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fi

강성은 지음 | 문학과지성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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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간일

2018.6.29

페이지

96쪽

상세 정보

문학과지성 시인선 511권. 강성은의 세번째 시집. 강성은은 2005년 문학동네신인상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동화적 상상력을 낯선 방식으로 풀어낸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와 무의식적 주체를 통해 잠재된 감각을 탐구한 <단지 조금 이상한>으로 평단의 주목을 받아왔다. 이번 시집에서 강성은은 기존에 보여주었던 초현실적 상상력을 뒤틀어 현실 세계를 내파하는, 그리하여 미세한 균열을 통과해 자신만의 불가해한 시공간을 탄생시키는 데 이르렀다.

<Lo-fi>는 '저음질'을 뜻하는 음향 용어에 걸맞게 독자들을 한순간에 정체불명의, 나직하고 깊은, 확신이 불가능한 시공간으로 데려다놓는다. "강성은이 옹호하는 세계는 없다"(시인 함성호)는 말처럼 이제 그녀의 시를 읽는 일은 이편의 세계에서 저편의 세계로 건너가는 일이 아니라 그동안 안락하게 누려오던 현실 세계가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감각을 선사한다.

이러한 경험은 모리스 블랑쇼가 정의한 문학처럼 읽는 존재에게 '어떤 일'이 발생하도록 이끌어 우리가 새삼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영문을 알 수 없게 만든다. 세계에 대한 확신을 걷어내야만 비로소 가능한 삶으로 순식간에 독자의 위치를 옮겨다 놓는 것이다.

그 위치는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이거나 영면 이후의 시공간이기도 하고, 현실도 꿈도 아닌 지점이거나 환상에서 깨어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내면과 현실 세계, 그리고 시인이 고유하게 구축한 '어떤 세계'까지 한순간에 감각하는 경험은 강성은의 시를 따라 읽는 독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황홀한 시적 경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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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fahr

@kafahr


자정 너머 눈 쌓인 길을 걸어 집으로 가는 남자
인적 없는 밤길
둘에 하나는 고장 난 가로등
갸우뚱했지만 남자는
발이 푹푹 빠져 들어가는 눈길을 겨우 헤치고 나아간다
어디선가 살아 있는 것이 낑낑거리는 소릴 들었지
눈 속에 파묻힌 개를 끌어 올려 품에 안고
작은 개야, 오늘 밤은 나와 함께 가자
다시 컴컴한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 장면을 보던 나는 알아버렸지
아,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구나

저들은 아주 행복해 보였고
그것은 오래전의 먼 일이었으나

가능하다면 미래이길
나는 그들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 ‘밝은 미래’, 강성은


그 여자는
살아 있을 땐 죽은 여자 같더니
죽고 나선 산 여자처럼

밤의 정원
이 나무 저 나무를 옮겨다니는 작은 새처럼
밤하늘을 떠다니는 검은 연처럼

장갑을 끼면 손가락이 생겨나고
양말을 신으면 발가락이 생겨나고
모자를 쓰면 머리가 생겨난다

책을 읽으면 눈이 생겨나고
음악을 들을 땐 귀가 생겨나고
하고 싶은 말이 떠오르면 입술이 생겨나는데

그 여자는
살아 있을 때도
죽어서도 입이 있어도
말은 못한다

- ‘Ghost’, 강성은


겨울밤
복도에는 복도의 소리
빈방에서는 빈방의 소리가 나고
거울 속에는 거울 속의 소리가 난다

눈길에 장화를 신은 남자가
나무를 끌고 가는 소리
겨울
음악은 사운드지
네가 말했다
쓸모없는 소리
내가 말했지

너의 불안에도 소리가 있어
귀뚜라미 소리
마룻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
누가 오나 보다

- ‘사운드’, 강성은


더러워진다고 죽는 건 아니다
잠들기 전 사람들은 눈을 감고 속으로 되뇌었다

- ‘부고訃告’中, 강성은


그는 입속에 차곡차곡 쌓아둔 말 때문에 어느 날 밤 아래로 가라앉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 말들이 자갈처럼 무거워져서 도저히 몸을 일으킬 수가 없다고 매일매일 조금씩 가라앉고 있다고 했다 삼 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가라앉고 있다고 이건 꿈이 분명하다고 그런데 이렇게 긴 꿈은 처음이라고 이 꿈에서 깨는 방법을 알고 싶다고 겨우 말을 이었다 그는 입속의 말들이 어떻게 돌멩이가 되는지 내 속에 어떻게 이렇게 많은 돌멩이들이 있는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모든 이야기에는 끝이 있고 모든 영화에는 엔딩이 있는데 어째서 이 꿈에는 출구가 없는지 도무지 모르겠다고 했다 얼마나 더 아래로 내려가야 바닥에 닿을 수 있는지 과연 바닥이라는 것이 있기나 한 건지 알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당신이 내가 삼 년 만에 처음 본 사람인데 당신도 이 꿈의 마지막을 알 수 없겠지요,라고 슬픈 눈빛으로 말했다 나는 자갈이 목까지 차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더 아래로 깊이 가라앉고 있었다

