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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책
출간일
2008.7.25
페이지
701쪽
상세 정보
이 책이 다른 <백범일지> 판본과 질적으로 다른 뚜렷한 특징은 새로운 자료와 연구 성과에 근거한 58편의 '깊이읽기'와 132개의 해설에 있다. 무려 200자 원고지 800여 매, <백범일지> 원문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역사학자의 풍부하고도 깊이 있는 분석은 <백범일지>의 행간에 숨어 있는 의미를 파악하고 백범의 삶을 재구성했다. 나아가 20세기 지성사에 빛나는 '국민도서'로서의 객관성과 균형성을 잡아준다.
이 작업을 저자는 '인간 백범의 재발견'이라 했다. <백범일지>가 지금까지도 여전히 가슴 뭉클한 감동을 독자들에게 선사하며 '국민도서'의 반열에 오른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무엇보다도 <백범일지>는 자신의 허물을 드러낼 줄 하는 책이다.
서대문 감옥에 갇혀서 고문을 받으면서 배가 너무 고파 '젊은 아내를 팔아서라도 한 끼 밥을 맛나게 먹었으면 좋겠다'는 처절한 고백이라던가, 안악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 며칠 밤을 새워가며 자신을 고문하는 일본 경찰을 보고, '평소 애국자라고 자부하던 자신은 저렇게 나라를 위해 밤을 새워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는가' 뼈저리게 반성하는 대목은 여느 자서전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감동적인 자기 고백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백범일지>의 백미가 개인사로서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의 가족사, 7천리의 보도 견문기, 일제시기 생생한 옥중기록 등에 있음을 새롭게 정의한다. 역사적으로 올바르게 풀어쓴 해설을 통해 백범과 그의 동지들이 펼치는 감동의 인간 드라마를 오늘 다시 만난다.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백범일지>가 우리 시대에 던지는 메지시다.
"대가리 싸움을 하지 말고 발이 되라"는 겸허의 정신과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가 되라는 '역수어 정신', 이것이야말로 시공을 초월하여 백범의 삶이 오늘의 우리에게 던지는 분명한 메시지이다. 겸허의 정신은 오늘의 정치가를 비롯한 지도자에게 던지는 통렬한 비판의 메시지이고, 역수어 정신은 미래에 대해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던지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백범일지>는 바로 그러한 백범 정신의 살아 있는 기록이자 교과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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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고비
@fqkedvwlspye
백범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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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다른 <백범일지> 판본과 질적으로 다른 뚜렷한 특징은 새로운 자료와 연구 성과에 근거한 58편의 '깊이읽기'와 132개의 해설에 있다. 무려 200자 원고지 800여 매, <백범일지> 원문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역사학자의 풍부하고도 깊이 있는 분석은 <백범일지>의 행간에 숨어 있는 의미를 파악하고 백범의 삶을 재구성했다. 나아가 20세기 지성사에 빛나는 '국민도서'로서의 객관성과 균형성을 잡아준다.
이 작업을 저자는 '인간 백범의 재발견'이라 했다. <백범일지>가 지금까지도 여전히 가슴 뭉클한 감동을 독자들에게 선사하며 '국민도서'의 반열에 오른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무엇보다도 <백범일지>는 자신의 허물을 드러낼 줄 하는 책이다.
서대문 감옥에 갇혀서 고문을 받으면서 배가 너무 고파 '젊은 아내를 팔아서라도 한 끼 밥을 맛나게 먹었으면 좋겠다'는 처절한 고백이라던가, 안악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 며칠 밤을 새워가며 자신을 고문하는 일본 경찰을 보고, '평소 애국자라고 자부하던 자신은 저렇게 나라를 위해 밤을 새워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는가' 뼈저리게 반성하는 대목은 여느 자서전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감동적인 자기 고백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백범일지>의 백미가 개인사로서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의 가족사, 7천리의 보도 견문기, 일제시기 생생한 옥중기록 등에 있음을 새롭게 정의한다. 역사적으로 올바르게 풀어쓴 해설을 통해 백범과 그의 동지들이 펼치는 감동의 인간 드라마를 오늘 다시 만난다.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백범일지>가 우리 시대에 던지는 메지시다.
