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의 도전

정희진 지음 | 교양인 펴냄

페미니즘의 도전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이 책을 읽은 사람

나의 별점

읽고싶어요
14,000원 10% 14,000원

책장에 담기

게시물 작성

문장 남기기

분량

보통인 책

출간일

2013.2.12

페이지

304쪽

이럴 때 추천!

고민이 있을 때 읽으면 좋아요.

#소통 #여성주의 #젠더 #차별 #페미니즘 #혐오

상세 정보

소통하고 공존하는 세상을 꿈꾸는 이들에게
페미니즘에 대한 선입견을 깨뜨려주는 책

페미니즘에 대해 많은 이들이 갖고 있는 선입견을 깨주는 책이다. 저자는, 페미니즘은 여성의 참혹한 현실을 고발하는 학문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며, 여성의 눈으로 이 세계를 다시 들여다보자고, 여성의 목소리로 이 세계를 재구성해보자고 요청한다.

기존 여성주의 책들이 여성주의 사유 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에겐 조금 어렵게 느껴지는 이론적인 책들이었다면, 이 책은 기초부터 시작한다. 여성주의란 무엇인지, 그것이 왜 필요한지, 여성주의를 통해 나와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친절하게 알려준다.

저자가 말하는 다른 목소리에는 여자뿐 아니라, 장애인, 유색 인종, 성판매 여성 등 지금까지 세상에서 소외되어 있었던 변방의 목소리들도 포함된다. 저자는 여러 다양한 목소리들이 경쟁하고 소통하고 공존하는 그런 세상을 만들자고 한다.

이 책에는 여성운동가이자 여성학자로서, 저자 자신이 겪은 수많은 관계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저자는 때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보아 왔으며, 그것이 상대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는지를 솔직하게 고백한다.

상세 정보 더보기

이 책을 언급한 게시물4

경쓰님의 프로필 이미지

경쓰

@gyeongsss

세상 지식이 모두 평등한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다. 여성, 여성주의에 무지한 것을 당당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난다. 아직도 여성주의를 아는 것 자체로 비난받는 경우도 흔하다. 어떤 지식은 아는 것이 힘이지만, 어떤 지식은 모르는 게 약이다. 두 경우 모두 지식이 특정한 사회의 가치 체계에 따라 위계화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질문은 질문하는 사람의 교양과 예의뿐 아니라 권력을 드러낸다. 왜 여자들이 취업하려고 하지? 장애인도 애를 낳을 수 있나? 왜 노인이 사랑을 해요? 동성애자도 실연당해요? 흑인도 철학자가 될 수 있나? (이주 노동자에게) 왜 한국에 왔나? 이 같은 질문은 남성, 비장애인, 젊은 사람, 이성애자, 백인, 한국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권리가 어떤 사람에게는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야 할, 혹은 용서받지 못할 욕망으로 간주된다.

여성은 ‘약자’일수록 여성으로 인식되며, 남성은 ‘강자’일수록 남성으로 간주된다.

이제까지 여성은 인식 주체가 아니었다. 따라서 세계를 창조할 수 없었다. 단지, 말해지는 대상, 남자 갈비뼈의 한 조각, 남자가 만든 판타지, 국민·시민·민중이 아니라 그들이 소유한 가장 비싼 동산(動産)일 뿐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지배 이데올로기나 대중매체에서 떠드는 것 이상을 알기 어렵다. 알려는 노력, 세상에 대한 애정과 고뇌를 유보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하지만 여성들은 안다. 장애인이나 노동자가 인간으로서 권리를 주장할 때와는 다르게, 자기 권리를 외치는 여성을 사회가 얼마나 싫어하는지를.

여성은 ‘어머니’이거나 ‘창녀’일 뿐, 지식인이나 중산층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이런 사람들이 생각하는 ‘올바른’, ‘과학적’ 여성운동은, 여성을 불쌍한 피해자로 재현하여 시혜자인 남성 주체의 권력을 위협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희생자화는 타자화의 가장 세련된 형태일 뿐이다).