- ‘저지대’, 강성은


우린 다 죽었지
그런데 우리가 죽었다는 걸 아무도 모른다
우린 이미 죽었어요
말해도 모른다
매일 갑판을 쓸고 물청소를 하고
죽은 쥐들과 생선, 서로의 시체를 바다로 던져버리고
태양을 본다
태양은 매일 뜨지
태양은 죽지 않아
밤이면 우리가 죽었다는 것을
죽음 이후에도 먹고 자고 울 수 있으며
울어도 바뀌는 건 없으며
삶은 계속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검은 쌀과 검은 물과 검은 밤의 폭풍을 오래오래
이가 녹아 사라질 때까지 씹는다
침수와 참수와 잠수의 밤


언젠가 우린 같은 꿈을 꾸었지
아주 무서운 꿈이었는데
꿈에서 본 것을 설명할 수 없어
잠에서 깬 우리는 모두 울고 있었다


아침이면 다시 태양 아래 가득 쌓여 있는
형체를 가늠하기 어려운 것들


풍랑을 일으킨 거센 비바람은
누군가의 주문이었다는데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우리의 출항은 순조로워 보였는데
날씨는 맑았고
우리가 당도할 항구의 날씨는 더 맑고 따뜻했는데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나와 너의 그의 그녀의 너희의 그들의 우리의
아주 무서운 꿈속에서


그곳에 당도하기를
우린 아직도 바라고 있구나
이제 우리 자신이 무서운 바다의 일부인 줄도 모르고

- ‘유령선’, 강성은


좋은 사람들이 몰려왔다가
자꾸 나를 먼 곳에 옮겨 놓고 가버린다

나는 바지에 묻은 흙을 툭툭 털고 일어나
좋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온다

쌀을 씻고 두부를 썰다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들고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워

생각한다
생각한다

생각한다

- ‘죄와 벌’, 강성은


Lo-fi

강성은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2019년 11월 25일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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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주

@nl820gnrgn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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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렸다
홍학도 원숭이도 사자도 기린도 라마도 하마도 물개도
늑대와 너구리와 수달도
비를 보지 못했다
해도 보지 못했다

실종된 아이들이 동물원에 살고 있다는 소문
잃어버린 아이들을 찾으러
눈 멀고 귀 먹은 백발의 노인들이
동물원 더 깊숙이 들어갔다

작년에 탈출했던 곰이 돌아왔다
작년에 사자에게 물려 죽은 조련사도 돌아왔다
동물원 밖에도 동물이 있다고
동물원 밖에도 동물원이 있다고

신들이 사라지고 나선
이제 인간들이 사라지는 일만 남았다고

<동물원>






좋은 사람들이 몰려 왔다가
자꾸 나를 모르는 곳에 옮겨 놓고 가 버린다

나는 바지에 묻은 흙을 툭툭 털고 일어나
좋은 사람들도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온다

쌀을 씻고 두부를 썰다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들고
불을 끄고 잠 자리에 누워

생각한다
생각한다

생각한다

<죄와 벌>

서평/ 독특한 세계관의 시를 만나다

올해는 목표를 시집을 읽는 것으로 잡았다. 책의 장르를 정해 놓고 읽었던 해는 없었는데 내가 시를 쓰자고 마음 먹자 시를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정말 독특한 시가 참 많은데 이 시집도 기억에 남는 시집이 될 것 같다. 세계관의 독특하다고 할 수 있겠다. 시집 제목만 봐도 그렇다. 제목이 중복된 시가 몇 번이나 나왔다. 특히 'Ghost'에는 유령이 등장하는 시였다. 이 시의 화자는 유령일까 나 일까 아니면 유령을 보는 관찰자 시점 일까. 책의 해설에도 나오듯이 '화자가 누구일까' 그 생각을 정말 많이 하면서 읽었던 것 같다. 이 시 뒤에 도대체 무엇이 의미하는 것들이 있을지 정말 궁금해지는 그런 여운이 남는 시.

