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커밍

미셸 오바마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비커밍 (Beco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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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책

출간일

2018.11.14

페이지

568쪽

상세 정보

예약 판매로 아마존 1위에 오른 올해 최고의 화제작, 미국 최초의 흑인 퍼스트레이디 미셸 오바마의 첫 자서전. 어린 시절 가족의 이야기와 학창 시절, 법률 회사에서 젊은 오바마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게 된 과정, 그리고 그 후 미국을 넘어 전 세계인이 주목하는 여성들의 롤모델로 거듭나기까지의 스토리를 솔직하고 유머러스하게 담아냈다.

2009년 전 세계를 놀라게 하며 백악관에 입성한 그녀는, 이후 놀라운 행보를 거듭하면서 전 세계 여성들과 아이들을 위해 일했다. 미셸은 아동 비만과 전쟁을 벌였고 건강한 식탁을 만들기 위해 식품회사들과 싸웠다. 전 세계 소녀들의 교육을 위해 캠페인을 벌이는 한편, 흑인 여성에 대한 편견에 당당하게 맞섰다.

그녀는 귀여운 두 딸과 함께 백악관을 역사상 가장 따뜻한 곳으로 만들었으며, 고루한 권위를 깨뜨리는 가장 지적이고 검소한 퍼스트레이디가 되었다. TV 쇼에 나가 펑크뮤직에 맞춰 춤을 추고, 차 안에서 비욘세의 노래를 불렀던 그녀는 이제 수많은 배척과 질투, 뿌리 깊은 두려움을 물리치고 세계 여성들의 롤모델이자 희망과 가능성의 아이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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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udaimoniaaa

자신의 과거와 현재, 불안과 좌절. 자신감과 열정에 대해서 이렇게 솔직하게 이야기 하는 정치인이 있을까. 솔직하고 당당한 사람의 매력은 끝이 없다.

비커밍

미셸 오바마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2020년 3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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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바

@1b7mgtbsu2je

미셸 오바마의 성장 과정과 오바마를 만나 퍼스트레이디가 되고 퇴임까지의 인생 이야기가 담겨 있다. 백악관에서의 생활을 엿볼 수 있으며 미셸 오바마의 가식적이지 않은 가치관을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오바마 정부에서 평등이라는 이름으로 동성 커플 결혼의 합법화를 추진하고 미셀 오바마 또한 인권 운동의 승리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에 대해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내가 되다
우리는 부모님이 담뱃불을 붙이면 일부러 콜록거렸고, 종종 담배 심부름에 반항했다. 아주 어렸을 때 한 번은 선반에 놓인 새 뉴포트 담뱃갑을 뜯어서 그 속의 담배들을 줄기콩 분지르듯이 싱크대에서 똑똑 분질렀다. 담배 끄트머리에 일일이 핫소스를 묻혀서 도로 넣어두기도 했다. 우리는 부모님에게 폐암에 대해 설교하면서, 학교 보건 시간에 시청한 영상 속 끔찍한 장면을 중계했다. 흡연자의 폐는 숯처럼 메마르고 새카맸다. 그것은 현재 진행형의 죽음이요, 몸속에 죽음을 품고 사는 셈이었다. 반면 담배 연기에 오염되지 않은 건강한 폐는 발그레한 분홍색이었다. 이토록 명백한 대비가 또 어딨나 싶어서, 우리는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금연은 좋고, 흡연은 나쁘다. 금연은 건강이고, 흡연은 질병이다. 자신의 미래는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부모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온 바가 바로 그런 것이었는데도, 부모님은 그로부터 한참 뒤에야 담배를 끊었다.


우리가 되다
사우스사이드에서 흑인으로 자란 탓에, 정치를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정치는 전통적으로 흑인을 억압하는 수단이었다. 정치는 내내 흑인을 고립시키고 배제했고, 흑인이 교육과 고용과 고소득을 누리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막았다. 나의 두 할아버지는 끔찍한 짐 크로 법과 굴욕적인 주거 차별의 시대를 살았고, 그래서 기본적으로 모든 권위를 불신했다(앞에서 말했듯이 외할아버지는 치과 의사조차 자신을 박해하려 든다고 믿었다). 아버지는 인생의 대부분을 공무원으로 살면서 사실상 반강제로 동원되어 민주당 선거구 관리자로 일했는데, 승진을 꿈이라도 꾸려면 그래야 했다. 아버지는 그 일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좋아했지만 시청의 족벌주의는 늘 못마땅해했다.
시카고로 돌아온 버락은 나를 달래는 해독제가 되어주었다. 그는 내 걱정을 들어주었고, 돈 문제를 들어주었고, 자신도 아이를 갖고 싶다고 말했다. 그도 우리가 둘 다 안락하고 예측 가능한 변호사 생활에 안주할 의향이 없으니 정확히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는 알 수 없다고 인정했지만, 이것저것 다 고려하더라도 우리는 전혀 가난하지 않으며 우리의 미래는 밝다고 말했다. 어쩌면 쉽게 계획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더 밝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한번 해보라고 말해주는 사람, 걱정을 지우고 행복할 것 같은 방향으로 가라고 말해주는 사람은 버락뿐이었다. 그는 내게 미지의 세계로 도약해도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왜냐하면—그리고 이 주장은 나의 두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거의 모든 친척에게는 충격적인 소리로 들릴 말이었다—사람이 미지의 세계로 뛰어든다고 해서 꼭 죽는다는 법은 없으니까.
걱정마, 우리는 할 수 있어, 어떻게든 해날 거야, 이것이 버락의 생각이었다.

