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한 저항

이라영 지음 | 교유서가 펴냄

타락한 저항 (지배하는 ‘피해자’들, 우리 안의 반지성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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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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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쪽

상세 정보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세 가지 사건을 중심으로 진지함과 생각에 대한 혐오, 반지성주의가 어떻게 소수자와 약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과 결합하는지, 표현의 ‘자유’와 저항할 ‘권리’의 관계를 살피는 책이다. 특히 이러한 흐름이 보수와 진보, 거대악과 그에 대응하는 저항이라는 이분법과 결합하며 저항과 피해자라는 보편의 위치를 누가 점하고 누구의 목소리가 지워지는지 치밀하게 짚어낸다.

반지성주의란 지식이 없는 무지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알기를 거부하는’ 태도를 말한다. 가령, 혐오 발화자들을 보면 그들은 혐오하는 대상을 모르기 위해 애쓴다. 혐오 발화를 하는 이들도 나름 지식으로 무장한다.

기득권 유지를 위해 자신이 알고 싶지 않은 문제를 적극적으로 ‘모르려고’ 하며, 시대에 맞는 새로운 ‘마녀’인 ‘충’을 계속 만들어내 인간사회에서 몰아낸다. 나아가 정치적 올바름과 진지한 성찰은 폭로, 재미 앞에서 쉽게 솔직하지 못한 ‘위선’이 되고, 불편한 진실은 외면한 채 마치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것 같은 ‘취향’이라는 단어와 ‘표현의 자유’라는 외피를 두른 ‘혐오의 자유’라는 차별이 횡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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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연

@yijuyeonxm0c

책 속의 문장들


들어가며: 진지충의 탄생
9쪽
이러한 진지함이 부정될 때 유머의 질도 하락하기 마련이다. 비판적 성찰 없이 타인의 수치심을 재료 삼은 유머(라는 이름의 차별 발언)에 익숙해진다. 진지함에 낙인을 찍는 언어의 증가는 생각하는 사람을 향한 조롱과 경멸이 점점 만연해가고 있음을 방증한다. 진지함에 대한 불편함을 우리는 불편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진지함이 위선이 되변 의구심과 회의를 표출하기 어려워진다.

13쪽_ 마르쿠제에 따르면 "일차원적 사유는 정치를 만들어내는 사람들과 대량 정보의 조달자들에 의해 조직적으로 조정된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여가와 놀이가 일상에 들어왔지만, 소비로 비판 욕구를 없애버리는 체제가 일차원적 인간을 양성한다. 이 '기만적 자유'속에서 느리게 흘러가는 '사유의 습관'이 점차 낯설어진다.

14쪽_ 그러나 경제적으로 말하고 경제적으로 읽다가 생각도 경제적으로 하게 생겼다. 요약은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한 후 새롭게 소화시킨 독자적인 결과물이어야 한다. 다른 이가 해 주는 요약은 전체 맥락을 누락하기에 사안에 대한 이해를 왜곡하기 쉽다.

16쪽_ 정보보다는 화두가 필요하다. 화두는 질문의 근원지다. 화두가 있는 삶을 산다는 게 쉬운 노릇은 아니다. 어쩌면 이 빠름과 요약을 권하는 시대에 부응하지 않으려면 더욱 불친절하고 느리게 생각하는 태도를 고집하는 게 낫지 않을까. 제 생각의 지도를 스스로 작성하면 길을 잃지 않는다.

24쪽_ 정치적 진보와 문화적 자유는 누구를 기준으로 한 진보와 자유일까. 이 '지배하는 피해자'의 시각이 쉽게 '보편'의 위치를 차지해 여러 관점과 목소리를 깔아 뭉갠다. 보편과 객관, 중립의 위치에서 자신이 발화한다고 생각할 때 타인에 대한 지적, 윤리적 폭력은 쉽게 정당화된다.

; 글의 논리가 계속 따라가면서 읽게 한다. 무슨 말을 어떤 근거를 들어서 끌고 갈지가 궁금해진다. 또한 읽으면서 수긍할 수 있는 글도 있고, 이런 관점과 사유가 있어서 이런 논리를 펼친다는 생각이 든다.
공감했던 부분의 문장을 옮겼다. 진지충에 대한 사유로 시작하는 프롤로그는 이 책의 성격과 논의될 주제에 대한 명확한 저자의 관점이 보여서 읽기의 집중성이 더 좋았다.