"대가리 싸움을 하지 말고 발이 되라"는 겸허의 정신과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가 되라는 '역수어 정신', 이것이야말로 시공을 초월하여 백범의 삶이 오늘의 우리에게 던지는 분명한 메시지이다. 겸허의 정신은 오늘의 정치가를 비롯한 지도자에게 던지는 통렬한 비판의 메시지이고, 역수어 정신은 미래에 대해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던지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백범일지>는 바로 그러한 백범 정신의 살아 있는 기록이자 교과서이다.
출판사 책 소개
“‘올바르게 풀어쓴’이 상징하듯이 이 책은 백범에 대한 균형 잡힌 분석이자 ‘인간 백범’에 대한 새로운 탐사이다”
1.‘역사적으로 올바르게 풀어쓴’ 해설을 통해 백범과 그의 동지들이 펼치는 감동의 인간 드라마를 오늘 다시 만난다 - 개요
‘올바르게 풀어쓴’이 상징하듯 이 책은 <백범일지>에 관한 첫 텍스트 분석이자 ‘인간 백범’에 대한 새로운 탐사이다. 1947년 국사원본을 시작으로 지난 60년 동안 여러 판본이 있어 왔음에도 새로이 나와야 하는 이유는 <백범일지>의 첫 문장에서부터 확연히 드러난다. 1994년에 공개된 백범의 친필영인본을 저본으로 한 기존의 출간본(돌베개본, 학민사본, 역민사본, 백범학술원본)들은 모두 이광수가 윤문한 국사원본에서 새롭게 만들어진 첫문장인 “우리는 안동 김씨 경순왕의 자손이다”로 시작한다. 친필원본의 첫 문장인 “우리 선조는 안동 김씨로 김자점씨의 방계 후손이다. 김자점 씨가 반역죄를 저질러 온 집안이 화를 입을 때”로 시작하는 문장과 완전히 배치된다. <백범일지>의 순수성을 훼손하는 번역일 뿐만 아니라 비판적인 백범읽기의 걸림돌이다. 이 책이 다른 판본과 질적으로 다른 뚜렷한 특징은 새로운 자료와 연구 성과에 근거한 58편의 ‘깊이읽기’와 132개의 해설에 있다. 무려 200자 원고지 800여 매, <백범일지> 원문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역사학자의 풍부하고도 깊이 있는 분석은 <백범일지>의 행간에 숨어 있는 의미를 파악하고 백범의 삶을 재구성했다. 나아가 20세기 지성사에 빛나는 ‘국민도서’로서의 객관성과 균형성을 잡아준다. 이 작업을 저자는 ‘인간 백범의 재발견’이라 했다.
<백범일지>가 지금까지도 여전히 가슴 뭉클한 감동을 독자들에게 선사하며 ‘국민도서’의 반열에 오른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무엇보다도 <백범일지>는 자신의 허물을 드러낼 줄 하는 책이다. 서대문 감옥에 갇혀서 고문을 받으면서 배가 너무 고파 ‘젊은 아내를 팔아서라도 한 끼 밥을 맛나게 먹었으면 좋겠다’는 처절한 고백이라던가, 안악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 며칠 밤을 새워가며 자신을 고문하는 일본 경찰을 보고, ‘평소 애국자라고 자부하던 자신은 저렇게 나라를 위해 밤을 새워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는가’라고 뼈저리게 반성하는 대목은 여느 자서전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감동적인 자기 고백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백범일지>의 백미가 개인사로서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의 가족사, 7천리의 보도 견문기, 일제시기 생생한 옥중기록 등에 있음을 새롭게 정의한다. 역사적으로 올바르게 풀어쓴 해설을 통해 백범과 그의 동지들이 펼치는 감동의 인간 드라마를 오늘 다시 만난다.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백범일지>가 우리 시대에 던지는 메지시다. “대가리 싸움을 하지 말고 발이 되라”는 겸허의 정신과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가 되라는 ‘역수어 정신’, 이것이야말로 시공을 초월하여 백범의 삶이 오늘의 우리에게 던지는 분명한 메시지이다. 겸허의 정신은 오늘의 정치가를 비롯한 지도자에게 던지는 통렬한 비판의 메시지이고, 역수어 정신은 미래에 대해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던지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백범일지>는 바로 그러한 백범 정신의 살아 있는 기록이자 교과서이다.
