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관의 전쟁

디팩 초프라 외 1명 지음 | 문학동네 펴냄

세계관의 전쟁 (과학과 영성 승자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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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2013.10.2

페이지

448쪽

상세 정보

과학자 레너드 믈로디노프와 영성철학자 디팩 초프라는 ‘우주’ ‘생명’ ‘마음과 뇌’ ‘신’이라는 네 가지 주제를 놓고 열띤 지상 논쟁을 벌인다. 각 주제 아래에는 다섯 가지 안팎의 세부 논쟁거리를 두어, 두 저자는 다양한 층위에서 폭 넓고 심도 깊은 논쟁을 주고받는다.

레너드는 세계가 빅뱅 이후 자연선택을 통해 형성되어왔고, 마음은 뇌의 작용에 의한 것이며, 철저히 이성적이며 객관적인 방식으로 우주와 생명을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디팩은 우주를 창조한 존재가 분명히 있고, 생명은 모든 물리적 과정 너머의 초월적 영역에서 비롯되었으며, 영성 역시 철저히 이성의 기반에서 만물을 바라본다고 주장한다.

‘과학 대 종교’가 아니다. <세계관의 전쟁>은 ‘과학 대 영성’의 논쟁을 담았다. 과학과 영성 양측이 기초적인 물리학적 진실들을 인정한 바탕 위에서 각 진영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전개해나가는 이 책은, 태생적으로 한없이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과학과 종교 사이의 논쟁과는 격이 다르다. 과학과 영성 양측을 대표하는 두 저자의 숨 막히는 빅매치는 순식간에 독자를 두 세계관의 전쟁, 치열한 논리 싸움의 링 안으로 끌어들이며 시종일관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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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팽한 논쟁일거라 생각했는데 레너드의 일방적 완승으로 보인다.

1st 20201217

세계관의 전쟁

디팩 초프라 외 1명 지음
문학동네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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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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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과학자 레너드 믈로디노프와 영성철학자 디팩 초프라는 ‘우주’ ‘생명’ ‘마음과 뇌’ ‘신’이라는 네 가지 주제를 놓고 열띤 지상 논쟁을 벌인다. 각 주제 아래에는 다섯 가지 안팎의 세부 논쟁거리를 두어, 두 저자는 다양한 층위에서 폭 넓고 심도 깊은 논쟁을 주고받는다.

레너드는 세계가 빅뱅 이후 자연선택을 통해 형성되어왔고, 마음은 뇌의 작용에 의한 것이며, 철저히 이성적이며 객관적인 방식으로 우주와 생명을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디팩은 우주를 창조한 존재가 분명히 있고, 생명은 모든 물리적 과정 너머의 초월적 영역에서 비롯되었으며, 영성 역시 철저히 이성의 기반에서 만물을 바라본다고 주장한다.

‘과학 대 종교’가 아니다. <세계관의 전쟁>은 ‘과학 대 영성’의 논쟁을 담았다. 과학과 영성 양측이 기초적인 물리학적 진실들을 인정한 바탕 위에서 각 진영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전개해나가는 이 책은, 태생적으로 한없이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과학과 종교 사이의 논쟁과는 격이 다르다. 과학과 영성 양측을 대표하는 두 저자의 숨 막히는 빅매치는 순식간에 독자를 두 세계관의 전쟁, 치열한 논리 싸움의 링 안으로 끌어들이며 시종일관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준다.

출판사 책 소개

우주 탄생과 생명의 기원을 둘러싼
과학과 영성, 두 세계의 세기적 빅매치!

이것은 전쟁이다!

이론물리학계의 석학이자 교양과학서를 통해 대중과 소통하는 글 쓰는 과학자, 레너드 믈로디노프. 내과의 겸 내분비학자 출신의 대체의학자이자 이 시대 영성철학계의 새로운 구루, 디팩 초프라. 과학 그리고 영성, 각 세계관을 대표하는 두 사람의 중량감 있는 타이틀매치가 펼쳐졌다. 우주의 탄생, 생명의 기원 등 인류의 가장 근원적인 물음들을 둘러싸고 벌인 이들의 묵직하고 치열한 논리 대결을 고스란히 담아낸 책, 바로 『세계관의 전쟁』이다.
‘과학 대 종교’가 아니다. 『세계관의 전쟁』은 ‘과학 대 영성’의 논쟁을 담았다. 과학과 영성 양측이 기초적인 물리학적 진실들을 인정한 바탕 위에서 각 진영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전개해나가는 이 책은, 태생적으로 한없이 평행선을 달릴 수밖에 없는 과학과 종교 사이의 논쟁과는 격이 다르다. 과학과 종교 사이의 논쟁은 이미 다양한 매체를 통해 수없이 벌어져왔다. 애초부터 대화가 통할 수 없는 양측의 토론은, 항상 도돌이표처럼 제자리를 맴돌다 끝나는 경우가 허다했다. 어조는 격정적이지만, 서로 다른 언어로 말싸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도무지 깊고 넓게 논쟁이 펼쳐지지 않았다. 큰 기대를 하고 관전하지만, 결국 김빠진 탄산음료처럼 별 맛이 없었다. 이 책은 다르다. 과학과 영성 양측을 대표하는 두 저자의 숨 막히는 빅매치는 순식간에 독자를 두 세계관의 전쟁, 치열한 논리 싸움의 링 안으로 끌어들이며 시종일관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켜준다.