‘정신 차려야 할’ 집단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다. 남성들이 집에서 노동하지 않는 한, 여성에게 사회 진출은 이중의 중노동만을 의미할 뿐이다.

이상적인 모성애의 대상은 아들일 뿐이다. 이에 대한 가장 적실한 사례는 여아 낙태일 것이다. 딸은 자식의 범주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수백만 명의 (여성이 아니라) 어머니들은 ‘어미의 본능’마저 거부하며 자발적으로 아이를 살해한다. 자녀는 성별에 따라 선택되는 것이다.

사실 ‘생계 부양자 남성/가사 노동자 여성’이라는 성역할 모델은 극히 일부 중산층만의 전형일 뿐, 대부분의 가정에서 여성은 생계 부양자이자 가사 노동자다. 하지만 여성은 어머니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남성 임금의 절반을 받고, 남성은 아버지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여성보다 더 많이 받는다. 잠재적 어머니로 분류되는 여성 노동자는 노동 시장 진입에서부터 임금, 승진에 이르기까지 ‘어머니냐, 노동자냐’라는 정체성을 택일할 것을 강요받거나, 택일하지 못할 바에야 둘 다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

모든 여성은 어머니라는 생각 때문에 여성은 다 같다고 간주된다. 그래서 한 여성의 실수나 무능력은 언제나 전체 여성을 욕 먹이는 일이 된다.

남성은 사람이기 때문에 모든 남성 명사에는 인(人)이 붙지만, 여성 명사에는 녀(女)가 붙는다. 우리말 여성형 지칭에서 유일하게 인자(人字)가 붙는 경우는 미망인(未亡人, 남편을 따라 죽지 않은 여자)뿐이다(이 용어는 남편이 사망하면 아내가 뒤따라 죽는 인도의 사티 풍습의 한국판이라 할 수 있다).

남성은 공적 영역에서 만난 여성도 자신이 사적 영역에서 만난 여성의 연장으로 본다. 그들의 ‘휴식처’인 가정에서 만나는 어머니·누이와 ‘놀이터’인 술집에서 만나는 접대 여성이, 남성이 여성에 대해 알고 있는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과 동료나 경쟁자로 관계 맺어본 경험이 없는 것이다.

적지 않은 여성들이 아버지에게 강간당하는 것은 가부장제를 조금도 위협하지 않는 사건이지만, 아들과 어머니의 ‘관계’는 그것이 강간이든 상간이든, 사회적 추방을 의미한다.

어느 누구도 타인의 인생을 대신 살 수 없지만, 유독 어머니만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는 남편을 출세‘시키고’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야’ 한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맞으면서도 그를 변화시켜야 하고(피해자는 해결사가 되어야 한다), 어머니는 생명을 위협하는 폭력 앞에서도 자녀들에게는 모성애를 발휘해야 한다. 아이를 남기고 폭력 가정을 탈출하는 여성에게 쏟아지는 비난은, 순결이 그러하듯이 모성애 역시 여성의 목숨과 맞바꿔야 한다는 남성 사회의 메시지다. 훌륭한 어머니가 되려는 여성은 자신을 파괴하는 유전자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어머니는 남을 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혼한 여성이 자신의 성역할에 충실하며 집에만 머무를 때, 어머니가 직장 생활을 하지 않을 때 그녀는 나의 어머니다. 하지만 그녀가 욕망을 드러내며 집 밖으로 나올 때, 남의 어머니일 때 그녀는 아줌마다. 그녀가 집에서 내게 밥을 해줄 때는 어머니지만, 그녀 자신이 음식점에서 남이 해준 밥을 먹을 때는 아줌마다. 여성은 평생토록 서비스를 하는 주체이지 받는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타인의 서비스를 당당하게 요구하는 여성은 모두를 불편하게 한다. 여성이 공공 장소에서 자기 욕망으로 젖가슴을 드러낼 때 그녀는 필시 몸을 파는 여성이거나 ‘미친 년’일 것이다. 그러나 아이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서라면 성스럽고 숭고하다.

