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ed by
은서
여러분은 어떤 계절을 좋아하세요? 여름을 좋아하세요, 겨울을 좋아하세요? 저는 몇 년 전까지 겨울을 좋아했는데요. 어느 순간부터 여름을 기다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때는 2020년, 그때의 저는 겨울을 좋아했어요. 그 시절 저는 심적으로 조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어서 만물이 생동하는 봄, 여름보다는 조용하고 고독한 겨울이 제 마음의 일부분과 닮았다고 느꼈습니다. 앙상한 나무를 보면 왜인지 동질감이 느껴지고 어딘가 황폐한 겨울이 좋았어요. 그때 저는 꽤 힘들었었나 봅니다.


그러다가 해가 바뀌면서, 이유는 모르겠지만 여름이 채 오기 전부터 여름 분위기가 그리워졌어요. 그해를 기점으로 저는 여름을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돌아보니 2021년 봄에 학교 교지에 글을 하나 기고했더라고요. 제목은 <즐거움의 세계>. 그 글은 제목처럼 그동안 무시했던 즐거움의 세계로 나아가겠다는 다짐 같은 이야기였어요. 당시 스물세 살이었던 저는 그때까지 주변에서 하는 말처럼 대기업, 공기업, 전문직 중 하나를 골라 준비해야만 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어요. 그래서 2년 동안 좋아하지도 않는 회계나 금융권을 골라잡아 그걸 나의 업으로 삼겠노라 생각했었죠.


하지만 숫자보다 글이나 말과 친한 저는 그 세계에 깊이 들어갈수록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았어요. 내 마음에 따른 선택이 아니라 대체 누가 한 말인지도 모르는, 그냥 이걸 하면 성공인 것만 같은 길을 따라가니 불안과 무기력만 날이 갈수록 커졌죠. 끝없는 불안감이 저를 잡아먹을 것 같은 느낌이 들고 나서야 저는 결심했어요. 이제는 내가 즐거움을 느끼는 일을 찾아가겠다고요. 그때 쓴 기고 글은 제가 글과 문학을 좋아한다는 자각이자 지금까지 잃어버렸던 즐거움을 되찾는 연습을 하겠다는 선언이었어요.


사실 당시에는 그다지 큰 의미는 없는 작은 다짐이라고 생각했는데요. 정말 인생은 말하는 대로 흘러가는 걸까요? 지금 보니 제 인생은 그 말처럼 흘러갔어요. 그해 여름에는 책을 유독 많이 읽었습니다. 다른 걱정들은 모두 내려놓고 조용한 방에서 좋아하는 책들을 천천히 읽었고, 또 책을 읽고 느낀 점을 글로 썼어요. 즐거운 추억도 많이 만들었어요. 강원도 동해 깊은 산 속에 위치한 삼화사로 템플스테이를 가서 제 생애 최고의 일출도 보고, 깊어 가는 밤에 스님과 차담도 나눴어요. 친구들과 함께 캠핑도 떠났고, 좋아하는 그릭 요거트에 여름 복숭아를 가득 넣어 먹으며 즐거운 일상을 보냈습니다.


2021년 여름, 강원도 동해로 떠난 템플스테이에서 담은 여름

그 여름에 읽었던 책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은 단연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입니다. 이 책은 제가 여름을 좋아하게 된 순간의 시작과도 같아요. 누군가 여름 분위기를 담은 책을 찾는다면 저는 항상 이 소설을 추천합니다. 제게도 여름만 되면 떠오르는 책이기 때문이에요. 이 책은 무라이 설계사무소의 여름 별장에서 국립 현대 도서관 설계 경합에 참가하는 과정을 그리는 소설로 책 읽는 내내 숲속의 여름 별장에 함께 들어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요. 건축이 이야기의 주재료지만 새, 요리, 차, 도서관, 식물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함께 어우러집니다.
이 소설을 읽고 건축이 상당히 매력적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설계 사무소의 선생님인 무라이 슈스케는 말합니다. “건축은 예술이 아니야. 현실 그 자체지.” 소설의 화자인 사카니시 군이 여러 번 되뇌는 말이기도 합니다. 건축은 분명 공간을 창조해 내는 작업이지만 사람들이 사용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실제로 쓰고 다니기에 편리해야 합니다. 또한 오래 쓰다가 닳아지고 고장 나면 보수가 필요하죠.