디팩 초프라의 영성 vs 레너드 믈로디노프의 과학
과학자 레너드 믈로디노프와 영성철학자 디팩 초프라는 ‘우주’ ‘생명’ ‘마음과 뇌’ ‘신’이라는 네 가지 주제를 놓고 열띤 지상 논쟁을 벌인다. 각 주제 아래에는 다섯 가지 안팎의 세부 논쟁거리를 두어, 두 저자는 다양한 층위에서 폭 넓고 심도 깊은 논쟁을 주고받는다. 레너드는 세계가 빅뱅 이후 자연선택을 통해 형성되어왔고, 마음은 뇌의 작용에 의한 것이며, 철저히 이성적이며 객관적인 방식으로 우주와 생명을 분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디팩은 우주를 창조한 존재가 분명히 있고, 생명은 모든 물리적 과정 너머의 초월적 영역에서 비롯되었으며, 영성 역시 철저히 이성의 기반에서 만물을 바라본다고 주장한다.
레너드 믈로디노프는 물리학자로서 당연히 철저한 과학적 논증을 기반으로 우주와 생명 등에 관한 견해를 밝힌다. 의외인 건, 영성철학자인 디팩 초프라의 입장이다. 우선 그는 자신이 대변하는 ‘영성’과 기성 조직종교 사이에 선을 긋는다. 조직종교가 부처, 예수, 노자와 같은 영적 스승들이 전해준 깨우침과 넘어섬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아울러 영성은 과학 못지않게 이성적 사고를 통해 만물을 바라본다고 주장한다. 그의 표현은 이러하다. “종교적 신앙과 과학적 합리성이 현재 벌이고 있는 논쟁에서 편을 고른다면, 영성은 사실 과학과 더 가깝다. 지혜는 이성이 활짝 꽃핀 것이지 이성의 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합리적 이성을 외면한 채 교조적인 신앙 체계를 고집하는 조직종교들을 꼬집으며, 보다 합리적이고 보편적인 자세에서 과학 진영과 논쟁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디팩은 과학이 포착한 만물의 물리적 속성은 본질이 아닌 현상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첨단과학이 밝혀낸 초미세한 혹은 초거대한 차원의 최신 정보들 언저리엔, 궁극적으로 영성 진영에서 말해온 지고의 가치가 자리한다는 논리 전개다.

“우리 눈은 바위며 산이며 나무며 하늘을 보지만, 이는 단지 드넓고 신비롭고 눈에 보이지 않는 실재에 드리운 장막에 지나지 않는다. 오감이 미치는 범위 너머에 눈으로 볼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이 자리하며, 그 잠재력을 풀어내는 열쇠는 바로 의식이다. (…) 사람의 의식이 과학을 창조했는데, 얄궂게도 지금 과학은 자신의 창조주인 의식을 몰아내는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에 대해 레너드 믈로디노프는 자신은 “회의주의를 견지”할 것이라며, ‘증거’와 ‘설득력’을 갖추어 세계를 논할 것을 디팩에게 요구한다. 이어 ‘여러분은 지극히 쉽게 속임을 당할 수 있다’는 리처드 파인먼의 말을 인용하며, 독자에게 영성 측의 주장을 따지고 또 따져볼 것을 당부한다.