몸소 체험하기 전에는 남들로부터 아무 이야기도 들을 수 없는 일의 목록을 작성한다면, 첫 항목은 유산으로 하겠다. 유산은 외롭고, 괴롭고, 거의 세포 수준에서 상심하게 되는 일이다. 유산을 겪은 여성은 그것을 개인적 실패로 착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 혹은 비극으로 착각하기 쉬운데, 그 순간에는 물론 비참하겠지만 그 또한 오해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지만, 사실 유산은 늘 벌어지는 일이다. 우리 생각보다 더 많은 여자들이 유산을 겪는다. 다만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주제일 뿐이다. 나 역시 친구 두어 명에게 유산 사실을 털어놓고서야 알았다. 친구들은 애정과 지지를 보내주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유산 경험을 들려주었다. 그렇다고 내 괴로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지만, 같은 괴로움을 겪었다는 친구들 이야기 덕에 조금은 더 잘 견딜 수 있었다. 이때 비로소 유산은 생물학적 딸꾹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정확히 왜인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타당한 이유에서 수정란을 몸 밖으로 내보내는 편이 좋겠기에 벌어지는 정상적인 일이었다.

처음에 버락은 부부 상담을 내키지 않아 했다. 그는 복잡한 문제를 맞닥뜨리면 직접 고민하고 해결책을 찾아내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낯선 사람 앞에서 사적인 이야기를 털어놓는다는 것은 좀 드라마 같다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불편한 일이었다.
상담사는—우드처치 박사라고 부르자—부드러운 말투의 백인 남성으로, 좋은 대학을 나왔고 늘 면바지를 입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가 버락과 내 이야기를 다 들어본 뒤 즉각 내 불만이 모두 타당하다고 인정해줄 거라 예상했다. 내 입장에서야 내 불만은 전부 절대적으로 타당했으니까. 모르면 몰라도 버락도 똑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겪어보니, 상담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우드처치 박사는 누구의 불만도 승인해주지 않았다. 누구의 편도 들지 않았다. 둘의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대목에서 어느 쪽이 옳다고 표를 던지거나 하지도 않았다. 대신 공감하며 참을성 있게 들어주었고, 우리가 각자 감정의 미로에서 헤어나도록 도왔으며, 개인의 상처 때문에 자동으로 상대에게 무기를 휘두르지 않도록 타일렀다. 우리가 너무 변호사처럼 따지고 들면 주의를 주었고, 세심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우리가 느끼는 감정의 이유를 생각해보도록 이끌었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 이야기하다 보니 서서히 매듭이 풀렸다. 상담실을 나설 때마다 버락과 나는 서로에게 좀 더 연결된 기분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어느 날 같은 반 남자아이 하나가 나를 때렸다. 그 아이의 주먹은 혜성처럼, 난데없이, 온 힘으로 내 얼굴에 날아들었다. 우리는 점심을 먹으려고 줄을 서서, 예닐곱 살짜리들에게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문제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누가 가장 빨리 달리는지, 크레용 색깔의 이름들은 왜 그렇게 이상한지. 그런데 그때, 퍽 하고 주먹이 날아왔다. 이유는 지금도 모른다. 그 아이의 이름도 잊었다. 하지만 아픈 데다가 어안이 벙벙해서, 벌써 붓기 시작한 아랫입술과 뜨거운 눈물이 차오른 눈으로, 멍하니 그 아이를 보았던 것은 기억난다. 나는 너무 놀라서 화도 못 내고, 집으로 달려갔다.

그 아이는 담임선생님에게 야단맞았다. 우리 어머니도 학교로 가서 직접 그 아이를 보았다. 그 아이가 내게 가한 위협이 어느 정도인지를 정확히 가늠하고 싶었던 것이다. 마침 그날 우리 집에 와 있었던 외할아버지는 할아버지답게 발끈하여 자신도 학교에 따라가겠다고 우겼다. 나는 내막을 전해 듣지 못했지만, 어른들끼리 모종의 대화를 나누었고 모종의 처벌이 내려졌다. 그 아이는 부끄러워하는 얼굴로 내게 사과했고, 어른들은 또 그럴 일은 없을 테니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를 안심시켰다.

“그 아이는 너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다른 일 때문에 겁먹고 화났던 거야.” 나중에 어머니가 부엌에서 저녁을 지으면서 말해주었다. 그러면서 내게는 말해줄 수 없지만 속사정이 다 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아이는 자기만의 어려운 문제를 겪고 있단다.”

우리는 친구를 괴롭히는 아이에게 그렇게 대처했다. 어릴 때는 오히려 이해하기가 쉬웠다. 친구를 괴롭히는 아이는 사실 자신이 겁나기 때문에 남을 겁주는 것이었다. 우리 동네의 터프한 여자아이 디디가 그런 경우였다. 아내에게까지 무례하고 강압적인 태도를 취했던 우리 친할아버지도 그런 경우였다. 그런 사람이 남을 휘갈기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감당하지 못해서였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피할 수 있으면 피하되, 피할 수 없다면 맞서야 했다. 아마도 묘비에 “인생은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 사는 것” 같은 말을 새기고 싶어 할 어머니에 따르면, 그런 상황에서 유념할 점은 상대의 모욕이나 공격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개인적인 일로 받아들이면, 그때는 정말 상처가 된다.
내가 이 문제를 진지한 숙제로 맞닥뜨린 것은 훨씬 뒷날이었다. 40대 초반이 되어 남편의 대선 선거운동을 돕는 처지가 되어서야, 나는 초등학교 1학년 때 급식 줄에서 얼굴을 맞았던 일을 다시 떠올렸다. 난데없는 공격이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 아무 경고 없이 얼굴을 강타당한 것이 얼마나 아팠는지 기억났다.
나는 2008년의 대부분을 그런 주먹을 신경 쓰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보냈다.


