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승자를 읽는 또 하나의 방법
데카르트가 방법론적 회의 끝에 도달한, 철학의 출발점이 되는 제1원리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이다.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고 일체가 허위라고 생각할 수 있어도 그와 같이 의심하고 생각하는 우리의 존재를 의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여기 그 명제를 부인하며 시집의 포문을 여는 시인이 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 /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일찌기 나는」 中) 자신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신하지 못하는 상황도 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건지 죽은 건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인지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고 단지 모든 것이 미정(未定)인 상태. 거기서 내가 나의 존재를 무어라 호명하는지에 따라 나의 실존은 달라질 수 있다.
최승자의 시는 부단히도 노력한 흔적 같다. 자신이 살아 있다는 사실(정말 살아 있긴 하지만)을 루머로 치부한 채, 당연한 것을 당연하지 않음의 쪽으로 밀어버리고 그는 세상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재설정하려 한다. 그렇기에 시에는 죽음이 빈번하게 등장하고, 잔인하고 파괴적인 심상들, 누군가에게는 트리거(trigger)가 될 수 있는 장면들이 흘러넘친다. 그러나 시인이 왜 그렇게 해야만 했는지, 왜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실존을 시험해보고자 한 것인지 알 것 같다. 얼마 전 읽은 책에서 인상 깊었던 구절이 불현듯 떠오르면서 말이다. "그 정도로 하고 싶은 말이었다면, 누군가는 들어 주어야 할 거야." (김겨울, 『책의 말들』, 유유, 2021, 59쪽) 시집을 거듭 읽어보니 시인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보였다. 어떤 방식으로 그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지 시들을 찬찬히 읽어 내려가며 어느 정도 감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썩지 않으려면 / 다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 다르게 사랑하는 법” (「올여름의 인생 공부」 中) 썩는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만히 제자리에만 있는 물이 고여 썩게 되듯 말이다. 그러나 최승자는 첫 번째 시부터 자신의 실존에 의문을 던졌다. 그것은 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상정하는 것이고, 그의 시처럼 "다르게 기도하"고 "다르게 사랑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시집에는 여태까지의 시들(특히, '한국현대시 읽기' 수업에서 다루었던)과는 판이한 무언가가 있다. 강은교처럼 어렴풋하게 제시하는 것도 아니고, 박봉우처럼 희망을 명료하게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최승자는 정말 말 그대로 피를 뚝뚝 흘리면서 시를 써 내려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것이 아닌 다른 것을 갖고 싶다. / 여기가 아닌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 괴로움 / 외로움 / 그리움 / 내 청춘의 영원한 트라이앵글” (「내 청춘의 영원한」 전문)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저번 서평계획서 때부터(사실 박봉우의 『휴전선』 감상문부터) 나를 따라온 박솔뫼가 또 떠올랐다. 박솔뫼의 세 번째 장편소설 『도시의 시간』에는 '삼각형'에 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한다. "덜컥 꼭짓점이 떨어지면 덜컥 직선이 되어 버린 나머지 두 점은 덜컥 덜컥 새로운 꼭짓점을 찾아 나선다. 삼각형을 되찾기 위해. 그렇지 않으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박솔뫼, 『도시의 시간』, 민음사, 2014, 183쪽) 최승자에게 있어 삼각형의 각 꼭짓점을 이루는 것들은 저토록 아픈 무엇이었다. '괴로움'과 '외로움'과 '그리움'이 삼각형의 모양이 되어 데굴데굴 그의 삶을 구르게 했을 것이다. 저 세 가지 중 하나라도 내치려고 청춘들은 부단히 노력한다. 작금의 상황에서 벗어나 더 나은 미래를 향하고자 한다. 그러나 박솔뫼가 말한 것처럼, 한 꼭짓점이 소실되면 그 순간 그것은 직선이 되어버리고 다시 원래의 형태를 되찾기 위해 새로운 꼭짓점으로 그 빈틈을 메울 것이다. 무엇이든 채워 넣은 채로, 무엇이든 채워져 있는 상태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설령 자신을 너무나도 힘들게 하고, 자신을 자신으로 존재하지 못할 정도로 그를 뒤흔드는 것일지도 말이다. 그 사실을 최승자는 이미 알았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런 시를 썼겠지. 참 많이 멈춰 서게 되는 시였다.
“어째서 내 존재를 알리는 데에는 이 울음의 기호밖에 없을까요?” (「부질없는 물음」 中) 이런 방식으로만 자신의 존재를, 그 실존을 천명(闡明)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시인은 이 시의 제목에 부질없다는 형용사를 덧대었을 것이다. 저 문장을 읽었을 때 애써 지켜온 마음이 무너지지 않을 수 없었다. 시인에게 완전히 감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뒤를 돌아보면 자신이 지금껏 살기 위해, 혹은 살아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써 내놓았던 시들이 있고 그 시들에 붙잡혀 벗어나고 싶지 않을 때도 있겠지만 결국 앞을 향하여 굴러가야 할 것이다. 가끔은 울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루머, 이 천명(天命)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지만 그럼에도 다시 책상 앞으로 걸어 나와 한 글자 한 글자 적어 내려가는 피 맺힌 시(들). 이제는 그 시들이 삼각형을 이루어 시인을 굴러가게 한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