“디팩은 과학이 연구하는 가시적인 또는 탐지 가능한 우주를, 절대적으로 우월하면서도 비가시적이고 우리의 감각을 넘어서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 가시적인 모든 것들의 근원인 ‘초월적인 영역’과 대비한다. 디팩은 과학이 이 영역을 받아들여야만 한계를 넘어서 성장할 수 있고, 세계를 구하는 일을 거들 수 있다고 열정적으로 논한다. 그러나 그런 영역이 과학의 한계를 넓힐 수 있다고, 인류를 도울 수 있다고, 또는 고대의 현자들이 그렇게 가르쳤다고 논한다고 해서 그것이 참이 되는 것은 아니다. (…) 생각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무엇인가? 여기에 답을 해야지만 믿음은 소원 빌기식 사고 수준을 초월할 수 있다. 따라서 디팩이 자기 말에 설득력을 싣고자 한다면, 이 물음들이야말로 그가 반드시 마음을 쏟아야 할 도전 과제가 될 것이다.”

논쟁 : 우주와 생명의 기원 그리고 진화의 정체
두 저자는 우주의 탄생과 생명의 기원, 진화 등을 놓고 열띤 공방을 주고받는다. 레너드는 빅뱅, 인플레이션, 양자요동 등의 개념을 통해 우주의 탄생과 이후 형성을 설명한다. 특히 우주가 무(無)에서 생겨났을 수 있음을 시사하는 ‘진공요동’ 개념을 소개함으로써, 어떤 합리적 증거도 없이 ‘창조주’의 존재를 상정하는 영성 진영의 신비주의적 입장을 비판하는 동시에, 과학이 걸어온 길과 나아갈 바를 의지적으로 소개한다.

“진공요동이란 ‘무(無)’조차도 요동을 내보이며,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는 불안정하다는 양자이론의 예측을 일컫는 말이다. (…) 사실 여러분이 가진 질량의 대부분은 여러분을 구성하는 원자들 속의 양성자들에서 온 것이다. 그리고 양성자의 질량 대부분은 양성자를 구성하는 쿼크들의 질량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쿼크들 사이의 ‘빈’ 공간의 에너지에서 온 것이다. 말하자면 입자들이 무에서 생겨났다가 곧바로 다시 무로 사라지는 격렬한 부글거림에서 나온 것이다. (…) 많은 물리학자들은 진공요동이 한 가지 기막힌 예측을 가리킨다고 믿는다. 곧, 우주가 무에서 저절로 생겨났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정말 그랬을까? 아직은 확실히 모른다. 어떻게 하면 일반상대성과 양자이론이 결합될 수 있는지 아직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설사 그걸 이해했다고 쳐도, 관찰 가능한 현상들과 관련해서 구체적인 예측들을 내놓고, 이를 시험해야 한다. 물리학자들은 그 일을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것이 과학이 할 일이기 때문이다. 철학적, 형이상학적, 신비주의적 사변들, 다시 말해서 증거의 구속을 받지 않는 그런 사변들과는 달리, 우주의 기원에 대한 과학이론은 관찰이라는 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렇게 해서 나온 그림이 우리의 근원을 신에게서 찾고자 하는 이들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그래도 과학은 그 답을 내놓을 것이다.”

한편 디팩은 어떠한 의식적 작용도 없이 물질이 저절로 생겨난다는 과학의 논리는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한다. 과학이 설명하는 바에 따르면, 생명이란 먼지가 먼지로 되돌아가기 전까지의 상태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라며 반박한다. 또한 과학이 어떤 대상에 대한 ‘믿음’과 ‘형이상학’을 비판한다지만, 스스로 물질에 믿음을 둠으로써 ‘우리는 신 없이 살 수 있으며, 생명은 오직 분자들에 의해서만 창조되었다’는 형이상학적 결단을 하는 모순을 저지른다고 꼬집는다.

“뇌세포 하나에서 출발해 그 세포를 구성하는 원자들로 거슬러올라간다고 해보자. 그 원자에서 더 거슬러올라가면 아원자 입자들에 이르고, 그러다가 마침내 경계선을 지나 그 너머에 자리한 비가시적인 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거기서는 어느 특수한 물리적 과정을 콕 집어서 “아하, 생각이 나오는 곳이 여기구나” 또는 “포도당이 생명을 얻는 곳이 여기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 출발점을 찾으려는 노력은 꾸준히 이어지지만, 유물론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휘발유가 어떻게 자동차 운전하는 법을 배웠느냐고 묻는 어린애가 있다면, 그 아이는 일류 신경과학자 몇 사람이 저지른 것과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셈일 것이다. (…) 물질이 어떻게 갑자기 생명의 춤을 이루는 부분이 되어 생명이 내보이는 온갖 창조성을 가지게 되는지 설명하기 위해서는 더욱 본질적인 수준으로 가야만 한다. 나는 줄곧 의식이 자연에 내재한다고 논하고 있다. 의식은 우리 본질의 일부이다. 생명을 생명이게 하는 다른 자질들도 우리 본질의 일부이다. 지능, 창조성, 조직, 진화는 모두 생명 있는 존재들에게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그 자질들을 창조한 것은 DNA가 아니다. DNA가 생명을 창조한다고 말하는 것은 물감이 그림을 창조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나는 그 순서를 뒤바꾸면 진리에 이를 것이라고 믿는다. 곧, 생명이 먼저였고, 물질이 생명에 가시적인 꼴을 입혔다는 것이다.”