2. <백범일지>에 관한 첫 텍스트 분석과 인간 백범에 대한 새로운 탐사
<백범일지> 판본은 크게 4종류이다. 김구가 1929년과 1942에 탈고한 친필본과 그것을 옮겨적은 필사본 2종류와 1947년에 공식적으로 출간된 국사원본이 그것이다. 이들 텍스트 가운데 친필본은 다른 세 종류의 저본보다 가장 늦은 시기에 공개되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시중에 나와 있는 번역본들은 대부분 국사원본을 저본으로 한 것이고, 1989년 서문당본에 와서야 상권 집필 후에 옮겨적은 필사본을 저본으로 한 번역본이 출간되었다. 그러다가 1990년대에 백범의 아들 김신 옹이 친필본을 공개하면서 친필본의 영인본과 직해본이 출간되고, 뒤이어 1997년에 비로소 친필본을 저본으로 한 번역본(학민사본, 역민사본, 돌베개본)이 거의 동시에 출간되었다.
여러 종류의 출간본에도 불구하고 돌베개본을 제외한 기존의 출간본은 <백범일지>의 단순한 번역서에 불과하다. 그런 의미에서 돌베개본은 원전을 비평하여 주석과 해석을 붙인 첫 작업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돌베개본이 출간된 지 10년이 넘어서면서 백범에 관한 새로운 자료와 연구성과가 쏟아져 나옴에 따라 새로운 주해서의 탄생이 절실해졌다. 무엇보다 돌베개본은 잘못 해석되거나, 자료가 발굴되지 않아 미쳐 설명하지 못한 내용이 적지 않다. 이 책은 이러한 점을 보완하였음은 물론이거니와 한걸음 더 나아가 백범에 대한 적극적인 해석을 시도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백범일지>에 관한 첫 텍스트 분석이다.
<올바르게 풀어쓴 백범일지>는 백범일지의 분석을 통해 다양한 모습의 ‘인간 백범’을 재발견한다. 인간 백범의 재발견이란 백범을 영웅화하고 긍정적인 면만을 부각시키는 데에 한정되지 않는다. 예컨대 백범은 임시정부 국무령까지 역임한 이상룡의 자손들에 대해서는 공산주의 활동을 하면서 ‘살부회’를 만들어 서로 아버지를 바꾸어 죽인다는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적고 있다. 반면 이승만에 대해서는 서대문감옥에 갇혀 있을 때 이승만이 설치한 옥중도서실의 서적들을 보고 “이박사의 손때와 눈물 흔적이 묻은 책을 볼 때마다 책의 내용보다는 배알치 못한 이박사의 얼굴을 보는 듯 반갑고 무한한 느낌이 들었다”고 적고 있다. 공산주의에 대한 분명한 비판이 <백범일지> 하권에 자주 언급되는 것에 비해<백범일지> 전편을 통해 이승만에 대한 비판적인 언급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 때문에 <백범일지>는 수기로서의 다양한 장점과 함께 대단히 정치적인 텍스트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충분한 비판의식을 갖고 읽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 백범’의 재발견이란 곧 신비화되고, 우상화되어 가고 있는 백범에 대한 균형 잡힌 비판이자, 인간 백범에 대한 새로운 탐사작업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원본의 3분의 1분량으로 <백범일지>에서 미처 언급하지 못한 백범의 삶과 잘못 기억된 내용을 교정하고 설명했다. 저자의 이러한 노력은 ‘깊이읽기’에 잘 드러나 있다. ‘깊이읽기’는 논쟁적인 문제나 시대적인 배경 이해가 필요한 내용에 대해 각 절이 끝나는 본문 말미에 별도의 지면을 통해 좀더 깊이 있게 설명한 것인데 모두 58개에 이른다. <백범일지>에서 충분히 기술되거나 설명되지 못한 행간의 의미를 풀이하고 해석하여 다양한 백범의 삶을 재구성했다. 다음은 <백범일지>에서 미처 밝히지 못했지만 새롭게 밝혔거나 설명한 백범의 중요한 행적 몇 가지를 소개한 것이다.