한국 사회는 성폭력 피해 여성의 인권에 관심이 없으며, 성폭력과 성관계를 구분하지 않는다. 가장 섹시한 성관계는 성폭력이라고 믿고 있다.

하긴, 어차피 외로움이란 삶의 조건이어서, 결혼해도 외롭고 안 해도 외롭다. 시인 신현림의 표현대로, “여자에게 독신은 홀로 광야에서 우는 일이고, 결혼은 홀로 한 평짜리 감옥에서 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전통적으로 성과 사랑의 주체는 남성이지만,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노동은 여성이 담당한다. 여성이 노동을 그만두는 순간, 대부분의 관계도 끝난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배려, 보살핌, 사랑의 생산을 위해 별다른 노동을 하지 않는다. 이것이 성별 분업인데, 남성들은 주로 공적 영역에서 활동하면서 ‘사적’인 영역이라고 간주되는 가족이나 연애 관계에서 관계성을 경시 혹은 부정함으로써 여성의 육체 노동, 감정 노동, 정신 노동에 무임승차한다. 관계에서 남성의 ‘과묵함’이나 모든 면에서 감정적이지 않으려는 심리는 이 때문이다.


남성에게 섹스는 (당연히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잘하거나 못하는 것이지만, 여성에게 섹스는 좋거나 싫은 것이다. 여성에게는 남성과 다른 (차별적인) 규범이 적용된다. 여성이 섹스를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고, 섹스를 잘하거나 못할 때, 그녀에게는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자, ‘걸레’라는 낙인과 추방이 기다린다.

여성은 남성의 벗은 몸을 보고 공포를 느끼지만, 남성에게 여성의 벗은 몸은 쾌락의 대상이다. 남성은 돈을 지불하면서 여성의 몸을 즐길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몸무게는 절제와 인내력 등 자기 관리의 지표일 뿐 아니라, 여성의 인격과 정체성의 기준이 된 지 오래다. 물론 뚱뚱한 남성도 환영받지 못하지만, 몸무게가 일상적으로 남성의 삶을 통제하거나 규율하지는 않는다. 여성의 체중은 곧바로 취업·결혼·대인 관계·자존감으로 연결되는,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다. 여성의 거식증은 연속체로 존재한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현대 가부장제 사회에서 먹는 양을 조절하지 않는 여성은 거의 없다.

성범죄의 원인은 일상의 성차별, 성역할 구조인데, 이를 수용하게 되면 모든 남성은 피곤해진다. 남성은 잠재적 피고인이 되지 않기 위해 기존의 여성관, 세계관 자체를 수정해야 한다. 그러나 소수 ‘변태’의 문제로 축소하면 성범죄는 남성 문화의 결과가 아니라 특수화, 엽기화된다.

그래서 여성운동은 “먹고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여성들이 하는 운동이 아니라 “맞아 죽지 않으려는” 여성들의 최소한의 자구책이다. 미국의 시각이 걸러지지 않은 보도라는 것을 감안해야겠지만, 최근 어느 시사 잡지는 소말리아 내전에 자원한 여성의 인터뷰를 실었다. 그녀는 전쟁 상태가 훨씬 살 만하다고 말한다. 군인으로 음식을 배급받고 남편에게 맞지 않기 때문이다. 가정이 평화로운 공간이라는 언어는 누구의 경험인가? 여성에게 무엇이 일상이고 무엇이 전쟁인가? 성별을 독자적인 사회적 모순, 정치 제도로 인정하지 않는 한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남편이 아내를 때리다가 죽이는 것은 ‘과실치사’지만, 아내가 정당방위로 남편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때리는 남편이 가정파괴범이 아니라, 폭력에서 탈출하는 피해 여성이나 이들을 돕는 여성운동가가 가정파괴범이다.