그 이상이 되다
백악관에 텃밭을 일구는 것은 그 문제에 대한 내 대답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더 큰 활동의 시작이 되기를 바랐다. 버락의 행정부는 더 많은 미국인이 감당 가능한 비용으로 의료 서비스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정책에 집중했는데, 텃밭은 그것과 연관된 건강한 생활 방식에 관해서도 메시지를 줄 수 있었다. 또한 텃밭은 내가 퍼스트레이디로서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지를 시험해볼 시운전 격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텃밭은 일종의 야외 교실, 아이들이 먹거리를 기르는 일에 관해서 배울 수 있는 장소였다. 게다가 자연에 관한 일일뿐 정치와는 무관해 보였고, 내가 부삽을 쥔 여성의 모습으로 수행하는 무해하고 순수한 활동으로 여겨졌다. 그러니 우리의 행동이 대중에게 어떻게 비칠까 염려하여 노상 대중의 ‘시선’을 들먹이는 웨스트윙 고문들도 달가워할 것이었다.
물론 그 정도로 끝낼 생각은 아니었다. 나는 텃밭을 통해서 사람들과, 특히 각급 학교 및 부모들과 영양에 관한 대화를 나눠볼 계획이었다. 그 대화가 더 나아가서 오늘날 식품의 생산방식, 성분표 기입 방식, 마케팅 방식을 살펴보고 그 현실이 사람들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논의하는 단계까지 진행되면 좋을 듯했다. 그리고 백악관에서 그런 주제를 언급하는 것은 거대 식품 및 음료 회사들이 수십 년간 추구해온 사업 방식에 암묵적으로 도전하는 셈일 터였다.

2011년 겨울, TV 리얼리티쇼 진행자이자 뉴욕의 부동산 개발업자인 도널드 트럼프가 버락이 재선에 나설 2012년 대선에서 공화당 후보 예비선거에 도전하겠다는 말을 흘리기 시작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전반적인 인상으로, 그냥 소음만 빚어내다가 말 것 같았다. 그는 방송에 출연해서 버락의 대외 정책에 대하여 전문적이지도 않은 비판을 늘어놓았고, 버락의 시민권에 공공연히 의문을 제기했다. 지난 대선 기간 중 이른바 ‘벌서birther’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버락의 하와이 출생증명서가 위조된 것이고 그는 사실 케냐에서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음모론을 퍼뜨렸는데, 트럼프가 그 주장을 되살리려고 발 벗고 나선 것이었다. 그는 방송에 나와서 갈수록 허황된 주장을 펼쳤다. 1961년 호놀룰루 신문에 버락의 출생을 알리는 기사가 실렸다는 이야기는 사기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버락이 다녔다는 유치원의 급우들이 아무도 버락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는 거짓 주장도 펼쳤다. 조회수와 시청률에 목매는 뉴스 매체들은—특히 보수적인 매체들은—그런 근거 없는 주장을 희희낙락 부채질하기에 바빴다.

물론 그것은 야비하고 정신 나간 소리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속에 담긴 편견과 외국인 혐오는 누가 봐도 뚜렷했다. 하지만 그래도 위험했다. 그것은 극우파나 정신 나간 사람들을 자극하려는 고의적 발언이었다. 사람들 반응이 두려웠다. 가끔 심각한 위협이 인지될 때면 비밀경호국이 내게도 알려주었는데, 세상에는 정말로 그런 소리에 선동되는 사람이 있다는 데 놀랐다. 걱정하지 않으려 해도 걱정될 때가 있었다. 웬 정신이 불안정한 사람이 총을 갖고 워싱턴으로 들이닥치면 어쩌나? 그 사람이 우리 딸들을 찾아가면 어쩌나? 도널드 트럼프는 무모한 암시가 담긴 시끄러운 발언으로 우리 가족의 안전을 위협했다. 그 점에 대해서 나는 영원히 그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걱정을 접어두고, 여러 보호조치를 믿으면서 그냥 살아가야 했다. 우리를 ‘타자’로 규정하려는 이들은 몇 년 전부터 그렇게 해왔다. 버락과 나는 사람들이 우리가 사는 방식을 본다면 진실을 알아줄 것이라고 믿으면서, 그런 이들의 거짓말과 왜곡을 초월하려고 애써왔다. 일찍이 버락이 대통령 출마를 결심한 때부터, 많은 사람이 진심과 선의로 우리의 안전을 걱정하는 말을 건네왔다. 사람들은 유세장에서 내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아무도 당신을 해치지 않도록 늘 기도한답니다.” 모든 인종, 모든 배경, 모든 연령의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 이 나라에 선량하고 너그러운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었다.

“당신과 가족을 위해서 매일 기도한답니다.”