시의 의도가 파악이되지 않는 시도 참 많았다. 그래서 세계관을 참 독특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읽는 사람들마다 해석이 다른 것이 시라지만, 해석하기 어려운 내용이 많아서 무슨 내용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어떤 시는 현실인지 비현실인지 몽상인지 꿈인지 구분하는데 여념이 없었고, 어떤 시는 그냥 읽고 지나가는 한 스토리 같기도 했다. 기억에 남지 않는 시도 많았다.

이런 식으로 시가 쓰여지기도 하는구나 한수 배워 가는 중.

시간이 흘러 다시 읽으면 느낌이 또 다를 듯 하다.

Lo-fi

강성은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2019년 2월 1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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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세정보

문학과지성 시인선 511권. 강성은의 세번째 시집. 강성은은 2005년 문학동네신인상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동화적 상상력을 낯선 방식으로 풀어낸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와 무의식적 주체를 통해 잠재된 감각을 탐구한 <단지 조금 이상한>으로 평단의 주목을 받아왔다. 이번 시집에서 강성은은 기존에 보여주었던 초현실적 상상력을 뒤틀어 현실 세계를 내파하는, 그리하여 미세한 균열을 통과해 자신만의 불가해한 시공간을 탄생시키는 데 이르렀다.

<Lo-fi>는 '저음질'을 뜻하는 음향 용어에 걸맞게 독자들을 한순간에 정체불명의, 나직하고 깊은, 확신이 불가능한 시공간으로 데려다놓는다. "강성은이 옹호하는 세계는 없다"(시인 함성호)는 말처럼 이제 그녀의 시를 읽는 일은 이편의 세계에서 저편의 세계로 건너가는 일이 아니라 그동안 안락하게 누려오던 현실 세계가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감각을 선사한다.

이러한 경험은 모리스 블랑쇼가 정의한 문학처럼 읽는 존재에게 '어떤 일'이 발생하도록 이끌어 우리가 새삼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영문을 알 수 없게 만든다. 세계에 대한 확신을 걷어내야만 비로소 가능한 삶으로 순식간에 독자의 위치를 옮겨다 놓는 것이다.

그 위치는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이거나 영면 이후의 시공간이기도 하고, 현실도 꿈도 아닌 지점이거나 환상에서 깨어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내면과 현실 세계, 그리고 시인이 고유하게 구축한 '어떤 세계'까지 한순간에 감각하는 경험은 강성은의 시를 따라 읽는 독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황홀한 시적 경험일 것이다.

출판사 책 소개

견고한 현실을 무너뜨리는 상상력의 시공간
황홀함을 부르는 나직한 읊조림


강성은의 세번째 시집 『Lo-fi』(문학과지성사, 2018)가 출간되었다. 강성은은 2005년 문학동네신인상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래 동화적 상상력을 낯선 방식으로 풀어낸 『구두를 신고 잠이 들었다』(창비, 2009)와 무의식적 주체를 통해 잠재된 감각을 탐구한 『단지 조금 이상한』(문학과지성사, 2013)으로 평단의 주목을 받아왔다. 이번 시집에서 강성은은 기존에 보여주었던 초현실적 상상력을 뒤틀어 현실 세계를 내파하는, 그리하여 미세한 균열을 통과해 자신만의 불가해한 시공간을 탄생시키는 데 이르렀다.
『Lo-fi』는 ‘저음질’을 뜻하는 음향 용어에 걸맞게 독자들을 한순간에 정체불명의, 나직하고 깊은, 확신이 불가능한 시공간으로 데려다놓는다. “강성은이 옹호하는 세계는 없다”(시인 함성호)는 말처럼 이제 그녀의 시를 읽는 일은 이편의 세계에서 저편의 세계로 건너가는 일이 아니라 그동안 안락하게 누려오던 현실 세계가 통째로 무너져 내리는 감각을 선사한다. 이러한 경험은 모리스 블랑쇼가 정의한 문학처럼 읽는 존재에게 ‘어떤 일’이 발생하도록 이끌어 우리가 새삼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영문을 알 수 없게 만든다. 세계에 대한 확신을 걷어내야만 비로소 가능한 삶으로 순식간에 독자의 위치를 옮겨다 놓는 것이다. 그 위치는 우리가 태어나기 이전이거나 영면 이후의 시공간이기도 하고, 현실도 꿈도 아닌 지점이거나 환상에서 깨어나는 과정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내면과 현실 세계, 그리고 시인이 고유하게 구축한 ‘어떤 세계’까지 한순간에 감각하는 경험은 강성은의 시를 따라 읽는 독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황홀한 시적 경험일 것이다.