두 저자는 우주의 진화에 대해서도 공방을 이어간다. 우선 디팩은 진화 개념 자체를 부정하는 종교와 선을 긋는다. “원시적인 생명 꼴들에서 지능을 가진 생명이 솟았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며, 더 나아가 “우리는 진화하는 우주에 사는 것”이라고 밝힌다. 아울러 과학이 설명하는 진화의 개념과는 다른, 영성 진영이 생각하는 진화 개념을 소개한다. 현대과학은 탄생과 진화와 관련해 양자 도약, 창발 같은 개념들을 제시하면서, 그것이 무작위적인 물리적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설명하는데, 디팩은 그것들이 바로 우주와 생명에 내재된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레너드는 과학이 무작위적이고 무목적적인 물리적 과정을 말하는 건, ‘의도를 가진 우주’를 반대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사는 우주가 그렇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주에 ‘의식’이란 게 있어서 진화해나가는 거라면 참 좋겠지만, 그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느 쪽 말이 더 합당해 보이는지, 저자들의 표현을 보고 직접 판단해보라.

“완전한 혼돈에서 시작해 지구상 생명까지 이르기는 매우 힘들다. 줄기세포들이 담긴 비커를 흔들어놓고 외출했다가 돌아와서 보니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있음을 보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창조를 쪼개고 쪼개서 도달하게 되는 무엇을 가지고 설명하기보다는 창조가 이룬 바를 가지고 창조를 설명해야 하지 않겠는가? 쿠푸 왕의 대피라미드를 검사하면 여러 가지 먼지가 쌓인 무더기로 볼 수 있으나, 그게 피라미드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이는 사람 몸을 아원자 입자들로 쪼개놓고는 우리가 누구인지 설명하려는 짓이나 다를 바가 없다.” (디팩)

“자연이 줄기세포가 든 비커를 흔들고는 외출했다가 돌아와 보니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있더라는 말을, 과학은 하지 않는다. 과학이 하는 말은, 자연이 1조 곱하기 10억 개의 항성계들에 물질을 보내 137억 년 동안 숙성시킨 다음에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전자는 실로 억지스럽지만, 후자는 길잡이도 없고 목적도 없는 자연의 힘들이 낳은 아름다운 결과이다.” (레너드)

설전 : 아인슈타인은 어느 편인가
무게감 있는 주제들을 놓고 벌어지는 두 저자의 논쟁 속에서는, 심각하면서도 적잖이 흥미를 자아내는 ‘설전’이 속속 등장한다. 내내 피가 튀는 ‘세계관의 전쟁’을 관전하는 독자에게는 단비와 같은 순간들이다. 우선 아인슈타인이 언급했다는 ‘영성’ 혹은 ‘외경심’의 정체를 둘러싼 두 저자의 설전부터 보자.

“아인슈타인은 우주의 머나먼 지평에 자리한 신비 앞에서 개인적으로 외경심과 경이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뒤로 이론물리학에서 보는 우주는 무작위적이고, 복잡하고, 역설적이고, 신성을 찾아볼 수 없는 곳이 되고 말았다.” (디팩)

“생각의 명료함과 이성 능력에서 거의 초인에 가까웠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마저도 우주와 자기가 영적으로 이어져 있다는 느낌에 미칠 듯이 기뻐했다. 아인슈타인의 경우, 그의 영적 삶을 빚어낸 것은 바로 그 우주의 ‘합리성’이었다.” (레너드)

사뭇 아전인수식 싸움 같아 보이기도 하는 이런 장면은, 논쟁 과정 곳곳에 등장해 심각한 분위기를 환기하는 역할을 하는 동시에, 독자가 저자들의 논지를 좀더 쉽게 이해하는 발판이 되기도 한다. ‘주관적 경험의 가치’를 놓고 벌이는 두 저자의 또다른 설전은, 이런 의도치 않은 ‘장치’의 매력을 보다 분명히 보여준다.