나는 그들의 말을 가슴에 품고 지냈다. 우리의 안전을 기도해주는 수많은 선량한 사람들이 우리를 보호해준다고 느꼈다. 버락과 나는 각자의 신앙심에도 기댔다. 이제 우리가 교회에 나가는 일은 드물었다. 예배하러 걸어 들어가는 우리에게 기자들이 고래고래 질문을 던지는 등 야단법석이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대선 기간 중 제러마이아 라이트 목사에 대한 사상 검증으로 한바탕 소란을 겪고 정적들이 신앙을 무기 삼아—그들은 버락이 ‘은밀한 무슬림’이라고 주장했다—공격하는 것을 본 후 종교 활동은 집에서 사적으로만 하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매일 저녁 식사 전에 기도를 올렸고, 딸들을 위해 백악관에서 몇 차례 교리 강습을 열기도 했다. 워싱턴의 특정 교회에 적을 두지는 않았다. 우리가 시카고에서 다녔던 트리니티 교회의 신자들이 우리 때문에 겪었던 부당한 공격을 다른 교회의 신자들에게 또 겪게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런 결정에는 희생이 따랐다. 나는 영적 공동체의 온기가 그리웠다. 매일 밤 침대에 누워 고개를 돌리면, 눈을 감은 채 조용히 기도하는 버락이 보였다.

찰스턴에서 장례식이 열린 2015년 6월 26일, 연방대법원이 기념비적인 판결을 내렸다. 미국 50개 주 모두에서 동성 커플이 법적으로 결혼할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한 판결이었다. 그것은 수십 년 동안 많은 사람이 여러 주와 여러 법정에서 차례차례 체계적으로 법적 싸움을 벌여온 결과였으며, 모든 인권운동이 그렇듯이 많은 사람의 끈기와 용기가 필요했던 일이었다. 그날 나는 다른 일을 하면서도 간간이 미국인들이 그 소식에 기뻐한다는 뉴스를 접했다. 환희에 찬 군중이 연방대법원 앞 계단에서 “사랑이 이겼다!”라고 외쳤다. 동성 커플들이 전국의 시청과 지방법원에 밀려들어서 이제 헌법이 인정하는 권리를 행사했다. 게이 바들은 일찍부터 문을 열었다. 전국의 길거리에서 무지개색 프라이드 깃발들이 펄럭였다.

이 일은 같은 날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슬픔을 겪었던 버락과 나를 조금은 기운 내게 해주었다. 백악관으로 돌아온 뒤, 우리는 장례식 복장을 벗고 아이들과 얼른 저녁을 먹었다. 그 후 버락은 ESPN을 켜놓고 밀린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트리티룸으로 사라졌다. 나는 드레스룸으로 가다가, 관저의 북면 창문들 중 하나가 보라색으로 빛나는 걸 보았다. 그제야 우리 직원들이 백악관 전면에 프라이드 깃발의 무지갯빛 조명을 쏘겠다는 계획을 세웠던 일이 기억났다.

어릴 때부터 나는 친구들을 괴롭히는 아이에게 단호히 맞서야 하지만 그러느라고 나까지 그 아이의 수준으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그리고 분명한 사실인즉, 우리는 이제 그런 사람을 상대하고 있었다. 약자를 비하하고 전쟁 포로를 조롱하는 사람, 내뱉는 거의 모든 말이 국가의 품위를 해치는 사람. 나는 미국인들이 말의 중요성을 이해해주기를 바랐다. TV에서 들리는 혐오의 언어가 미국의 진정한 정신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며 우리는 그에 반대하여 투표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주기를 바랐다. 내가 사람들에게 간절히 부탁하고 싶은 것은 품위였다. 품위는 내 가족이 여러 세대 동안 버틸 수 있게 해준 힘이었고, 우리가 나라 전체로도 그 중요한 가치에 의지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품위는 늘 우리를 버티게 해주었다. 그것은 선택이고, 늘 쉽지만은 않은 선택이지만, 내가 살면서 만난 존경하는 사람들은 모두 매일매일 몇 번이고 그런 선택을 내렸다. 그 문제에 관해서 버락과 내가 지키려고 애쓰는 모토가 있었는데, 그 말을 나는 그날 밤 무대에서 들려주었다. 상대가 수준 낮게 굴더라도, 우리는 품위 있게 갑시다.

그로부터 두 달 뒤이고 선거일로부터 불과 몇 주 전, 도널드 트럼프가 2005년에 어느 TV 프로그램 진행자와 무대 뒤에서 대화하던 중 자신이 여성들을 성추행해온 일을 자랑스레 떠벌리는 영상이 공개되었다. 그가 쓴 단어들은 너무 외설적이고 저질이어서, 매체들은 어떻게 하면 그의 말을 인용하면서도 언론의 체면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그러다 결국에는 그냥 기준을 낮춰버렸다. 대통령 후보자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실어주기 위해서.

그 발언을 들었을 때, 나는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그 영상에 담긴 위협과 남자들끼리의 농담에는 내게도 고통스러우리만치 익숙한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나는 너를 해치고도 얼마든지 무마할 수 있어. 그런 혐오 표현은 점잖은 공론의 장에서는 대체로 사라진 상태였지만, 문명화되었다고들 하는 우리 사회에도 골수에는 아직 남아 있었다. 도널드 트럼프 같은 자가 그런 표현을 태연하게 내뱉고도 무사할 만큼, 생생하게 살아 있고 널리 받아들여졌다. 내가 아는 모든 여성은 그게 무엇인지 알았다. ‘타자’로 치부되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았다. 우리가 아이들만은 결코 겪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지만, 아이들도 아마 겪을 것이었다. 지배력을 행사하는 것은, 나아가 그러겠다는 암시조차도, 상대를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태도다. 그것은 가장 추악한 형태의 힘이다.