【깊이읽기】안중근 집안과의 소중한 인연 - <올바르게 풀어쓴 백범일지>, 98-99쪽
【깊이읽기】백범은 광개토왕비를 몰랐다 - <올바르게 풀어쓴 백범일지>, 122쪽
【깊이읽기】백범 김구, 한국 근대 최초의 탈옥사건의 주인공이 되다 -<올바르게 풀어쓴 백범 일지>, 208쪽
【깊이읽기】오줌세례를 받고도 태연했던 백범 -<올바르게 풀어쓴 백범일지>, 388쪽
【깊이읽기】이승만, 동지인가 라이벌인가? -<올바르게 풀어쓴 백범일지>, 389쪽
【깊이읽기】살부회는 실제로 존재했을까? - <올바르게 풀어쓴 백범일지>, 482쪽)
다음은 비판 정신이다. 우리가 한 인물을 존경하고 연구한다는 것은 결코 그 인물에 대한 찬사나 추모작업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의 일련의 근현대 인물들에 대한 추모 사업이나 전집 간행은 매우 실망스러운 일이다. 최근의 백범연구도 이러한 흐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백범정신, 곧 자신의 허물을 숨기지 않고 세상의 비판을 달게 받겠다는 백범의 비판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실패로 점철된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자식들에게 들려주면서, 자신의 실패를 교훈삼아 다시는 그러한 과오를 범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백범이<백범일지>를 쓴 진정한 동기이자 <백범일지>의 정신이다. 그런 의미에서 ‘올바르게 풀어쓴’이 상징하듯이, 균형 잡힌 백범연구를 위한 시금석이 되고자 하는 것이 이 책 출간의 또 하나의 중요한 목적이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 이 시대에 백범을 다시 불러내고, <백범일지>를 재출간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깊이읽기】‘역적의 방계 후손’에서 ‘경순왕의 후손’으로
-<올바르게 풀어쓴 백범일지>, 41-42쪽
【깊이읽기】과거 제도의 물란과 과거 실패의 교훈 -<올바르게 풀어쓴 백범일지>, 62-63쪽
【깊이읽기】쓰치다의 신분에 대한 의혹 -<올바르게 풀어쓴 백범일지>, 157-159쪽
또한 이 책은 기존의 어떤 출간본이나 백범 관련 연구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상세하고 정확한 연보를 작성하여 「연보로 읽는 백범 김구의 삶」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연보만으로도 백범의 삶을 풍부하고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했다. 연보에는 <백범일지>에 적힌 백범의 행적 가운데 잘못된 부분과 기존의 출간본의 연보의 오류를 바로 잡았을 뿐만 아니라 최근 연구를 통해 새롭게 밝혀진 <백범일지>에 실리지 않은 백범의 삶까지도 상세히 적었다
3. 서로 다른 시기에 쓴 세 개의 텍스트 <백범일지>
백범 김구의 자서전은 각기 다른 시기에 쓴 세 개의 텍스트로 구성되어 있다. ‘상권’ ‘하권’ ‘계속’이 그것이다. ‘상권’은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령으로 있을 무렵인 1929년에 쓴 것이다. 인재들이 떠난 임시정부를 외롭게 지키민서 일제와의 최후의 일전을 각오하고 고국에 떨어져 있는 어린 두 아들에게 유서 대신 쓴 글이 ‘상권’이다. 따라서 ‘상권’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백범의 개인사를 중심으로 한 자기고백적인 회고록의 성격이 강하다. 그래서 자서전의 제목도 범인의 잘 알려지지 않은 기록이란 뜻으로 白凡逸志라 지었다.