무엇이 사회이며, 사회는 어디에 있는가? 가정과 사회는 다른가? 남편에게 당하는 고문과 국가로부터 당하는 고문의 내용은 큰 차이가 없다. 다른 점이 있긴 하다. 국가 기관에서 고문당한 사람은 고문 가해자에게 밥을 차려주지는 않아도 되며, 평생 맞는 것도 아니다. 국가폭력의 가해자들은 아무리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해도 결국 법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나 가정은 치외법권 지대이며 아내를 구타하는 남성들은 광범위한 사회적 이해와 지지를 받는다. 남녀에게 차별적으로 적용되는 성역할 규범이 남편의 폭력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가정폭력 피해 여성에게, 목숨을 위협받는 폭력 상황에서도 가해 남편의 권력(=‘버릇’)을 고치고 가정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 전쟁, 조직폭력, 학교폭력의 피해자에게 가해자를 감동시켜 폭력을 멈추게 하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가?

인간은 누구에게나 맞지 않을 권리가 있지만, 아내일 때는 예외이다. 그 인간이 여성이라면, 여성이 아내가 되면, 맞지 않을 인간의 권리보다 여성으로서 참아야 할 도리가 더 강조된다. 여성은 너무도 쉽게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된다. 그래서 가정폭력 방지법으로 고소당한 폭력 남편들은 “(사람이 아니라) 집사람을 때렸을 뿐인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냐.”고 억울해한다.

가정폭력은 피해가 명백히 가시화되어야만 ‘진실’이 되기 때문에, 문제 해결은 피해 이후에 논의된다. 여성운동가들이 가정폭력이 사회적 문제임을 주장하기 위해 심각성을 강조하는 것도 이 같은 맥락이다. 여성들이 가정에서 당하는 폭력은 ‘개인적’인 것으로 간주되므로, ‘사회적’인 문제가 되기 위해서는 피해가 끔찍하고 심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성의 몸을 사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권리’인가, 아니면, ‘남성으로서의 권력’인가?

남성들은 ‘양성 평등’을 위해 여성과 같아지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가사 노동, 자녀 양육 등 주로 여성이 해 왔던 재생산 노동은 경시되고 비하된다. 우리 사회에서 남성이 ‘여성적인 노동’을 하는 것은 수치와 무능력으로 여겨진다. 현재의 인권 개념에도, 보살핌과 돌봄, 배려의 가치 같은 ‘여성적 경험’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남성 중심 사회는 여성 개인을 여성이라는 전체 집단의 속성에 귀속시키지만, 사실 남성 사회가 원하는 여성의 개념은 대단히 협소하다. 정숙하고 젊고 예쁜 여성만이 여성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다. 예를 들어 여성 흡연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이 있지만 모든 여성에 대해 그런 것은 아니다. ‘술집 여자’나 할머니 혹은 여성 지식인의 흡연은 자연스럽다. 한국 사회는 젊은 미혼 여성의 흡연만 처벌한다. 이는 젊은 여성만이 진정한 여성이기 때문에, 그들의 흡연은 여성성을 위반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술집 여자’와 할머니는 남성 사회가 규정한 여성의 범주에서 벗어난 여성이기 때문에 그들의 흡연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성이 성산업에 종사하는 것은, 그녀가 가난해서라기보다는 여성이기 때문이다. 가난하지 않은 여성도 인신매매에 의해 성판매 여성이 된다. 가난한 남성이라 할지라도 여성에게 성을 팔지는 않는다. 성매매는 계급의 문제가 아니라 성차별의 문제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남성이 파는 것은 몸이지 성이 아니다. 그러나 여성의 몸은 그 자체로 성으로 간주되며, 여성의 성은 팔거나, 팔리는 상품이 된다. 남성 노동자가 파는 것은 성이 아닐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남성 노동자는 노동자일 뿐 팔리는 노예가 아니다.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할 규범적인 여성성을 대표하는 중산층 여성은 군대에서 허드렛일을 할 이유가 없다. 때문에 남자들 틈에서 살기로 작정한, ‘고귀함을 잃어버린’ 가난한 여성들은 함부로 대해도 상관없으며, 이들에 대한 성적 비하는 남성 군인들의 성 정체성 확립과 남성 연대를 확인하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남성성은 여성에 대한 비하와 혐오를 전제로 구성되기 때문에, 후방에서 남성의 보호를 받아야 할 여성이 남성과 참호에 같이 있는 것은 남성의 자아를 짓밟는다.(“내가 기집애랑 이러려고 군대에 왔나.”) 여성이 전투직에 종사하는 것은, 그 자체로 남성 정체성을 위협하는 성역할 파괴를 의미한다.