온몸이 분노로 떨렸다. 다가오는 주에 예정된 힐러리 클린턴을 위한 유세 연설에서는 평이하게 그녀의 능력을 알리는 데 그칠 게 아니라 트럼프의 말에 직접적으로 대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목소리로 그의 목소리에 반격하고 싶었다.

어머니가 허리 수술을 받느라 입원한 월터 리드 육군병원의 병실에 앉아서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궁리해보았다. 여러 생각이 스쳐갔다. 나는 그동안 수많은 조롱과 위협을 받아보았다. 흑인이고 여성이고 목소리를 낸다는 이유로 비하되기도 했다. 그래서 트럼프의 조롱은 내 몸을, 말 그대로 내가 세상에서 차지하고 있는 공간을 직접 겨냥한 것처럼 느껴졌다. 토론회 도중 트럼프는 힐러리 클린턴을 뒤쫒는 사람처럼 곁에서 어슬렁거렸다. 그녀가 말할 때 주변을 맴돌았고, 너무 가까이 다가섰고, 자신의 존재로 그녀의 존재를 축소하려고 했다. 나는 너를 해치고도 얼마든지 무마할 수 있어. 여성들은 평생 그런 모욕을 겪는다. 길거리에서 듣는 성희롱, 더듬는 손길, 성폭력, 억압 행위를 통해서. 그런 일들은 우리를 상처 입힌다. 우리의 힘을 앗아간다. 어떤 상처는 간신히 눈에 보일 만큼 사소하다. 반면 어떤 상처

어느 쪽이든 상처는 누적된다. 여성들은 학교나 직장을 오갈 때도, 집에서 아이들을 기를 때도, 종교 활동을 하러 갈 때도, 한 발 전진하려고 애쓰는 모든 순간에 그런 상처를 품고 다닌다.

내게 트럼프의 발언은 또 한 번의 일격이었다. 그의 메시지가 이기도록 가만 놔둘 수는 없었다. 나는 2008년부터 함께 일해온 유능한 연설문 작성자 세라 허위츠와 함께 내 분노를 말로 바꿔냈고, 곧이어—어머니가 수술에서 회복한 뒤—10월 어느 날 뉴햄프셔주 맨체스터에서 그 말을 청중에게 들려주었다. 한껏 고조된 청중 앞에서 내 감정을 똑똑히 밝혔다. “이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이것은 정상적인 정치가 아닙니다. 이것은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참아줄 수 없는 일입니다.” 내가 느끼는 분노와 두려움을 전했고, 미국인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두 선택지의 본질을 잘 알고 있음을 이번 선거가 보여줄 거라 믿는다고 말했다. 나는 그 연설에 내 모든 진심을 담았다.
그리고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내 목소리가 사람들에게 들렸기를 기도하면서.

힐러리 클린턴은 총득표에서 상대보다 300만 표 가까이 더 얻었지만, 총 8만도 안 되는 표 차로 펜실베이니아와 위스콘신과 미시간 주에서 지는 바람에 선거인단 득표에서 트럼프가 앞섰다. 나는 정치적인 인간이 아니므로, 이 결과에 대한 분석을 시도하지는 않겠다. 누구의 책임이고 어떤 점이 부당했는가에 대한 의견을 내지도 않겠다. 그저 그날 더 많은 사람이 투표했으면 좋았을 거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리고 왜 그토록 많은 사람이, 특히 여성들이 유례없이 자격이 출중한 여성 후보자를 놔두고 여성 혐오자를 대통령으로 선택했을까 하는 의아함을 평생 간직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 결과는 나왔고, 우리는 그것을 감당하고 살아가야 했다.


에필로그
이양이란 곧 새로운 단계로 넘어간다는 뜻이다. 성경에 손이 올라가고, 선서가 복창된다. 한 대통령의 가구가 실려 나오고, 다른 대통령의 가구가 들어간다. 옷장이 비워지고, 새로 채워진다. 그렇게 간단히, 이제 새 베개에 새 머리가 눕는다. 새 성품과 새 꿈이 눕는다. 그리고 임기가 끝나는 마지막 날 백악관을 떠난 사람은 여러 가지로 스스로를 처음부터 새롭게 만들어내야 하는 처지에 놓인다.

나는 이제 인생의 새로운 단계가 시작되는 시점에 섰다. 정말로 오랜만에, 정치인 배우자로서의 의무에서 자유롭고 사람들의 기대에도 얽매이지 않는 상황에 있다. 거의 다 자란 두 딸에게는 내 손길이 예전만큼 필요하지 않다. 남편은 더 이상 국가의 무게를 짊어지고 다니지 않는다. 내가 느꼈던 책임감이—사샤와 말리아와 버락에게, 내 경력과 나라에 느꼈던 책임감이—살짝 달라지니,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도 살짝 달라졌다. 이제 생각할 시간이 더 많고, 자연스러운 나 자신으로 있을 시간이 더 많다. 쉰네 살인 나는 아직도 발전하는 중이다. 바라건대 앞으로도 늘 그러면 좋겠다.