1장 블랙리스트와 저항
54쪽
자신이 맡은 업무에서 일어난 과실이 그의 성별로 비판받을 이유는 없다. 이때 성별에 대한 집착은 필연적으로 '남성이 아닌'몸에 대한 조롱을 낳는다. 여기서 성별의 자리에 다른 개념을 넣어보자. 장애인이 정치를 했는데 실정을 했을 때 그의 장애가 있는 몸으로 조롱받아야 할까. 박근혜를 비판하다는 그림들은 출산부터 누드까지 그의 성별에 집착했다. 여성을 몸으로 비난하지 않고서도 표현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 이 장을 읽으면서 한국 사회에서 여성이 어떤 자리에 최고층에 있을 때 다루어지거나 평가받는 이중의 시선과 사고를 발견했다. 가장 의식이 번쩍하게 되었던 부분이다. 정치인으로서의 실정과 능력 없음으로 평가돼야 할 문제에서 '여성'으로만 평가와 대가를 받는다는 것을.


2장 <나꼼수>와 무학의 통찰
94쪽_ 반지성주의자는 사유보다 감각에 의지한다. 그것이 솔직함으로 수렴된다. 사유가 고고한 먹물의 허세라면 감각은 때묻지 않은 잡놈의 순수함으로 여겨진다. 이 순수함이 곧 인간적이다. 자신이 느끼는 '기분'이 곧 진리다. 내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이들이 곧 적이다. 현상은 단순해진다.

106쪽_ 미디어 환경이 변하면서, 우리는 이미지를 기반으로 한 자극을 통해 '진실'에 접근하는 방식에 익숙해졌다. 정리된 언어보다는 영상이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더 크다. 사진과 마찬가지로 영상은 강렬한 이미지를 남긴다.

현실을 카메라가 '직접' 만나면 '진실'을 보여준다는 믿음은 카메라에 포착된 현상의 단면을 과잉 신뢰하게 만든다. 여기에 애니메이션을 덧붙여 상상의 영역을 시각화 해 보여주면 더 강렬한 진실의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

;인상적인 논제는 대한항공 폭파범 김현희와, 고김광석이 아내 서혜순을 다른 무비 저널리즘에 대한 것이다. 언론 보도로 접한 사건에 대해서 이런 관점을 가지고 이끌어 가는 사유의 폭이 닫힌 문이 아닌 여러 문들이 있고, 어떤 관점이 필요한지 개인적으로 새롭게 환기된다.


3장 메갈리아: 침묵당하기에서 교란시키기로
128쪽, 129쪽
'메갈리아'의 활동은 사라졌지만 '메갈리아'라는 이름은 지금도 한국 사회에서 페미니즘을 공격하는 수단이며 여성의 입을 틀어막는 검열의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메갈'은 어느새 낙인의 이름이 되었다. '메갈'은 진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한다. 세상을 해석하든, 변화시키든, 무언가를 해야 한다. 그러나 누가 진짜인지를 두고 겨루는 인정투쟁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좌파를 감별하는 좌파 감별사, 페미니스트를 감별하는 진짜 페미니스트.

나름 기본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면 대부분 겉으로는 페미니즘 자체를 결코 부정하진 않는다. 대신 페미니즘의 부정적 영향을 강조하려고 애를 쓴다. 이들은 프랑스의 마린 르펜처럼 극우의 얼굴 한 '페미니스트'를 부정적 사례로 언급하기 좋아한다. 그리고 '진정한' 페미니스트를 강조하며 오늘날 한국의 페미니스트는 진짜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한다.

145쪽_ 젠더 문제를 두고 '본능'을 옹호하며, 자연법칙을 내세울 때가 많다. 운동과 지성의 흐름을 거부한 채 '남성의 본능'에 갇혀 알기를 거부한다. 자신의 성차별을 인식하지 않기 위해 기꺼이 '애 아니면 개'가 된다. 그래서 본능, 욕망, 날것, 야성, 사냥꾼이라는 개념을 자주 들먹인다. 본능을 옹호하는 이들은 여성의 목소리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 '원시'로 돌아가 무지를 선택한다. 앎보다는 권력 유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150쪽_ '이해'는 언제나 약자의 몫으로 남는다. 성소수자는 이성애 사회를 이해해야 하며, 여성은 가부장제를 이해해야 하며, 장애인은 비장애인을 이해해야 한다. 반면 이해받는 이들은 조심할 필요 없는 권력을 휘두른다.