‘하권’은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중국정보의 지원과 미주동포들의 성원으로 비약적으로 발전한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있을 무렵인 1942년 중경에서 썼다. ‘하권’은 상권 집필시기의 목적이 이미 달성되었다고 생각한 백범이 자신의 투쟁기록과 독립운동 과정의 여러 가지 경험들을 미주동포들과 국내외 동포들에게 자세히 알릴 목적으로 집필된 일종의 ‘독립운동사’라고 할 수 있다.
‘계속’ 편은 1947년에 백범일지 출간을 염두에 두고 ‘하권’ 집필 이후인 1942년부터 1947년까지의 행적을 간단히 적은 것이다. 그러나 ‘계속’ 편은 정치와 사회활동에 관한 기록은 생략하고 철저하게 개인적인 회고와 감상 위주로 서술되어 있다.
4. 새롭게 정의하는 <백범일지>의 독특한 가치
지금까지 <백범일지>는 백범 내면의 고뇌까지도 드러낸 감동적인 수기로만 알려져 왔으나 저자는 <백범일지>의 가치를 새로이 독특하게 말한다. <백범일지>의 가치가 개인사로서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의 가족사, 7천리의 보도 견문기, 일제시기 생생한 옥중기록 등에 있음을 새롭게 정의한 것이다.
첫째,<백범일지>는 자신의 허물과 내면의 고민까지도 드러낸 감동적인 ‘수기’이다. 서대문감옥에서 고문을 받을 때 배가 너무 고파 “젊은 아내를 팔아서라도 한 끼 밥을 맛나게 먹었으면 좋겠다는 더러운 생각까지 들었다”는 처절한 고백과, 안악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 며칠 밤을 새워가며 자신을 고문하는 일본 경찰을 보고, “평소 애국자라고 자부하던 나는 나라를 위해 저렇게 밤을 새워 일해 본 적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라고 자기 자신을 뼈저리게 반성하는 대목은 인간 백범의 내면을 드러내는 감동적인 자기 고백이라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여덟 번에 걸친 일제의 가혹한 고문으로 일곱 번 기절을 하고 깨어나서도 “나의 목숨은 빼앗을지언정 나의 정신은 빼앗지 못한다”고 도리어 일본경찰을 통렬히 꾸짖는 장면도 읽는 이의 마음을 숙연하게 한다.
둘째,<백범일지>는 백범으로 인해 고난의 삶을 살아야 했던 가족들의 비극적인 삶을 생생하게 기록한 독립운동가의 가족사이다. 백범의 든든한 후원자로 인천옥에 갇힌 자식을 뒷바라지한 아버지 김순영, 서대문감옥에 갇힌 남편을 옥바라지 하는 등 온갖 고생을 하다가 마침내 남편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13년 연하의 젊은 아내 최준례, 서대문감옥에 갇힌 백범을 면회 와서 “나는 네가 평양감사가 된 것보다 더 기쁘다”고 하면서 80 평생을 외아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희생한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삶은 백범의 생애 못지않게 가슴 뭉클한 감동을 전해 준다.