내게 무언가가 된다는 것은 어딘가에 다다르거나 어떤 목표를 달성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대신 그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움직임, 진화하는 방법, 더 나은 자신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과정이다. 그 여정에는 끝이 없다. 나는 엄마가 되었지만, 아직도 아이들로부터 배울 것이 많고 줄 것도 많다. 나는 아내가 되었지만, 아직도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인생을 함께하는 일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중이며 때로 그 어려움 앞에서 겸허해진다. 나는 어떻게 보면 권력을 가진 사람이 되었지만, 아직도 때때로 불안하고 내 목소리가 전달되지 않는다고 느낀다.

무언가가 된다는 것은 하나의 과정이고, 하나의 길을 걸어가는 발걸음이다. 인내와 수고가 둘 다 필요하다. 무언가가 된다는 것은 앞으로도 더 성장할 여지가 있다는 생각을 언제까지나 버리지 않는 것이다.

버락이 물러난 뒤로, 나는 속이 뒤집히는 뉴스를 너무 많이 접했다. 지금 벌어지는 일들을 떠올리면 분통이 터져서 밤에도 잠을 못 이루곤 한다. 현 대통령의 행동과 정치적 의제 때문에 많은 미국인이 자신을 의심하고 나아가 서로를 의심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을 지켜보기가 너무 괴로웠다. 약자에 대한 배려를 담아 세심하게 설계된 정책들이 역행하는 모습, 미국이 가까운 우방들과 멀어지는 모습, 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구성원들이 무방비로 노출되고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는 모습, 그런 것들을 지켜보기도 괴로웠다. 가끔은 대체 바닥이 어디인지 모르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 와중에도 스스로에게 결코 허락하지 않는 것이 바로 냉소다. 너무 걱정되는 순간이면, 심호흡을 하면서 내가 평생 만나온 많은 사람이 보여준 품위와 우리가 이미 극복해낸 많은 장애물들을 떠올리려고 애쓴다. 그리고 다른 이들도 나처럼 하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에게는 민주주의 세상에서 각자 해야 할 역할이 있다. 우리는 모든 표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어쩌다 그만 평범하지 않은 여정을 밟게 된 평범한 여성이다. 그런 내가 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바라는 바는 이로써 다른 이야기와 다른 목소리가 들릴 공간이 더 넓어졌으면, 그리하여 더 많은 사람이 이 세상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게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비커밍

미셸 오바마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2020년 1월 18일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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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헌

@hllccis5jf22

미국 대통령과 영부인의 성장스토리와 생각을 옅볼수 있으면서, 육아에 모든 가치를 우선시하는 오바마 부부의 평범해서 지키기 힘든 삶에 대한책.
세상의 모든 문제와 싸우는 리더로서의 숙명의 책임감을 가진 오바마를 옆에서 바라보는 관점도 흥미롭고, 오빈마의 따뜻한 인간성을 볼수있어서 첫페이지를 열고는 며칠만에 완독한책!!

비커밍

미셸 오바마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 행복할 때 추천!
2019년 11월 2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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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예약 판매로 아마존 1위에 오른 올해 최고의 화제작, 미국 최초의 흑인 퍼스트레이디 미셸 오바마의 첫 자서전. 어린 시절 가족의 이야기와 학창 시절, 법률 회사에서 젊은 오바마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게 된 과정, 그리고 그 후 미국을 넘어 전 세계인이 주목하는 여성들의 롤모델로 거듭나기까지의 스토리를 솔직하고 유머러스하게 담아냈다.

2009년 전 세계를 놀라게 하며 백악관에 입성한 그녀는, 이후 놀라운 행보를 거듭하면서 전 세계 여성들과 아이들을 위해 일했다. 미셸은 아동 비만과 전쟁을 벌였고 건강한 식탁을 만들기 위해 식품회사들과 싸웠다. 전 세계 소녀들의 교육을 위해 캠페인을 벌이는 한편, 흑인 여성에 대한 편견에 당당하게 맞섰다.

그녀는 귀여운 두 딸과 함께 백악관을 역사상 가장 따뜻한 곳으로 만들었으며, 고루한 권위를 깨뜨리는 가장 지적이고 검소한 퍼스트레이디가 되었다. TV 쇼에 나가 펑크뮤직에 맞춰 춤을 추고, 차 안에서 비욘세의 노래를 불렀던 그녀는 이제 수많은 배척과 질투, 뿌리 깊은 두려움을 물리치고 세계 여성들의 롤모델이자 희망과 가능성의 아이콘이 되었다.

출판사 책 소개

11월 14일 전 세계 31개 언어 동시 출간!
예약 판매로 아마존 1위에 오른 올해 최고의 화제작


역대 미 대통령 부부 자서전이 사상 최고액으로 판권이 팔린 후, 예약 판매만으로 아마존 1위에 올랐던 세계적인 화제작 <비커밍>이 드디어 출간된다. 11월 14일(미국 13일) 전 세계 31개 언어로 동시 출간되는 이 책은, 미국 최초의 흑인 퍼스트레이디 미셸 오바마가 처음으로 펴내는 자서전이다. 그녀는 이 책에서 어린 시절 가족의 이야기와 학창 시절, 법률 회사에서 젊은 오바마를 만나 사랑하고 결혼하게 된 과정, 그리고 그 후 미국을 넘어 전 세계인이 주목하는 여성들의 롤모델로 거듭나기까지의 스토리를 솔직하고 유머러스하게 담아낸다. 시카고 변두리에서 태어나 여성과 약자들의 아이콘이 되기까지, 미셸의 삶은 포기하지 않은 한 인간의 성장 스토리이자 험난한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피워내는 진정한 용기를 전해준다.