162쪽_ 서사의 권한이 없다는 것은 제 삶에 대해, 제 생각에 대해 독자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뜻이다. 남성 사회는 여성의 생각이나 의견, 삶에 대해 알려고 하지는 않지만 여성을 정의하려는 의지는 강하다. 여성은 늘 남성과의 관계속에서만 정의 '되는' 존재다.

; 넥슨 성우 교체 사건이라는 사례를 처음 알게 되었다. 사건의 내용대로라면 사상검증을 하는 것인데, 저자처럼 정교한 논리를 내세워 발화할 수는 없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남성이 남성정당이나 남성만이 하는 취미나 활동 관련 단체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업무에서 배제된다는 것인데,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착잡함과 억압이 느껴진다.
얼마 전에 뉴스에서도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생의 머리 스타일이 짧다고 남성혐오자냐며 손님인 남성이 폭력을 행사했다는 걸 듣고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럼 남자가 긴 머리를 하면 여성혐오자이고 그런 이유로 여성에게 폭력을 당해야 한다는 건가. 그 뉴스에서 짧게 언급되고 지나간 사건이었지만, 순간적으로 굉장히 불쾌했다.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부분이 아닌데, 여전히 여성을 복종, 지배하려는 남성의 의식이 사회적으로 발현이 되는구나 생각이 든다.

나오며: 생각하는 인간에 대하여
189쪽_ 나와 타자의 관계에 대한 고찰이 없을 때 공감은 때로 폭력의 얼굴로 등장한다. 때로 공감하고 연대한다는 명목으로 타인의 고통 앞에서 슬퍼하는 나, 고통스러운 사안 앞에서 몸부림치는 나를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누군가의 고통을 말하며 결국 자신을 드러낸다. 누군가의 비극을 자신의 정의감의 매개로 삼는 행위는 일종의 속임수다. 정치 예능이나 무비 저널리즘 형식은 이러한 무제를 꾸준히 드러냈다.

192,193쪽
증오는 반지성과 연대한다. 가상의 적의를 부추긴다. 왜곡된 평등주의는 뒤섞임을 인정하지 않고 분리와 제거를 통한 '정상화'를 추구한다. 비판을 진압하고, 진영 논리에 기대어 증오와 혐오를 확산하면서 이를 대의라는 명목으로 정당화한다.

반지성주의라는 하나의 사회현상을 짚어보면서 많은 문제를 언급했지만, 진보의 허위와 모순을 인식하되 깊은 회의와 냉소, 환멸을 꾸준히 경계한다. 생각하는 인간으로서, 나와 타자의 관계를 고민하고 공동체를 생각하는 인간으로서, 질문이 위험하지 않은 사회를 포기할 필요는 없다. 억압은 꾸준히 기록되고 있다.

195쪽_ 나의 일상과 사회구조는 연결되어 있다. 구조의 문제가 개인에게 온전히 면죄부를 주지도 않지만, 진짜 구조의 문제가 개인의 일탈로 왜곡되어서도 안된다.

;천천히 씹어서 먹어야 맛이 제대로 음미되고, 맛의 본연을 알게 된다. 이 책도 그런 류의 책이라고 생각된다. 인스턴트 음식을 허겁지겁 먹는 게 아니라 맛을 조금씩 보면서 어떨 때는 꿀꺽 넘어가는 부분도 있고 어떤 부분은 이런 맛이 있었던가 싶어서 주춤거리는 부분도 있다.
키워드로 말하자면 알려고 하지 않는 반지성주의가 혐오와 차별의 사회를 만든다. 소수자들에 대한 사유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는 억압의 사회다. 나의 일상은 내가 살고 있는 사회구조와 연결되어 있고, 그 사회 구조의 모순에 눈 감아서는 안된다. 그러나 또한 나의 사유와 행동만이 옳다는 자기 아집에 빠져서도 안된다. 나에게는 꿀떡 삼켜 버릴 수 없는 맛이었다. 주춤거리면서도 내뱉지 않고 씹어서 삼키고, 그 삼킨 후에 느껴지는 맛의 온전함을 느껴보고 싶다.

타락한 저항

이라영 지음
교유서가 펴냄

읽었어요
11개월 전
0
faveurs님의 프로필 이미지

faveurs

@q27hxyryu60h

다 읽고 나니 머리가 아프다. 그런 책이다.