군대가 젠더의 산물이며, 폭력과 섹스가 결합한 제도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기지촌은 이미 그 자체로 성별화된 공간이다. 군대 내 성매매를 ‘위안’이나 ‘휴식’ 등의 용어로 표현하는 것은, 정치적 권력 행위로서의 성폭력 문제를 ‘신체의 요구’라는 생물학적 주제로 이동시켜, 가해 남성의 책임을 비가시화하고 여성의 고통을 주변화한다.

폭력은 원래 이유가 없다. 권력 행동에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폭력에 이유가 있다면,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있을 뿐이다. 사회운동은 그 이유를 묻는 것이 아니라 조건을 파악해 그것을 ‘제거’하고 제약하는 것이다.

페미니즘의 도전

정희진 지음
교양인 펴냄

1개월 전
0
별님의 프로필 이미지

@rbkngclrwszq

깊이가 있지만 이해하기 쉽고 재미도 있다!

페미니즘의 도전

정희진 지음
교양인 펴냄

읽고있어요
2018년 3월 25일
0
Han💜님의 프로필 이미지

Han💜

@yofsjapb4zem

  • Han💜님의 페미니즘의 도전 게시물 이미지
책의 일부는 논문을 읽는 느낌이라 나에겐 조금 어려웠던 책이다.

사회 속에서의 여성의 위치를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젠더 구분을 통한 일상 속 정치와 그 속에서 정치 권력을 쥐지 못한 여성의 현실을 보면서 화가 났고, 또 속상했다.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머리말에 쓰여있듯 많이 상처받았다.
그러나 나는 여성혐오에 대해 절대 알지 못하던 과거의 나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세상 속 나를 옥죄는 모든 것에 대해 불편함을 느끼는 '프로불편러'로 살아가는 지금의 내가 좋다.

이 말이 딱 들어맞을 것 같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페미니즘이라 말하고싶다.

페미니즘의 도전

정희진 지음
교양인 펴냄

2018년 3월 8일
0
집으로 대여
지금 첫 대여라면 배송비가 무료!

상세정보

페미니즘에 대해 많은 이들이 갖고 있는 선입견을 깨주는 책이다. 저자는, 페미니즘은 여성의 참혹한 현실을 고발하는 학문이 아니라고 이야기하며, 여성의 눈으로 이 세계를 다시 들여다보자고, 여성의 목소리로 이 세계를 재구성해보자고 요청한다.

기존 여성주의 책들이 여성주의 사유 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에겐 조금 어렵게 느껴지는 이론적인 책들이었다면, 이 책은 기초부터 시작한다. 여성주의란 무엇인지, 그것이 왜 필요한지, 여성주의를 통해 나와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친절하게 알려준다.

저자가 말하는 다른 목소리에는 여자뿐 아니라, 장애인, 유색 인종, 성판매 여성 등 지금까지 세상에서 소외되어 있었던 변방의 목소리들도 포함된다. 저자는 여러 다양한 목소리들이 경쟁하고 소통하고 공존하는 그런 세상을 만들자고 한다.

이 책에는 여성운동가이자 여성학자로서, 저자 자신이 겪은 수많은 관계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저자는 때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잘못된 편견을 가지고 다른 이들을 보아 왔으며, 그것이 상대에게 얼마나 큰 상처가 되었는지를 솔직하게 고백한다.