미국 최초의 흑인 퍼스트레이디
미셸 오바마의 첫 자서전


이 책 <비커밍(Becoming)>은 미국 최초의 흑인 퍼스트레이디 미셸 오바마의 첫 자서전이다.
2009년 전 세계를 놀라게 하며 백악관에 입성한 그녀는, 이후 놀라운 행보를 거듭하면서 전 세계 여성들과 아이들을 위해 일했다. 미셸은 아동 비만과 전쟁을 벌였고 건강한 식탁을 만들기 위해 식품회사들과 싸웠다. 전 세계 소녀들의 교육을 위해 캠페인을 벌이는 한편, 흑인 여성에 대한 편견에 당당하게 맞섰다. 그녀는 귀여운 두 딸과 함께 백악관을 역사상 가장 따뜻한 곳으로 만들었으며, 고루한 권위를 깨뜨리는 가장 지적이고 검소한 퍼스트레이디가 되었다. TV 쇼에 나가 펑크뮤직에 맞춰 춤을 추고, 차 안에서 비욘세의 노래를 불렀던 그녀는 이제 수많은 배척과 질투, 뿌리 깊은 두려움을 물리치고 세계 여성들의 롤모델이자 희망과 가능성의 아이콘이 되었다.

역대 최고 730억 판권액,
예약 판매만으로 아마존 1위에 등극한 화제작


이런 그녀의 자서전 출간은 그 사실만으로 이미 큰 화제가 되었다. 남편 버락 오바마와 그녀의 자서전 판권은 역대 미국 대통령들 판권 가격의 4배를 넘어서면서 사상 최고액으로 판매되었고(약 730억 원 추정), 오바마 부부가 남태평양의 테티아로아섬에서 집필에 들어갔다는 사실까지 보도되며 화제를 모았다. 국내에서도 판권 경쟁 끝에 웅진씽크빅에서 한국어판 판권을 따냈으며, 힐러리 클린턴의 자서전 <살아 있는 역사>를 40만 부 판매한 경험을 살려 11월 13일(한국 시간 14일) 전 세계에 동시 출간한다(버락 오바마 자서전은 2019년 하반기에 출간될 예정). 번역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등 페미니즘 관련 도서들을 번역해 최근 더욱 유명해진 김명남 번역가가 맡아 원서의 섬세한 결까지 담아냈다.

특히 이 책 <비커밍>은 미셸 오바마의 첫 자서전일 뿐 아니라, 유례없는 솔직함과 드라마틱한 인생 스토리로 큰 기대를 모으고 있다. <비커밍>은 예약 판매만으로 이미 아마존 종합순위 1위를 기록했으며, 그녀의 출간 기념 북투어는 세계 주요 도시에서 매진 행렬을 이어가고 있다. <비커밍>의 집필 및 제작 과정은 007 작전을 방불케 하는 보안 속에 이루어졌으며, ‘전 세계 31개 언어 출간, 300만 부 초판 제작’으로 독자들의 기대를 증명하고 있다. 《뉴욕타임스》 역시 “이 책은 올해 최대 블록버스터 중 하나”라고 논평했다.

주변에서 중심으로:
가난한 흑인 가정에서 꿋꿋하게 성장해나간 소녀


<비커밍>은 시카고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한 여자아이의 드라마틱한 인생 역정이자, 우리 시대가 낳은 소중한 희망과 가능성의 연대기이다. 이야기는 미셸이 어릴 적 살았던 시카고의 사우스사이드에서 시작된다. 그녀가 자랐던 사우스사이드는 원래 백인과 흑인 들이 어울려 살던 동네였다. 그러던 것이 백인들이 차차 동네를 떠나면서 가난한 흑인 동네로 변해간다. 한번은 백인들이 사는 동네에 갔다가 누군가 미셸네 차를 길게 긁어놓는 일을 겪기도 한다. “남들보다 두 배 이상 잘해야 절반이라도 인정받는” 흑인 사회의 현실을 어린 미셸은 깨달아간다.
그러나 미셸네 가정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늘 스스로 판단하게 하고 의견을 존중해주었던 엄마, 다발성경화증이라는 불치병에도 불구하고 의연한 삶이 무엇인지 몸소 보여준 아빠, 재능을 활짝 꽃피운 믿음직한 오빠 아래에서 어린 미셸은 단단하게 영글어간다(“나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노력의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계단참에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읽고 문법에 맞게 또박또박 말하는 법을 배우던 열 살 미셸에게, 어느 날 친구는 “넌 왜 백인 여자애처럼 말해?”라고 묻는다. 미셸은 이 순간 “내 인생의 숙제를 직감”했고 “앞으로 내 출신과 내가 바라는 미래를 내 정체성과 조화시켜나가야 했다”라고 말한다. 가난한 집안의 흑인 여성이라는 세 겹의 질곡 아래 태어났지만, 성실함의 힘을 믿고 중심을 향해 헤엄쳐 나아가야 했던 한 소녀. 미셸의 시작은 수많은 모순과 하나의 진실을 품고 있었다.