타락한 저항

이라영 지음
교유서가 펴냄

👍 고민이 있을 때 추천!
2020년 4월 2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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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세 가지 사건을 중심으로 진지함과 생각에 대한 혐오, 반지성주의가 어떻게 소수자와 약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과 결합하는지, 표현의 ‘자유’와 저항할 ‘권리’의 관계를 살피는 책이다. 특히 이러한 흐름이 보수와 진보, 거대악과 그에 대응하는 저항이라는 이분법과 결합하며 저항과 피해자라는 보편의 위치를 누가 점하고 누구의 목소리가 지워지는지 치밀하게 짚어낸다.

반지성주의란 지식이 없는 무지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알기를 거부하는’ 태도를 말한다. 가령, 혐오 발화자들을 보면 그들은 혐오하는 대상을 모르기 위해 애쓴다. 혐오 발화를 하는 이들도 나름 지식으로 무장한다.

기득권 유지를 위해 자신이 알고 싶지 않은 문제를 적극적으로 ‘모르려고’ 하며, 시대에 맞는 새로운 ‘마녀’인 ‘충’을 계속 만들어내 인간사회에서 몰아낸다. 나아가 정치적 올바름과 진지한 성찰은 폭로, 재미 앞에서 쉽게 솔직하지 못한 ‘위선’이 되고, 불편한 진실은 외면한 채 마치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것 같은 ‘취향’이라는 단어와 ‘표현의 자유’라는 외피를 두른 ‘혐오의 자유’라는 차별이 횡행한다.

출판사 책 소개

알기를 거부하는 반지성주의의 시대,
지성의 복원을 향한 불편한 목소리

“다만 질문하고 생각한다.
기존 질서를 움켜쥐려고 알기를 거부하는 현상에 대해.
권력에 저항한다면서 다른 방식으로 권력 행위를 하는 모순에 대해.”


반지성주의의 풍토


올해 초, 한 코미디언이 제작한 동영상 하나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른바 ‘PC’, 즉 ‘정치적 올바름’을 ‘놀리는’ 동영상이었다. ‘엄마 아빠는 PC충’이라는 제목으로 올라간 이 영상에는 한 한국인 여성이 남자친구인 백인남성을 부모에게 소개하는 상황이 그려지는데, ‘PC충’으로 그려지는 그 부모는 딸의 남자친구가 ‘백인’이라는 것에 대해 ‘소수민족’이나 ‘흑인’ 남자친구에는 관심이 없느냐고 딸에게 묻고, 딸의 남자친구가 쓴 ‘병자호란’을 주제로 한 책을 읽고서는 왜 책에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흑인이 한 명도 없느냐며 비판한다. 맥락에 맞지 않게 무조건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는 부모를 황당하게 그리며 ‘PC충’, ‘진지충’을 ‘깐다’. 최근에는 ‘쓸모는 없고 쓸데없이 진지한’ 인문학 전공자들을 멸시하는 ‘문과충’이라는 말까지 유통되고 있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고, 고민하고 성찰하는 태도, 그것을 배우는 학문은 이제 ‘충’이라는 이름이 붙어 놀림감이 된다. “생각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태도 자체가 조롱의 대상이다. ‘진지충’을 조금 순화해 ‘진지병’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른 표현으로 ‘선비질’, 더 상스럽게 말하면 ‘씹선비’라고 한다.” 엘리트나 식자층의 권위주의나 엘리트주의에 대한 반발이라고만 보기 어렵다. 이는 소수자와 약자를 볼모로 삼은 창작이나 저항 방식에 대한 비판마저 엄숙주의자, 도덕주의자, 나아가 위선자 등으로 낙인찍는 상황으로 번져나간다.

소수자성에 대한 민감함과 예민함으로 사회를 감지하며 우리 사회에 ‘불편한 목소리’를 발화해온 저자 이라영은 『타락한 저항』을 통해 한국사회의 반(反)지성주의, 그리고 반지성주의의 풍토에서 자라난 혐오와 차별을 날카롭게 짚어낸다.

이 책에서 말하는 반지성주의란 지식이 없는 무지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알기를 거부하는’ 태도를 말한다. 가령, 혐오 발화자들을 보면 그들은 혐오하는 대상을 모르기 위해 애쓴다. 혐오 발화를 하는 이들도 나름 지식으로 무장한다. 다만 알고 싶지 않은 문제를 적극적으로 모르려고 할 뿐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말들을 보자. ‘남성이 역차별을 받는다’, ‘‘종북’과 ‘귀족노조’가 나라를 망친다’, ‘동성애 때문에 에이즈가 창궐한다’. 기득권 유지를 위해 자신이 알고 싶지 않은 문제를 적극적으로 ‘모르려고’ 하며, 시대에 맞는 새로운 ‘마녀’인 ‘충’을 계속 만들어내 인간사회에서 몰아낸다. 나아가 정치적 올바름과 진지한 성찰은 폭로, 재미 앞에서 쉽게 솔직하지 못한 ‘위선’이 되고, 불편한 진실은 외면한 채 마치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것 같은 ‘취향’이라는 단어와 ‘표현의 자유’라는 외피를 두른 ‘혐오의 자유’라는 차별이 횡행한다.