출판사 책 소개

여성주의 패러다임의 전환을 이끌어낸 획기적인 저작,
더 냉철하고 예리한 시선으로 8년 만에 돌아오다!
‘남성 언어’로 길들여진 세상에 던지는 도발적 문제 제기!


‘페미니즘 교과서’라 평가받으며, 페미니즘에 대한 인식의 전환을 이끌어낸 《페미니즘의 도전》이 출간 8년을 맞아 개정증보판으로 돌아왔다!
《페미니즘의 도전》은, ‘페미니즘’이라는 논쟁적 주제를 다룬 책으로는 이례적으로 14쇄를 찍으며 오랜 시간 독자들이 찾는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았다. 이 책에서 정희진은 우리 사회의 다양한 담론을 ‘여성의 언어’로 재해석하여 우리 안에 강고하게 뿌리 내린 남성 중심 세계관의 편견과 선입견을 가차 없이 드러냄으로써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초판 출간 후 《페미니즘의 도전》은 인식의 지평을 넓혀준 책으로서 수많은 독자들의 격찬을 받았으며, <한겨레>가 뽑은 ‘2005 올해의 책’, 출판인들이 직접 뽑은 ‘함께 읽고 싶은 백 권의 책(백책백강 프로젝트)’에 선정되기도 했다. 또한 새로운 대안적 인식론으로서 페미니즘이 지식의 형성 과정, 권력의 작동 지형과 역사를 파악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다는 점에서 대학의 글쓰기 수업이나 토론 수업의 교재로도 널리 쓰이고 있다.

“인식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온 문제작!


《페미니즘의 도전》에서 여성학자 정희진은 ‘여성의 눈’으로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을 새롭게 들여다볼 것을 요청한다. 이 책에서 정희진은 가정폭력, 성과 섹스의 문제, 성판매 여성 문제, 군사주의 문화, 동성애 등 우리 사회에서 논란이 된 여러 이슈와 사건들을 여성의 시각에서 재해석한다. 찬성 아니면 반대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시각을 뛰어넘는 정희진의 새로운 재해석은 새로운 발견, 새로운 각성을 낳는다. 나아가 저자는 여성과 장애인, 외국인 노동자, 성판매 여성 등 오랫동안 소외당해 온 우리 사회의 ‘다른 목소리’들이 서로 경쟁하고 소통하고 공존하는 세상을 꿈꾼다. 페미니즘은 투쟁과 쟁취가 아닌 협상과 사유, 공존과 상생의 길이다.

기존 여성주의 책들이 여성주의 사유 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에겐 조금 어렵게 느껴지는 이론적인 책들이었다면, 이 책은 기초부터 시작한다. 여성주의가 무엇인지, 그 개념에서부터 그것이 필요한 이유와 여성주의를 통해 달라질 나와 세상의 모습을 이해하기 쉽게 써 내려간다. 저자의 주장은 때로 도발적이고 상식을 벗어난 듯 보여 선뜻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일반적인 상식이라는 것이 결코 상식이 될 수 없음을 이 책은 알게 해준다. 그것은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 온 가부장제 사회의 남성 지배 이데올로기가 주입한 또 다른 ‘편견’일 뿐이다. 이 책은 보편이라 믿고 객관이라 믿었던 세계가 편견과 왜곡에 의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해주는 명쾌한 도전이며, 인식의 지평을 균열시키는 위험한 글이다.