변곡점에 서다:
버락과의 만남과 여성으로서의 삶


미셸은 특유의 성실함과 승리욕으로 우등생으로 자라난다. 헌신적인 부모 덕분이기도 했지만, “나는 이대로 충분할까?”라는 불안감이 스스로를 추동한 결과였다. 고등학교 진학 상담사가 “네가 프린스턴에 갈 재목인지 잘 모르겠구나” 하며 적대적인 말을 내뱉었을 때에도 그녀는 “두고 보라지” 하면서 기어코 프린스턴대에 입학한다. 그후 하버드대 로스쿨에까지 진학하고, 오로지 현실적인 성공을 향해 앞만 보면서 나아간다(“애석하지만 그게 나였다”). 그러고는 마침내 고향 시카고로 금의환향해 일류 법률 회사인 시들리 앤드 오스틴에 변호사로 취직한다. 모든 것이 만족스러운 삶이었다. 그 회사에 “희한한 이름”을 가진 신입 인턴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버락은 첫 만남에서 지각을 했다. 늘 어슬렁거리면서도 불안정한 면이 없는, “유니콘처럼 비현실적인” 그와의 만남은 사다리를 착착 오르던 미셸의 삶을 전혀 다른 궤도로 이끈다. 그에게 끌리면서도 애써 그를 마음속에서 밀쳐내던 그녀에게 버락은 거침없이 다가온다. 어느 날 밤 그가 아이스크림을 먹다 말고 “키스해도 되나요?” 하고 묻는 순간 그녀의 인생은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선다. 곧 이어진 사내 연애와 결혼, 그리고 임신에 얽힌 말 못 할 이야기까지, 미셸은 이제까지 한 번도 공개한 적이 없었던 내밀한 이야기들을 털어놓는다.
<비커밍>은 한 소녀가 여성, 엄마, 퍼스트레이디로 거듭나면서 인생과 사람을 알아나가는 성장 스토리이자, 더 이상 솔직할 수 없는 치열한 삶의 기록이다. 그녀는 일과 육아에 지쳐 남편과 매일 싸워야 했던 여성으로서의 고통을 들려주는 한편, 인생의 목적을 고민하게 된 혼란을 생생하게 고백한다(“나는 내가 원하는 삶이 무엇인지 몰라서 혼란스럽다” “혼란을 안긴 버락이 고마우면서도 미웠다”). 자신의 꿈이 뭔지도 모르고 좋은 직업을 위해 내달리던 모습과 실패들을 솔직하게 고백하는가 하면, 아버지와 친구의 죽음으로 깨닫게 된 인생의 의미를 묵직하게 전한다. 그녀는 의심 없이 단번에 꿈을 찾아낸 행운아가 아니다. 수많은 시행착오와 우연, 노력으로 자신의 길을 만들어가는 여정의 한복판에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 ‘비커밍(Becoming)’인 것은 그 때문이다.

“걱정 말고 미래를 그리세요”:
삶의 우연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나가는 용기


버락과의 결혼 후 미셸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된다. 자신의 일과 가정생활을 병행하기 위해 초인적인 스케줄로 일하는 한편, 자신의 소명을 깨닫고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일들을 만들어간다. 청년들의 공직 커리어를 돕는 ‘퍼블릭 앨라이스(Public Allies)’를 출범시키고, 고향 시카고 시정부와 시카고대 부속병원에서도 중책을 맡는다.
그러나 버락이 뜻밖에 정치적 인기를 얻고 결국 대통령이 됨에 따라 본격적으로 정치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미셸은 이 책에서 그 과정에서 있었던 수많은 음해와 고통, 소회를 전한다. 휴가지에서 갑자기 아이가 아파서 급한 표결에 참여하지 못해 버락이 정치적으로 큰 손해를 봤던 사연, 오바마의 출생에 대한 트럼프의 근거 없는 의혹 제기, 미셸 자신의 연설을 교묘하게 조작했던 가짜 뉴스와 음해, “저들이 저열하게 가더라도, 우리는 품위를 지킵시다”라고 말했던 배경, 트럼프가 당선된 뒤에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마음, 그러나 임기를 다하면서 인수인계에 최선을 다했던 일까지.
미셸은 단지 퍼스트레이디라는 아름다운 꽃으로 남지 않았다. 그녀는 백악관을 모두에게 열린 공간으로 탈바꿈시켰고, 건강한 식단을 알리기 위해 텃밭을 일궜다. 식품회사와 싸웠고, 불행한 총기 사건들에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덕분에 4500만 명의 아이들이 더 나은 아침과 점심을 먹었고, 1100만 명의 학생들이 체육 수업을 더 즐길 수 있었으며, 150만 명의 군인과 배우자 들이 직업을 구할 수 있었다. 그 누구보다 교육의 혜택을 본 사람으로서, 그녀는 어린 여성들의 교육에 힘을 쏟았고 힘없는 사람들의 보호자가 되었다. 그녀 말마따나 퍼스트레이디는 “공식 직함도 아니고 연봉도 없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최대한 활용해 세상을 조금씩 움직여나갔다. 운명은 그녀에게 무엇 하나 제대로 주지 않았지만, 그녀는 자신을 믿었고 더 아름다운 삶에 눈감지 않았다. 그녀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했다.
흑인 노예의 후손으로 태어나 백악관의 주인이 되기까지, 누구보다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온 그녀는 그 소중한 경험을 통해 우리에게 절대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 말라고 말한다.

“희망 말고는 줄 것이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미래를 그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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