“사회의 야만은 약자 멸시에 담겨 있다. 지성은 사회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향해 치밀한 관심을 동반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고립되기를 두려워하지 않되, 현실에 참여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 참여하되 구속받지 않아야 한다.” _196쪽


지배하는 피해자, 타락한 저항의 탄생과 진화

지성이 약자를 향해야 한다는 것에 비추면 지성에 대한 적극적 거부는 약자를 조롱하고 혐오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폭력이며 결국 누가 권력을 갖고 발화하는지를 보여주는 잣대이기도 하다. 이 책은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세 가지 사건(박근혜 정권하에서 벌어진 문화예술계의 ‘블랙리스트’ 사건과 이에 대한 저항의 방식, 이명박 정권하에서 탄생해 박근혜 정권, 문재인 정권 집권까지 이어진 <나꼼수> 현상, ‘메갈리아’라는 저항의 방식을 둘러싼 현상)을 중심으로 진지함과 생각에 대한 혐오, 반지성주의가 어떻게 소수자와 약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과 결합하는지, 표현의 ‘자유’와 저항할 ‘권리’의 관계를 살핀다. 특히 이러한 흐름이 보수와 진보, 거대악과 그에 대응하는 저항이라는 이분법과 결합하며 저항과 피해자라는 보편의 위치를 누가 점하고 누구의 목소리가 지워지는지 치밀하게 짚어낸다.

문화예술계를 뒤흔든 박근혜 정권하에서의 ‘블랙리스트 사건’에서는 문화예술과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보수 정권의 제도적 검열과 이 검열에 맞서 혐오 발화를 동반한 저항이 짝패를 이루어온 과정을 살피고, ‘나꼼수 현상’을 통해서는 노무현의 죽음 이후 이어진 10여 년간의 보수 집권 시기에 이기는 정치를 향한 욕망이 반지성주의를 어떻게 더 강화했는지, ‘적폐’와 ‘우리 편’의 이분법적 구도와 팬덤 정치 속에서 지워진 다양한 목소리와 정당화된 혐오, 검증 없는 진실의 선동 등을 밀도 있게 파고든다. ‘메갈리아’를 살펴보면서는 이 시대 새로운 ‘종북 빨갱이’가 된 ‘메갈리아’를 둘러싼 마녀사냥과 좌우 진영을 넘어서 ‘진짜’ 페미니스트를 감별하려는 흐름 속에 나타나는 여성혐오, ‘남혐’과 ‘여혐’이라는 구도를 짜면서 ‘혐오에 혐오로 대항하는 것은 안 된다’는 논리로 여성의 분노를 혐오로 번역하는 방식, 여성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스스로 지성을 퇴보시키는 자칭 ‘진보’의 모습,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르기 위해 ‘나를 설득해봐라’라는 반지성적 태도 등의 주제를 비판적으로 다룬다.

이 세 사건은 200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여러 사건 중 일부다. 하지만 이 사건들을 관통하는 반지성주의와 혐오의 결합은 지금도 반복되는 어떤 패턴이다. 보수 정권은 시민 개인의 자유를 제도적으로 억압하고, 이에 저항하는 ‘진보’ 진영은 그 과정에서 약자를 향한 혐오를 정당화하는 패턴, 보수와 진보라는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대의를 위해 약자와 소수자의 목소리(가령 노동자와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는 지워지거나 ‘나중에’ 처리되어야 하는 부차적인 것이 되는 패턴, 내지는 적폐로 상징되는 거대악의 피해자이자 저항의 주체는 남성의 얼굴을 한 채 보편의 위치를 점하고는 페미니즘을 억압하는 패턴. ‘지배하는 피해자’, ‘타락한 저항’의 모습이다. 혐오와 차별이 ‘저항’으로 둔갑하는 모습은 익숙하다. 여기에 ‘취향’과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혐오의 자유’까지 횡행한다.