“먹고 자고 사는 곳이라고 한 것은 참 적절한 표현이야. 이들은 뗄 수 없는 한 단어로 생각해야 돼. 먹고 자는 것에 관심 없이 사는 곳만 만들겠다는 것은 그릇만 만들겠다는 얘기잖아? 그러니까 나는 부엌일을 안 하는 건축가에게 적어도 내가 살 집을 설계해달라고 부탁할 수는 없어.”

― 106p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 비채 펴냄
사카니시가 제 나이와 비슷한 나이의 사회 초년생 청년이어서 같이 혼나는 것 같은 구절들도 있었어요.

“사카니시 군, 이 사람은 무뚝뚝해 보이지만 사실은 친절해요. 그러니까 ‘이거는? 저거는?’ 하고 귀찮을 만큼 물어서 힘들게 만드는 게 좋아요. 그렇게 하면 넘칠 만큼 대답해 줘요. 하지만 사카니시 군은 상대방이 먼저 나서줄 때까지 기다리는 타입인가요? (중략) 본인이 삼가서 잠자코 있는 것하고 그저 멍하니 있는 것은 전혀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상대방한테는 똑같아요.”

― 267p

사카니시가 혼자서 스태킹 체어 연구에 끙끙대자 선생님이 완벽한 건축이란 존재하지 않고, 내가 틀렸을 경우를 대비해서 넉넉한 시간을 두고 함께 일하는 사람과 공유해야 하며, 신뢰와 협동 없이는 같이 일할 수 없다고 질책한 부분도 마음에 남았어요.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섬세하고 평화롭지만 단단한 이야기입니다. 식물, 음식, 차와 함께평화롭고 고즈넉한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을 그리지만 모두 본인만의 단단한 중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죠. 거의 마지막에 주인공 사카니시의 나이가 그때 당시 저의 나이와 같은 스물셋이라는 걸 알았을 때, 부러운 마음도 들었어요.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니, 나도 사카니시처럼 그렇게 살 수 있을까?’하는 마음이 들었죠. 정확히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도, 내가 무슨 일을 잘하는지도 몰라 갈팡질팡하던 때라 더욱 그랬습니다.

템플 스테이 당시 묵었던 숙소

저는 이 책을 읽으며 2021년 여름을 한껏 즐겁게 보냈고 전환점을 맞았습니다. 즐거운 기억들이 몸에 차곡차곡 쌓이자 변화가 일어나는 것 같았어요. 먼저 그 여름을 기점으로 하고 싶은 일이 생겼어요. 우연히 들은 마케팅 수업에서 흥미를 느끼고 이후에 마케팅 동아리에 들어가 열심히 활동하면서 차근차근 마케팅 일 경험도 쌓아 나가다가 이제 막 어엿한 마케터로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몇 년 전 내가 부러워하던 사카니시처럼 좋은 사람들과 내가 좋아하는 일을 잘해 나갈 수 있을까요? 걱정도 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좋습니다. 앞으로 어떤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무라이 슈스케 선생님의 말씀도 가끔 떠올리며 잘 헤쳐 나가보려고 해요.


그리고 좋아하는 계절이 겨울에서 여름으로 바뀌었습니다. 언젠가부터 겨울에는 사진을 거의 찍지 않고, 여름에는 갤러리가 꽉 차는 현상을 발견했어요. 보통 즐거운 순간에 핸드폰을 들어 사진을 찍다 보니 ‘나는 겨울보다 여름에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이구나’를 확실히 깨달았어요. 무엇보다 책들을 읽으며 평화롭게 보냈던 여름의 기억, 친구들과 즐겁게 여행을 떠났던 순간들이 제가 여름을 좋아하는 이유가 되었을 거예요.


누군가는 크리스마스가, 겨울에만 느낄 수 있는 이불 속 따뜻함이 좋아서 겨울을 좋아할 텐데요. 그저 겨울의 앙상함이 좋았던 제가 여름을 즐거운 기억으로 채워 나가면서 그 추억들로 여름을 좋아하게 되었다는 게 참 기특합니다. 다시 한번 물어보고 싶네요. 여러분은 어떤 계절을 좋아하세요? 그리고 어떤 이유로 그 계절을 좋아하시나요? 부디 어떠한 계절을 좋아하는 이유가 즐거움으로 가득 채워져 있기를 바랍니다.