셋째, <백범일지>에는 20대에 경험한 두 편의 생생한 견문기록이 담겨 있다. 스무 살(1895년) 때의 두 차례에 걸친 서북지방과 만주 일대의 여행과 인천감옥에서 탈옥한 1898년 3월부터 이듬해 9월에 고향으로 돌아오기까지의 1년 6개월에 걸친 기행이 그것이다. 백범은 이 기간 동안 충청도와 전라도를 지나 해남 땅끝 마을에서 배를 타고 충무공의 유적지인 고금도까지 갔다가 다시 전라도 장흥, 보성을 거쳐 경상도 하동 쌍계사를 둘러보고 충청도를 거쳐 서울로 북상하여 개성을 지나 평양까지 갔다가 다시 고향인 해주로 돌아간다. 이 기간 동안 백범은 무려 7천리가 넘는 길을 별다른 교통수단 없이 직접 걸어 다녔다. 말 그대로 무전여행이었다. 이때 백범은 삼남지방의 반상 차별, 함경도 지방의 높은 교육열, 서간도 이주민들의 생활 등 자신이 보고 들은 민중의 삶을 생생한 기록으로 남겼다. 이런 점에서 <백범일지>는 구한말의 생활과 풍습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특히 탈옥수의 긴박한 피신 길에도 아산의 현충사와 금산의 조헌과 영규대사의 유적, 전라남도 고금도의 충무공 유적지까지 둘러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는 것은 이때의 삼남견문이 20대의 백범을 단련시키는 ‘국토순례’였음을 의미한다.
넷째, <백범일지>는 대한제국과 일제 시기의 옥중생활을 생생히 기록한 옥중기로서도 훌륭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백범은 치하포 사건으로 인천옥에서 1년 7개월, 안악사건(안명근사건)으로 서대문감옥에서 4년 6개월(종로구치감과 인천감옥 이감 포함) 등 6년이 넘는 옥중생활을 경험했다. 인천감옥에서 언제 사형될지 모르는 미결수의 불안한 감옥생활 중에도 ‘옥중학교’를 열어 죄수들을 가르쳤다는 것은 세계의 감옥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선구적인 일이다. 특히 별다른 죄수복이 없이 집에서 입던 옷을 입고 생활하고 감옥사역 없이 탈옥을 예방하기 위해 죄수들을 밤에 잠을 자지 못하게 하고 노래를 부르게 했다는 등의 구한말의 감옥소 풍경은 일제 시기 이후의 감옥소 전경과 다른 독특한 풍경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백범일지>상권 전체의 4분의 1에 해당할 정도로 상세히 기록한 서대문감옥에서의 옥중생활은 일제의 감옥제도의 실상을 고발하고 인간 백범의 내면을 감동적으로 드러내는 <백범일지>의 백미이다. 특히 일제의 감옥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우리나라가 독립한 뒤에는 감옥 간수부터 대학교수의 자격이 있는 사람으로 채용하고, 감옥살이를 한 죄수들이라도 사회에 나오면 대학생의 자격으로 대우해 주어야 한다고 감옥제도의 개선방안을 제시한 것은 오늘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개선책이라고 할 수 있다.
다섯째, <백범일지>는 자식을 가르치는 교과서로서도 분명한 가치가 있다. 상해에서 임시정부의 주석으로 있으면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서 두 아들에게 유서 대신에 쓴 것이 <백범일지>이다. 그런 의미에서 <백범일지>는 백범이 두 아들에게 남긴 정신적 유산이다. 백범의 둘째 아들 김신 옹의 회고대로 “아버지는 아들을 몰라야했고 아들이 아버지를 모르면서 살았던 가정”이 백범의 가족이었다. 그러나 김신 옹은 아버지로서 백범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로써 보다는 다시없는 스승으로 섬기고 싶었다”고 백범을 아버지이기 이전에 인생의 스승으로 존경한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들을 수 있는 말 중에 이 보다 더 좋은 찬사가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백범일지>는 필자가 어린 두 아들에게, 더 나아가서 이 시대의 아버지들이 자식들에게 권할 수 있는 필독서이다.