새로운 세계관으로서 ‘페미니즘’을 보여주다


개정증보판에서는 기존 내용을 일부 첨삭하고 최근 사회적 이슈를 다룬 글들을 추가했다. 새로운 인식론으로서 여성주의를 논하는 ‘개정증보판 머리말’과, 최초의 ‘여성 대통령’ 박근혜의 성 정체성 논란, 성범죄자 ‘화학적 거세’와 같은 최근의 이슈들을 특유의 섬세한 정치적 감수성과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재구성한 3편의 글, ‘글로벌 자본주의 시대의 젠더’를 주제로 한 글이 추가되었다.
한층 단단해진 정희진은 더 냉철하고 예리한 시선으로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재해석한다.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라는 수식어가 붙은 박근혜의 성(gender) 정체성이 “권능 있는 아버지의 딸, 공주”에 불과하다는 문제 제기는 전복적이다. 정희진은 여성 대 남성이라는 생물학적 성의 구별보다 여성들 간의 차이에 주목할 것을 주장한다. “여성들은 계급, 인종, 민족, 나이, 장애 여부, 동성애자냐 이성애자냐 등의 성 정체성에 따라 각기 다른 종류의 억압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숱한 논란 속에서 2011년 7월부터 시행된 성폭력범죄자의 성충동 약물치료법, 이른바 ‘화학적 거세’ 논란에서는 그 안에 숨겨진 가부장적 의식을 밝혀낸다. 3부에 추가된 논문 <글로벌 자본주의와 남성성, 폭력의 시장화>는 “급격하고도 본질적으로 재구성되고 있는 작금의 자본주의와 국민국가의 변형을 고용의 종말, 폭력과 남성성을 중심으로” 쓴 글이다.

“앞으로 우리 사회의 페미니즘이 성차에 대한 문제 제기를 ‘넘어’ 사회 현상 자체를 파악하는 주요한 장치로서, ‘절망 사회’의 대안적 인식론으로서 상상력의 마르지 않는 수원(水源)으로서 자리 잡기를 기대한다. 여성주의는 ‘흘러간 사상’, ‘한때 유행’이 될 수 없는 사유다. 여성주의는 고갈되지 않는, 깊이를 알 수 없는 유유한 수원이다. 현실이 바로 그 수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녀노소 인류 모두를 괴롭히는 자본의 고속 질주나 환경 파괴, 경쟁 중심의 세계관, 장애인과 노인과 건강 약자에 대한 비하, 기아와 질병에 대해 다른 관점을 지닐 수 있을 것이다. 페미니즘을 남녀에 관한 이슈에 국한하지 않고 삼라만상(인식의 모든 대상)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 접근 방식, 논의 방식이라는 인식의 방법으로 이해한다면, 자신과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킬 수 있다. 우리는 현실에서 도피하거나 현실에 ‘반대하지 않고’, 현실을 인정하고 사랑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현실을 살 수 있다. 혁명은 사회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재정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개정증보판 머리말>에서

주요 내용 미리 보기


나는 안다는 것은 상처받는 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다는 것, 더구나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삭제된 역사를 알게 되는 것은, 무지로 인해 보호받아 온 자신의 삶에 대한 부끄러움, 사회에 대한 분노, 소통의 절망 때문에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 여성주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더욱이 편안할 수는 없다. 다른 렌즈를 착용했을 때 눈의 이물감은 어쩔 수 없다. 여성주의뿐만 아니라 기존의 지배 규범, ‘상식’에 도전하는 모든 새로운 언어는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삶을 의미 있게 만들고, 지지해준다. 여성주의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의문을 갖게 하고, 스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대안적 행복, 즐거움 같은 것이다.
― <머리말>(21쪽)에서

인간은 누구나 소수자이며, 어느 누구도 모든 면에서 완벽한 ‘진골’일 수는 없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성별과 계급뿐만 아니라 지역, 학벌, 학력, 외모, 장애, 성적 지향, 나이 등에 따라 누구나 한 가지 이상 차별과 타자성을 경험한다.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 속에서 자신을 당연한 주류 혹은 주변으로 동일시하지 말고, 자기 내부의 타자성을 찾아내고 소통해야 한다. ― <머리말>(32쪽)에서

나는 페미니즘은 저항이론?저항운동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본주의가 생겨난 지 3백 년도 안 되었지만, 한국에 자본주의가 들어온 지 1백 년도 안 되었지만, 자본주의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거의 없다. 하물며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가부장제의 위력으로부터 그 누가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은 협상, 생존, 공존을 위한 운동이다. 여성운동은 남자 시스템에 저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남성의 세계관과 경험만을 보편적인 인간의 역사로 만드는 힘을 조금 상대화시키자는 것이다. 남성의 삶이 인간 경험의 일부이듯, 이제까지 드러나지 않았던 여성의 경험도 인간 역사의 일부임을 호소하는 것이다. ― <“태초에 목소리가 있었다”>(50쪽)에서