이 ‘타락한 저항’ 뒤에는 생각하는 인간, 지성, 진지함을 조롱하는 반지성주의의 흐름이 존재한다. 소재가 무엇이든 웃기면 그만이고, 그 웃음이 적절치 않다고 정색하는 건 쿨하지 못하고 솔직하지 못한 ‘프로 불편러’다. 차별은 솔직한 것이고, 차별을 지적하는 건 위선이 된다. 강성노조 때문에 재벌이 해외로 나간다는 발언, 성차별적 언행, 여성정책 토론회에서 졸다가 젠더 폭력이 뭐냐고 물으면서도 그 모름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전 자유한국당 대표 홍준표를 두고 ‘웃기는 시골 영감’ 같은 재미와 솔직함을 찾고 인간적이라고 평가하는 것, 이민자, 여성, 장애인 비하 발언을 쏟아내는 미국 대통령 트럼프를 두고 ‘솔직하다’라고 평가하는 것과 국정농단의 주범인 박근혜 전 대통령을 조롱하며 2016년을 ‘병신년’이라고 언급하며 낄낄거리는 태도, 맥락 없는 누드와 출산이라는 소재로 박근혜에 ‘저항’하는 ‘작품’ 사이에 얼마나 큰 거리가 있을까? ‘가짜 뉴스’와 사실의 검증은 나중이고 폭로와 음모론이 난무하는 ‘진보적’ 대안 언론, 소영웅주의에 빠져 타인의 고통보다 발화자인 자신을 앞세워 진실을 선동하는 ‘진보적’ 무비저널리즘과의 거리는 얼마나 멀까?

누구의 목소리도 지워지지 않는 사회를 향한 지성과 정치의 복원

적극적으로 알기를 거부하고 진지한 성찰과 생각함을 비웃는 반지성적 문화, 그리고 저항이라는 명목과 권위에 도전한다는 명목으로 벌어지는 무책임하고 선동적이며 차별적인 권력 행위, 표현의 자유로 포장된 ‘차별과 혐오의 자유’가 횡행하는 지금을 짚으며 저자는 “제도적으로 통제와 억압이 자행되고 일상에서는 조롱과 혐오로 점철된 언어의 공격 속에서 수치심은 소수자의 몫으로 고립되고 있다”는 걸 강조한다. “‘이해’는 언제나 약자의 몫으로 남는다. 성소수자는 이성애 사회를 이해해야 하며, 여성은 가부장제를 이해해야 하며, 장애인은 비장애인을 이해해야 한다. 반면 이해받는 이들은 조심할 필요 없는 권력을 휘두른다.”

그리고 나아가 “솔직함을 빌미로 만만한 타인에 대한 조롱과 혐오 발언이 유머로 유통되고 있다면, 이 사회가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자세는 어떠한”지 우리에게 묻는다. 유머와 애도는 한 사회의 윤리와 지성의 척도이기 때문이며, 타인의 고통을 대하는 자세는 많은 고민과 학습, 자기 성찰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마치 약자를 조롱하는 것이 유머로 소비되는 것처럼, 타인의 고통을 타자화하는 태도 역시 경계한다. “때로 공감하고 연대한다는 명목으로 타인의 고통 앞에서 슬퍼하는 나, 고통스러운 사안 앞에서 몸부림치는 나를 드러내는 경우가 있다. 누군가의 고통을 말하며 결국 자신을 드러낸다. 누군가의 비극을 자신의 정의감의 매개로 삼는 행위는 일종의 속임수다. 정치 예능이나 무비 저널리즘 형식은 이러한 문제를 꾸준히 드러냈다.”

저자는 “유머, 곧 해학·풍자·농담 등이 사회의 약자를 조롱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애도가 타인의 고통을 타자화하는 방식에 머물고 있다면 사회의 윤리적 기준에 의구심을 품어야 한다. 전위적인 지성과 미학은 윤리적 고민을 품는다. 합리적 의심과 음모론, 배려와 위선, 전위와 무례, 평등과 획일화는 전혀 다른 개념이지만 그들 사이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그렇기에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찾아 위태롭게 걸어가는 길이 지성의 역할이다”라며 우리에게 지성의 복원을 주문한다. 우리가 결국 지성의 복원을 말해야 하는 건 사회의 야만이 약자 멸시에 담겨 있으며 지성이 바로 사회의 가장 취약한 부분에 시선을 돌리고 치밀한 관심을 동반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의 목소리도 지워지지 않는 사회를 위한 지성과 저항의 복원을 고민하는 독자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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