5. 원문에 충실한 번역과 역사학자의 깊이 있는 해석
이 책은 번역과 형식과 내용면에서 기존의 번역본이나 주해본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 기존 출간본과의 차이는 첫 문장의 번역에서부터 확연히 드러난다. 1994년에 공개된 백범의 친필영인본을 저본으로 한 기존의 출간본(돌베개본, 학민사본, 역민사본, 백범학술원본)들은 원문의 순수성을 강조면서도 1947년에 출간된 이광수 윤문의 국사원본에서 처음 등장하는 <백범일지>의 첫 문장인 “우리는 안동 김씨 경순왕의 자손이다”로 시작하는 백범의 조상이 경순왕의 후손이고 대대로 서울에서 높은 벼슬을 한 명문 집안이었다는 가계 서술을 그대로 옮겨 적고 있다. 이 문장은 친필원본에는 없을뿐더러 친필원본의 첫 문장 “우리 선조는 안동 김씨로 김자점 씨의 방계후손이다. 김자점 씨가 반역죄를 저질러 온 집안이 화를 입을 때”로 시작하는 문장과 완전히 배치된다. 친필본의 ‘역적의 방계 후손’이라는 첫 구절은 백범의 저항정신과 평민의식의 뿌리를 이해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문장이다. 그런데 친필본을 저본으로 한 네 출간본은 한결같이 경순왕, 곧 ‘왕손의 후손’이라는 국사원본의 가계인식을 별다른 코멘트 없이 그대로 옮겨 적고 있다. 이러한 번역이야말로 <백범일지>의 순수성을 훼손시키는 번역일 뿐만 아니라 비판적인 백범읽기의 걸림돌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렇다면 저자가 지적한 가장 권위 있는 <백범일지> 주해서로 인정받고 있는 돌베개본의 문제점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여기서는 번역과 해석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구체적인 사례 몇 가지를 짚어본다.
1) 번역의 오류
사례 1
백범이 참가한 해주에서의 지방 향시 장면.
원문 : “정각에 소위 부문(赴門)- 과거장을 개방-을 한다는데”
돌베개본 : “정면에 있는 과거장 입구로 선비들이 열을 지어 들어갔다”(36쪽)
정각을 정면으로 잘못 풀이했고, ‘부문’이라는 과거장의 문을 개방한다는 뜻을 이해하지 못해 이를 “선비들이 열을 지어 들어갔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당시 과거제도는 오늘날과 같은 수험번호와 지정좌석이 없었기 때문에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자리다툼이 치열했다. 이를 ‘쟁접’이라고 하는데, <백범일지>에서 묘사하고 있는 장면은 바로 그러한 폐단을 리얼하게 묘사하고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상세한 내용은 <올바르게 풀어쓴 백범일지>, 62~63쪽 ‘깊이읽기-과거제도의 문란과 과거 실패의 교훈’ 참조)
사례 2
- 농민전쟁에 패하고 백범 일행이 청계동의 안 진사(안중근의 아버지 안태훈)를 찾아가서 만나는 장면
원문의 “名刺를 提한즉”을 “이름을 대니”(돌베개본, 55쪽)으로 풀이했다. 명자는 지금의 명함을 뜻하는 명사이다. 아마도 안태훈이 농민전쟁 때 백범에게 밀사를 보냈을 때 서로 약조한 사항을 이행하기 위해 준 신분의 증표 같은 것으로 짐작된다. 이 부분을 “이름을 대니”로 해석하다 보니 이어서 나오는 안진사가 백범 일행을 맞이하면서 “우리의 명자를 본즉”이라는 표현도 “이름을 본 안진사는”(돌베개본, 55쪽)이라고 어색하게 풀이하게 된다. 이름을 본다는 것은 문법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따라서 이는 백범 일행의 신분을 증명할 수 있는 일종의 명함과 같은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사례 3
원문의 “안진사가 의려소 3자(字)를 친필로 횡액(橫額)을 써부첫드라”라는 표현도 “의려소 세 자가 옆으로 붙어 있었다”(돌베개본, 55쪽)라고 풀어쓰고 있다. 횡액은 보통 건물이나 문루의 중앙 윗부분에 써서 붙이는 액자, 곧 현판의 다른 말이다. 보통 가로쓰기를 했기 때문에 횡액이라고도 한다. 그런데 돌베개본을 축약한 <쉽게 읽는 백범일지>는 이 부분을 대폭 생략해서 묘사하는데, 안진사가 백범일행을 만나는 장소를 달리 설명하고 있다. 백범일행이 안진사를 만나는 곳은 평소 안진사 6형제가 술과 담소의 장소로 이용하던 청계동 입구에 있는 초가정자인데, “안진사의 집으로 들어가자, 그는 본채 마루에서 친절하게 맞아주었다”(43쪽)고 전혀 다르게 풀이하고 있다.