이제까지 여성은 인식 주체가 아니었다. 따라서 세계를 창조할 수 없었다. 단지, 말해지는 대상, 남자 갈비뼈의 한 조각, 남자가 만든 판타지, 국민?시민?민중이 아니라 그들이 소유한 가장 비싼 동산(動産)일 뿐이었다. 여성의 시각에서 보면 기존 언어의 내용은 물론이고, 담론의 형성 구도 자체가 붕괴된다. 여성이 인식 주체가 되면 노동자가 생산 수단을 소유하는 것보다 더 ‘근본적으로’ 세계가 흔들리고 새롭게 재구성되기 시작한다. 그러니, 어찌 여성주의가 위험하지 않을 수 있으랴. ― <“태초에 목소리가 있었다”>(44쪽)에서

“공략하기보다 낙후시켜라”, “착한 여자는 천당 가지만, 나쁜 여자는 어디든 간다”라는 말처럼, 나는 여성주의가 저항이라기보다는 한 가지 목소리만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여성들이 그리고 남성들이 살아남기 위한 협상 수단이라고 본다. …… 여성주의는 차이나 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여성주의는 정치적 올바름, 통일성이나 단일성의 가치보다는 대화의 가치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럴 때, 여성뿐만 아니라 다른 타자들의 목소리도 들리게 된다. ― <“태초에 목소리가 있었다”>(53쪽)에서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라는 사회적 위치와 삶의 경험은, 주류의 시각에서 보면 열등함의 근원이고 극복되어야 할 장애이다. 그러나 반대로 억압받는 자의 시각에서 기존 사회를 보면, 이들의 타자성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상상력과 지성을 가능하게 하는 자원이 된다(이것이 바로 모든 탈식민주의 사유의 출발점이다). 그래서 주류의 언어를 규범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익힐수록 이들은 더욱 열등해지지만, 이들이 자신의 경험과 노동에 근거하여 자기 언어를 갖기 시작하면 말할 수 없이 ‘똑똑해진다’. 저항할수록 권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 <여성주의, ‘가장 현실적인’ 세계관>(88쪽)에서

여성운동은 사회 안에서 여성의 지위를 논하자는 것이 아니다. 여성의 시각으로 사회·역사·정치를 재구성하자는 것이다.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의 문제는 기존의 공적 영역 중심의 협소한 정치 개념을 바꾸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다. 이제까지 여성은 역사 밖에, 여성 문제는 정치 밖에 존재했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등 기존의 정치전선 자체가 남성의 관심사에 의해 설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 <가정폭력의 정치학>(141쪽)에서

폭력은 원래 이유가 없다. 권력 행동에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폭력에 이유가 있다면, 그것을 가능케 하는 조건이 있을 뿐이다. … … 사랑과 폭력은 원래 같은 의미지만, 특히 상대방의 상태와는 무관하다는 점에서 더욱 비슷하다. 사랑이나 폭력은 모두 자기 확신 행위이지 상대방의 매력이나 잘못과는 무관하다. 이렇게 본다면, ‘묻지마 폭력’의 이유는 단지 피해자가 ‘거기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피해자의 잘못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폭력의 시비(是非)와 정의를 분석하려는 태도에서 다른 시각으로의 전향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 <글로벌 자본주의와 남성성, 폭력의 시장화>(274~275쪽)에서

무제한 대여 혜택 받기

현재 25만명이 게시글을
작성하고 있어요

나와 비슷한 취향의 회원들이 작성한
FLYBOOK의 더 많은 게시물을 확인해보세요.

지금 바로 시작하기

플라이북 앱에서
10% 할인받고 구매해 보세요!

지금 구매하러 가기

FLYBOOK 게시물이 더 궁금하다면?

게시물 더보기
웹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