“우리는 무례한 무신론의 시대에 살고 있으며, 무신론을 신봉하는 자들은 종교가 미신이고 착각이고 날조라고 조롱한다. 그러나 무신론자들의 진짜 표적은 종교가 아니라, 바로 내면 여행이다. 과학적 무신론자들이 보기에 실재는 반드시 바깥에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전체적인 접근이 산산조각나고 만다. (…) 과학은 순수한 객관성을 결코 이루지 못했고, 앞으로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주관적인 경험의 가치를 부정하면, 삶을 살아갈 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들, 이를테면 사랑, 신뢰, 믿음, 아름다움, 외경심, 경이감, 자비심, 진리, 예술, 도덕, 그리고 마음 자체를 모두 내치는 셈이다.” (디팩)

“디팩은 과학이 “주관적 경험의 가치”를 부정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만일 어느 과학자는 헬륨 원자를 “꽤 무겁다”고 서술하고 또 어느 과학자는 “내가 느끼기에는 가볍다”라고 적었다면, 과학은 그리 멀리 나아가지 못했을 것이다. 과학자들이 정밀한 객관적 측정과 정밀한 객관적 개념을 쓰는 데에는 다 그만한 까닭이 있다. 과학자들이 그 측정과 개념이 “사랑, 신뢰, 믿음, 아름다움, 외경심, 경이감, 자비심” 등등의 영향을 받지 않았음을 확실히 하려 한다고 해서, 삶의 다른 영역에서까지 그 자질들의 가치를 내버린다는 뜻은 아니다.” (레너드)

우주라는 수레를 나아가게 하는 두 개의 바퀴, 과학과 영성
책의 서두에서 두 저자는, 상대 진영이 인류에 끼친 ‘민폐’의 추억을 경쟁적으로 떠올리며 사뭇 냉랭한 시선을 내비쳤다. 디팩은 과학 연구의 부산물인 원자폭탄과 환경오염 문제를 거론하며, 과학의 약속을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레너드는 과학 연구가 시작되기 전부터 인류는 인간 상호간 적대행위와 환경오염을 저질러왔다며, 오히려 책임은 영성 측에 있다고 날카롭게 대응한다.

“과학이 환경을 회복시키고, 화석연료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고, 에이즈와 암을 치료하고, 기아의 위협을 끝낼 새로운 기술로 우리를 구하리라는 것이다. 여러분이 걸린 병을 말만 해보라. 그러면 머잖아 과학이 해결해주리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런데 이는 과학이 바로 과학 자체로부터 우리를 구해주겠다는 약속 아닌가? 그럴진대 왜 우리가 이 약속을 신뢰해야 한단 말인가? 종교를 무릎 꿇린 세계관, 그리고 생명을 본질적으로 유물론적으로 보는 그 세계관이 우리를 데려다놓은 길이 향하는 곳은 막다른 끝이다.” (디팩)

“선을 장려하고 악을 피하도록 하는 것은 조직종교와 영성이 책임진 일이다. 종종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쪽은 과학이 아니라 바로 종교와 영성이었다. 동양 종교들은 아시아에서 일어난 참혹한 전쟁의 역사를 막아내지 못했고, 서양 종교들도 유럽에 평화를 주지 못했다. 사실 현대 물리학으로 가능해진 모든 핵무기보다, 종교의 이름으로 학살당한 이가 더 많았다. 십자군전쟁부터 홀로코스트에 이르기까지, 종교는 선과 사랑의 도구만이 아니라, 증오의 도구로도 쓰였다.” (레너드)

이처럼 얼핏 상호 비방으로도 비치는 날 선 만남으로 시작된 이들의 논쟁은, 그러나 다양한 논쟁거리를 통해 서로의 생각을 상세히 알아가며, 부분적으로나마 같은 지점을 바라보는 모습을 속속 보여준다. 물론 서로가 결코 타협할 수 없고, 쉽사리 타협해서도 안 되는 두 세계관이지만, 일단의 이해와 존중을 통해 인류의 진보에 기여할 공동 노력의 길을 탐색해보는 이런 모습은 퍽 고무적이다. 하지만 두 저자는 논쟁이 끝나는 지점까지 자신의 세계관에 신뢰와 신념을 보이며 그것을 차근차근 설명해낸다. 마치 어느 한쪽 바퀴라도 헐거워지면 우주라는 수레가 삐거덕대다가 결국 서버리고 말 것이라는 듯. 레너드와 디팩, 과학과 영성. 그 어느 쪽을 선택하든, 이 책을 선택한 독자는 책장을 넘길수록 지적 충만감을 더해가는 만족스런 독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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