2) 설명과 해석의 오류
사례 1
- 구월산 패엽사에서 만난 주지승의 이름
마곡사에서 만난 승려 이름도 하은당이라고 한 것으로 보아서 동명이라고 한 것은 어색하다.(돌베게본, 51쪽)
그러나 <신천군지>에서 “패엽사에는 최근세에 고승 하은대사가 있어 절을 크게 중수하고 한산사라는 이름으로 고쳐 부르게 했다”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패엽사의 주지가 하은당인 것은 사실인 것 같다.(<올바르게 풀어쓴 백범일지>, 85쪽)
사례 2
- “조선 중기 해서지방의 유명한 문인 유응두는”[돌베개본 55쪽의 66번 주]
유응두는 안악출신의 유학자로 한일합방 뒤에 대한독립의군부의 황해도 대표를 역임한 해서지방을 대표하는 유학자이다.(<올바르게 풀어쓴 백범일지>, 92쪽)
사례 3
- “구월산 아래 월정동의 오랜 친구는 송종서가 아니라 앞(49쪽)에 나온 동학군 시절 백범이 종사로 모신 우종서일 것이다”[돌베개본, 182쪽의 128번 주]
월정동의 오랜 친구 송종서는 당연히 백범일지 앞쪽(51쪽)에서 이미 언급한 ‘신천군 월정동의 송종호’를 잘못 적은 것이다.
사례 4
구월산에 있던 백범 부대가 회의를 하고 백범의 병권을 송종호에게 넘겨주기 위해 허곤을 평양에 보내어 장호민의 소개로 황주병사의 양해를 얻는 문제
돌베개본은 이를 “병사는 원래 병마절도사의 준말이지만, 여기서는 동학 조직에서 병권을 관장하던 사람이라고 지칭한다”고 해석(돌베게 본 59번 주)
그러나 농민전쟁 중의 청일전쟁으로 평양과 황주가 폐허가 될 정도로 피해를 입고 이미 일본군에 점령되었고, 그곳에서 군대를 황해도로 파견하여 황해도의 농민군을 토벌하고 있던 당시의 상황을 고려할 때 구월산 이외 지역에 동학조직을 병권을 관장하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설명이다. 따라서 백범의 병권을 빼앗고 허곤을 평양에 파견한 것은 관군의 회유정책에 따라 강경파인 백범의 군사지휘권을 회수하고 관군과의 협상을 위한 전략이었다고 생각한다.(<올바르게 풀어쓴 백범일지>, 90쪽)
사례 5
안악면학회 설명주
“본부는 한때 백범의 서당 선생이었던 정문재의 집에 두었다”[199쪽]
면학회의 본부를 둔 곳은 정명재의 집이고, 그는 안악출신의 한의사인데,(안악군지 참조) 이를 백범의 서당 선생 인 ‘정문재’와 혼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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