고 박열과 동거하기 직전으로 끝난다.)

3. 고통과 억압의 처절한 삶을 넘어선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

가네코 후미코는 이렇게 고통 받고 억압받으며 처절한 삶을 살았지만 자신의 삶에 지지 않고, 자신의 삶의 노예가 되지 않고 이를 극복해갔다. 자신을 학대한 과거,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힌 운명에 감사하며 고통마저도 은혜로 인식함으로써 자신의 삶 속에서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의 길을 갈 수 있었다. 그리하여 모든 억압에 저항하고 투쟁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역사적인 삶으로 만들어갔던 것이다.
가네코 후미코는 도쿄로 와서 사회주의자들, 아나키스트들과 교류하고 각종 문헌을 읽으면서 사회주의사상을 체화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던 머슴, 개, 조선인들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회주의사상에 공명한 그녀는 자신과 같은 불쌍한 계급을 위해 전 생명을 바쳐 싸우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리고 가네코 후미코는 사회라는 말을 좀 더 이해하게 되며, 당시 일본 사회의 사회구조적인 문제를 정확하게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은 아무리 해도 공부할 수 없고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없는 이유도 알고, 부유한 자가 더욱더 부유해지고 권력 있는 자가 뭐든지 할 수 있는 이유도 알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사회주의사상을 결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회주의가 억압받는 민중을 위해 사회의 변혁을 구한다고 하는데, 그것이 정말로 민중의 복지가 될 수 있을지를 고민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혁명이 민중을 위한 것이 아니라 권력을 위한 것이며, 민중은 결국 권력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 아닐까 하는 통찰을 보여준다. 민중 혁명이 일어나고 사회가 변혁되면 "지도자는 권력을 장악할 것이다. 그 권력으로 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세울 것이다." 그때 민중은 무엇을 할 것인가. "그리고 민중은 다시 그 권력의 노예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혁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하나의 권력을 대신하여 다른 권력을 가져오는 일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이것은 가네코 후미코가 혁명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민중이 혁명의 주인이 되어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이러한 그녀의 통찰은 그후 20세기에 일어난 여러 혁명의 결과를 정확하게 예측한 것이며, 특히 '권력'과 '지배'에 반대하는 아나키스트로서의 분명한 입장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아가 19세기의 유명한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인 막스 슈티르너를 사숙(私淑)한 가네코 후미코는 사회적으로 훌륭하게 되는 것이 의미 없다는 것을 깨닫고 사회적 평판에 좌우되지 않는 자신의 일, 자신의 길을 찾으며 개인주의적 아나키스트로서의 면모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남들이 훌륭하다고 하는 일에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인가. 나는 남들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의 진정한 만족과 자유를 얻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아닌가. 나는 나 자신이지 않으면 안 된다. …… 나는 나 자신의 일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4. 사상의 진정성과 영혼의 자유로움

무엇보다도 우리는 수기 전반을 통하여 가네코 후미코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상과 정면으로 대결했으며, 세상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거침없이 '자유연애'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는 그녀가 선구적인 사상과 자유로운 영혼을 가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이 박열과의 만남과 사랑에서 그 절정에 달하는 것을 본다.
박열의 시 「개새끼」를 읽고 강한 감동을 받은 가네코 후미코는 자신이 오랫동안 찾고 있었던 것을 박열의 시에서 발견한다. 그리고 친구의 하숙에서 우연히 박열을 마주친 후에는 그녀가 하고자 하는 일이 박열의 안에 있고, 박열이야말로 그녀가 찾고 있던 사람이며, 박열이야말로 그녀가 할 일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확신한다. 이러한 믿음은 그녀가 죽을 때까지 변함이 없다. 그녀는 박열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더 나아가 기존의 관습을 깨뜨리고, 즉 조선인과 결혼하는 것을 불쌍히 여기던 당시의 분위기를 아랑곳하지 않고 박열과 결혼함으로써 그녀의 사상의 진정성과 영혼의 자유로움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리하여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을 고통받지 않게 할 것이라고 맹세하며 "죽을 거면 함께 죽읍시다. 우리 함께 살고 함께 죽어요." 하고 수기를 끝맺는다.

※ 이학사는 가네코 후미코의 옥중 수기가 일본에서 출간된 지 80년 만에 처음으로 초판본을 그대로 번역하여 국내에 소개합니다(한국어로 처음 출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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