‘지금-여기’라는 알 수 없는 시공간에서

『Lo-fi』를 여는 첫 시는 음력의 마지막 날짜를 의미하는 「섣달그믐」이다. 이는 두번째 시집 『단지 조금 이상한』을 열었던 첫 시가 삶의 마지막 날짜를 의미하는 「기일忌日」이었던 것과 겹쳐진다. 이처럼 강성은은 끝나야만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죽어야만 새롭게 살아볼 수 시적 상황을 펼쳐 보이곤 한다. “밖에선 종말처럼 어두운 눈이 내리고” 있는데 “나는 이제 잠에서 깨버릴 것 같”다고 말하거나(「섣달그믐」), “삶을 포기하고 나면/죽음을 기다리고 있으면/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그가 잠에서 깨어나는 것”(「카프카의 잠」)이라고 말하는 식이다. 이러한 언술은 독자를 삶과 죽음의 경계라는 시간적 틈새로, 현실과 꿈의 접점이라는 공간적 틈새로 유도한다. 시를 따라 읽던 독자가 어느 순간 살아 있는 것도 죽은 것도 아닌, 현실도 꿈도 아닌 불가해한 지점에 당도하도록 이끄는 것이다.

어디선가 살아 있는 것이 낑낑거리는 소릴 들었지
눈 속에 파묻힌 개를 끌어 올려 품에 안고
작은 개야, 오늘 밤은 나와 함께 가자
다시 컴컴한 어둠 속에서
길을 찾아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 장면을 보던 나는 알아버렸지
아,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구나
―「밝은 미래」 부분

어느 겨울밤, 한 남자는 “살아 있는 것이 낑낑거리는 소릴” 듣고 눈 속에서 파묻힌 개를 찾아낸다. 그런데 이 장면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화자는 별안간 깨닫는다. “아, 나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구나”. 그 순간 독자는 이 목소리가 어디에서 누구로부터 들려오는지 가늠할 수 없게 된다. 시적 상황에서 비롯한 불가해함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의 목소리를 따라 읽던 독자의 것으로 고스란히 옮겨지는 것이다. 강성은은 이러한 방식을 통해 독자가 익숙하게 확신해온 ‘지금-여기’라는 감각이야말로 가장 믿기 어려운 감각이 아닌지를 묻는다.

생각이라는 새로운 삶의 징조

그렇다면 시인이 펼쳐 보이는 세계의 불확실성을 읽고 난 후, 우리는 어디에 도달하는가. 시적 경험을 통해서만 가능한 생의 이면을 겪고 난 뒤, 우리의 삶에는 무엇이 남는가.

좋은 사람들이 몰려왔다가
자꾸 나를 먼 곳에 옮겨 놓고 가버린다

나는 바지에 묻은 흙을 툭툭 털고 일어나
좋은 사람들을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온다

쌀을 씻고 두부를 썰다
식탁에 앉아 숟가락을 들고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워

생각한다
생각한다

생각한다
―「죄와 벌」 전문

이 시에서 ‘나’에게는 이렇다 할 사건이 발생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생각한다”라는 구절이 세 번 반복될 때, 우리는 이 시의 제목인 ‘죄와 벌’을 자연스레 떠올릴 수밖에 없다. 좋은 사람들에게 버려진 ‘나’는 응당 내게 있을 어떤 ‘죄와 벌’을, 아무에게도 고백한 적 없는 ‘죄와 벌’을 상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가 시집을 닫는 마지막 시임을 감안할 때, 시인이 “좋은 사람”의 입장에 서서 독자인 우리를 징벌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는 문학평론가 장은정의 해설처럼 “좋은 사람”을 “좋은 시”로 바꿔 읽는 순간 납득이 가능하다. 좋은 시들이 몰려와서 자꾸 우리를 먼 곳에 옮겨 놓으면, 우리는 별일 아니라는 듯 흙을 툭툭 털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온다. 쌀을 씻고 숟가락을 들고 잠자리에 눕는 등 평범한 일상을 이어간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것은 아마도 쉽게 잊히지 않는 “좋은 시들”에 관한 생각일 것이다. 강성은은 이 ‘생각’들을 통해 시적 경험이 우리의 현실, 각각의 삶에 현현하도록 이끈다. 불가해한 경험을 끊임없이 상기함으로써만 우리의 경직된 일상이 미약하나마 변화의 징조를 품은 삶으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Lo-fi』는 시집을 덮는 순간 황홀한 시적 경험을 통과해온 우리가 조금씩 달라지는 현실과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안겨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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